바람직한 음악 감상법 4

| 2011. 8. 14. 15:08

본론은 두 번째 글세 번째 글로 사실상 끝이 났다.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이 필요한 이유를 두 번째 글에서 밝혔고, 이어지는 글에선 그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이 무엇인지, 간단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결국 여러 개의 짤방과, 수백 개의 문장과, 수천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균형 잡힌 음악 취향을 들이자.


그 방대한 양의 글이 이렇게 요약이 간단하게 된다는 것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저 간단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족을 너무 많이 달아 마치 지네와 비슷한 글이 되었다는 것이겠고 둘째는 그렇게 많은 사족이 필요한 만큼 간단한 메시지를 스스로 깨닫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겠다.
글을 쓴 사람으로서 후자가 좀 더 진실에 가깝기를 바라지만 전자의 경우도 상당히 수긍할만하게끔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내 글 쓰는 능력에 대한 질문이므로 논외로 하고 넘어가자.

불균형이라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무서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대수에 능하지만 기하에 약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A와 ㅡ 기왕이면 여고생으로 가정하자. 그 편이 좀 더 흐뭇하니까. ㅡ 기하는 문제가 없지만 대수만 나오면 죽을 쑤는 미모의 여고생 B가 있다고 하자.
A와 B에게 동시에 적용되는 조언은 '수학 공부를 균형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조언은 사실상 문제를 직접 겪고 있는 두 학생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누가 공부하면 된다는 사실을 몰라서 안 좋은 성적을 받고 있겠는가!

앞서 나온 두 글은, 자신의 문제조차 깨닫고 있지 못한, 즉 정말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지침이었다.
수학 공부에 대해서 앞선 글과 같은 글을 썼더라면 그것은 지진아들을 위한 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경우엔 지진아의 수가 수학의 경우보다 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앞의 글들이 시사하는 문제 제기는 꽤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꼭 그런 관점에 서지 않고 누구나 읽고 수긍할 수 있다는 면에서라도 나름 가치 있는 글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들의 교육 법에 대한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리라.

그렇다면 기초적인 방법, 즉 균형적인 공부 또는 균형적인 음악 청취를 하면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여전히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에겐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이에 대해 지향점이 같은 두 가지 다른 맥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과외'다.
우리나라 교육 산업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병폐인 과외를 통해 학습이 부진한 학생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자세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각종 장르에 정통한 전문가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특정 뮤지션이나 특정 곡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자세하고 방대한 양의 설명을 곁들일 수 있다.
실제로 다른 분야보다 클래식에서 위와 같은 모습을 자주 그리고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음악에 대한 그런 교과서적인 접근은 물론 많은 도움이 된다.
스스로 음악을 찾아 들을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이 권위성에 의존해 선정된 좋은 음악을 골라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대로, 이 방법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 한계는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기호성을 강하게 띄고, 수학과는 달리 정답이라는 궁극적 목표가 없다는 본질적인 차이에서 기인한다.
청자는 자신만의 취향을 갖기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취향을, 때로는 조작된 취향을 갖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옳고 그름이란 없는 분야에서 하등 의미 없는 논쟁을 일삼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의 음악의 흐름을 지엽적이 아닌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음악에 있어 그런 과외 강사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과외 활동 자체도 진정한 의미를 갖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이런 과외 선생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서 두 번째 맥락이 등장한다.
이 맥락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유행하던 이른바 열린 교육이라고 불리던 방식을 어느 정도 표방하고 있다.
교육을 받는 사람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최소한의 물길만 잡아주는 것이다.
몇 가지 권장할만한 기준이나 원칙을 제시하고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독학을 하라는 이 방법은 정말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무책임하다는 질타를 받을 수 있으나 음악 감상법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쓸만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번 말하지만, 결국 음악이란 개개인의 호불호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잡아줄 수 있는 물길엔 무엇 무엇이 있을까?

첫째로 생각나는 것은 음악을 들을 때 앨범 단위로 감상을 하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싱글 앨범의 발매가 점점 빈번해지고 인터넷을 통해 곡 단위로 파일을 다운받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서 앨범 하나가 그 전체로서 갖는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앨범이라는 전체가 갖는 의미는 트랙 하나 하나의 합을 능가한다.
어떤 뮤지션은 그의 몇 가지 대표곡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앨범에 수록된 별로 유명하지 않은 곡들 또한 그의 음악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히트곡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요소들이다.
앨범 전체를 감상하는 것은 프리미어 리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앨런 스미스의 리즈 시절 정도는 꿰고 있어야 한다는 유치한 장난 이상의 의미가 있는 습관이다.
특정 뮤지션이나 앨범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최근에 나의 오해를 풀어준 앨범은 미스 에이의 정규 1집 'A Class'이다.
그들의 앨범을 통해 나는 미스 에이와 같은 걸 그룹의 음악에 대한 오해는 물론 전반적인 아이돌 음악에 대한 오해까지 해소할 수 있었다.
마치 내가 자미로콰이의 'Funk Odyssey' 앨범을 통해 전자적인 사운드를 내는 음악에 대한 편견을 깨버렸던 것처럼.

