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 있던 시절, 어쩔 수 없이 종교 활동의 일환으로 성당에 가게 되었다.
교회, 성당, 절 중에 택 1을 하는 체제 하에서 과거의 천주교와 맺었던 인연의 정을 생각한 선택이었다.
논산 훈련소 성당의 신부가 짐승에 가까운 훈련병들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사가 끝나고 나눠주는 과자와 음료수를 인질로 잡는 것뿐이었다.
그는 가끔씩 미사에 참석한 훈련병들의 태도가 좋지 않을 경우, 부식을 안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훈련병들의 마음을 졸이곤 했다.
다수의 불량한 훈련병에게 엄한 채찍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맞게 소수의 불량하지 않은 훈련병에게 당근을 하사하는 역할의 사람도 필요한 법.
역시 그런 이미지에는 수녀가 어울렸던 걸일까, 육군 훈련소 성당의 미사에는 꼭 수녀가 간단하게 교리를 설명하고 퀴즈를 내서 그것을 맞추는 사람에게 초코파이 한 박스를 주는 레크리에이션 성격의 시간이 꼭 포함되어 있었다.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종교 활동이 있는 한 일요일이었다.
차라리 잡일을 하더라도 종교 활동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날 주어진 잡일을 마치고 혼자 생활관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바깥 쪽이 웅성거리더니 성당으로 종교 활동을 하러 갔던 분대원들이 생활관으로 들어왔다.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알고 보니, 언젠가 퀴즈를 맞춰서 초코파이를 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32번 훈련병 이우성의 손에 초코파이 박스가 들려있었다.
부식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상으로 받은 초코파이를 28번 훈련병 오세만부터 40번 훈련병 문학중까지 기꺼이 1개씩 나누어주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날의 문제는 미사에서 파견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답은 바로 그 날 미사에서 수녀가 설명한 대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를 맞췄던 그가 훈련소를 벗어난 이후로 천주교 신자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아니 그보다 천주교 신자로 계속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전도(傳道)는 자기 수양보다 더 효율적으로 어떤 신념의 존재를 굳건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결국 수싸움으로 몰리게 되면 100인분의 믿음을 가진 한 사람보다 적당한 믿음을 가진 100명의 사람이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법이다. 1
전도를 신도의 기본 활동으로 삼은 모든 종교는 이런 면에서 영리한 것이다.
지난 글에서 내가 힘주어 말했던 것 역시 이 영리한 방법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다.
비록 그 출처는 종교적인 색채를 띄고 있으나 그 누구도 음악의 전도를 종교적인 활동으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비종교인이라고 해서 음악의 전도라는 방법론에 대해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밥 말리나 와이클리프 장을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도 더러 있겠으나 그것이 종교와 관련된 문제를 불러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장교주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에서 나는 불균형적인 대한민국 음악계의 실태와 문제점, 그리고 해결 방안을 서툰 언어를 통해 제시했다.
마지막 글의 마지막을 장식한 내용이 바로 서로 서로 자신의 음악관을 공유하고, 이 글의 맥락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음악 감상법을 채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음악에 대한 양(陽)의 시너지가 발휘되면 자생력 있는 음악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바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일련의 글이 갖는 공통적이며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궁극에 다다르기 전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들이 있다.
그 대부분은 나의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들로, 언젠가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만한 의문들이라고 판단된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로 나는 클래식 음악을 의도해서 듣지 않는다. 2
비발디 사계 중 ‘봄’의 인트로가 어떤 진행인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메인 멜로디가 어떤 식인지 정도는 알고 있지만 결국 그 수준이 음악 과목 필기 시험을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생의 그것과 비슷한 정도다.
비틀즈의 음악이 나왔을 때 당시의 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그들의 음악을 신나게 비난하다가 나중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평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현존하는 대중 음악은 모두 그 뿌리를 클래식에 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도 클래식을 듣는 고상한 남자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아있고, 클래식적인 요소와 크로스오버된 음악도 싫어하지 않는 편이지만 여러 변 겪었던 실패 때문인지 별로 손이 가지 않는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클래식 음악이 요새의 밴드 음악이나 MR 음악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면 어떨까?