둘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싱어송라이터 위주의 음악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한국 위키피디어에 따른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의 정의는 '작곡과와 가수를 겸하고 있는 사람'.
쉽게 말하면 싱어송라이터란 자기가 만든 노래를 자기가 직접 부르는 사람이다.
신사동 호랭이나 용감한 형제, 이트라이브 같은 작곡을 위주로 하는 사람도 아니요, 우리가 보통 알고있는 대다수의 발라드 가수들처럼 다른 사람이 써준 노래를 더 멋진 노래로 소화해내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다.
내가 이렇게 음악의 DIY에 집착하는 이유는 졸렬한 것이지만 스스로 곡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여러 번 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자작곡을 만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곡을 창조하는 것과 이미 존재하는 곡을 잘 카피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어떤 뮤지션의 음악성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평가하기 위해선 그 사람의 작곡 능력이라는 부분이 절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노래를 잘 해도 실제로 작곡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을 '가수'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뮤지션' 또는 '음악인'이라는 호칭을 쓸 수가 없다.
싱어송라이터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최소한 취향에 맞는 노래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반드시 알아두자.
그리고 그 사람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닌, 그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혀가자.
음악과 뮤지션에 대해 한층 깊고 한층 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좋은 방법을 알았으니 말이다.

내 비록 노래를 만들지 않아도 날 사랑해 줘요.


마지막은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음악의 존재 범위는 한낱 손바닥만한 플라스틱 원판이나 한 손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전자기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진짜 음악은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진짜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무대로 나가야 한다.
직접 공연에 참여해 말 그대로 오감을 통해 음악을 받아들여보자.
이는 녹음 실력보다 라이브 실력을 중시하자든가 아이돌이 노래만 불렀다 하면 MR부터 제거하고 보자는 실제 '노래 실력' 또는 '연주 실력'을 중시하는 태도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다.
단 한 번도 공연에 가보지 않은 사람과 그 한 번의 벽을 깬 사람이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은 굉장히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그만큼 공연이라는 행위는, 공연을 베푸는 사람으로서든 공연을 감상하는 사람으로서든 한 사람의 음악적 활동의 완성이다.
비유할만한 적절한 대상을 찾지 못해 다소 저질스러운 비유를 들자면, 야동만 봐온 동정의 사람과 어떻게든 그 동정을 깨버린 사람이 남녀가 침대 위에서[각주:1] 벌이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언제까지 동정남 동정녀로 지내고만 있을 것인가.

두루뭉술하지만 내가 음악을 즐기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위와 같은 몇 가지 큰 규칙들의 토대 위에 있다.
'한 번 들어서 귀에 익지 않아도 꾹 참고 여러 번 반복해서 듣자'는, 나름 내가 생각하기엔 상당히 중요한 규칙이 또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기엔 내 개인적인 철학과 결부되어 있는 면이 많아서 생략했다.
위에서 제시한 방법도 어디까지나 나의 의견에 불과하다.
인생에 대한 신조가 사람마다 다르듯, 음악 감상법에 존재할 수 있는 이런저런 규칙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나의 참고 사항을 제시했으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글을 읽는 사람의 자유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인 규칙이 하나 있다.
뮤지션이든 앨범이든 장르든 어떤 트랙이든 규칙이든 뭐든 좋으니 꼭 다른 사람과 공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법 MP3 공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 음악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과 서로 듣기 좋은 음악을 추천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누라는 것이다.
어차피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음악적인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
처음에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나 어느 임계점에 다다르면 한 쪽에 치중하는 사이 다른 한 쪽이 줄어드는 제로섬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음악 세계의 발전을 꾀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씨앗을 널리 퍼뜨려 불모지에 오아시스를 개척하는 것이다.

이 소박한 블로그를 통해 온라인으로, 또는 소소한 술자리를 통해 오프라인으로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예정이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바람직하게 음악을 감상해 나간다면 건전한 음악 문화와 탄탄한 음악 산업이 대한민국에 자리 잡을 날은 머지 않았다고 본다.
  1. 때로는 부엌일수도 식탁일수도 화장실일수도 있겠지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