이 의문은 이 글에서 다루는 음악이 크게 밴드 음악과 MR 음악, 두 가지인데 반해 현대 음악에 있어 분명히 또 다른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클래식이 그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비록 내게 미지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음악 감상법을 다루면서 클래식 음악을 빼놓는다는 것은 검은 잉크만으로 무지개를 그리려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다.
클래식 음악을 제 3의 카테고리로 병렬 배치하는 방법으로 분류의 문제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이미 글의 방향을 밴드 음악과 MR 음악으로 한정 지은 것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책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네 번째 글을 쓴 이후에서야 이 시리즈의 제목을 ‘바람직한 대중 음악 감상법’이라고 정하는 게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클래식 음악을 새 카테고리로 추가시키면 각종 음악 장르가 꼬리를 물고 따라와야 한다는 문제점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음악이라는 거대한 단어의 범위를 대중 음악으로 한정짓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3
클래식 음악은 분명히 MR 음악이나 밴드 음악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글에서 나는 MR 음악은 가창력과 춤을 대변하고, 밴드 음악은 악기의 연주라는 측면을 대변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클래식 음악은 음악에 대한 구조적인 지식과 이론을 제공하고 심층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음악이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된다는 것은 현재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이유는 한 시대를 유행하는 음악이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때로는 그 반대 방향의 현상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이 가지고 있는 중요도를 고려하면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중요한 존재가 빠져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고 느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또 짚고 가야 할 음악은 바로 전자 음악, 흔히들 일렉트로니카라고 말하는 장르다.
클래식 음악이 밴드 음악과 MR 음악 두 카테고리의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면 전자 음악은 저 두 음악의 교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와 이제는 락만큼이나 분위기 별로 세분화가 이루어진 전자 음악은 내가 밴드 음악이라고 구분하는 음악의 특성과 MR 음악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잽 앤 로저의 ‘Computer love’와 다프트 펑크의 ‘Something about us’, 자미로콰이의 ‘Twenty zero one’ 같은 음악과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샤이니의 ‘산소 같은 너’, 이효리의 ‘Hey Mr.Big’ 같은 음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스스로 만들어 낸 음악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과 다른 사람의 음악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차이점을 제외하고 음악 그 자체만 들었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상업성이라는 ㅡ 그 단어를 운운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책임하게 내뱉는 그 단어를 ㅡ 단어를 꺼낸다면 저 두 부류의 음악을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나로선 그런 차이를 두기가 사실상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서 이는 구분 본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쩌면 전자 음악의 대두는 밴드 음악과 MR 음악의 절충안으로서, 두 음악이 갖는 서로 다른 한계를 극복해내는 해결법일지도 모른다.
미묘한 목소리의 떨림, 팔과 손목과 손가락의 관절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피킹 같이 자잘하고 세세한 부분에 집중하기보다 모든 소리들이 조화된 상태의 ‘분위기’에 초점을 두는 전자 음악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걸까.
아아, 나의 음악 세계 안에 전자 음악이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슬픈 사실 때문에 내가 이 21세기의 최신 장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논의를 이어나가면 정말 끝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이라는 거만한 제목의 글은, 어떤 사람이 쓰게 되든,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문제 제기는 음악과 사회의 관계성이나 상업적인 음악의 정의, 전자 가상 악기와 어쿠스틱 악기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전기(electric) 악기의 차이 같은 별도의 주제로 포스팅될 수 있다. 비겁하고 무식한 나는 우선 여기에서 키보드질을 그만두기로 했다.
우선 너무 졸립고 방금 전의 양치질에서 미량의 치약을 섭취했기 때문인지 머리 속이 화~하고 하~얘지는 기분이 들어서 사고 능력이 저하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말은 다 집어치우자.
건강하게 살기 위해 가질 수 있는 사소한 습관 중 하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이다.
건강한 음악관을 가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도 마찬가지다.
편식하지 말고, 건강해지자.
끝.
교회, 성당, 절 중에 택 1을 하는 체제 하에서 과거의 천주교와 맺었던 인연의 정을 생각한 선택이었다.
논산 훈련소 성당의 신부가 짐승에 가까운 훈련병들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사가 끝나고 나눠주는 과자와 음료수를 인질로 잡는 것뿐이었다.
그는 가끔씩 미사에 참석한 훈련병들의 태도가 좋지 않을 경우, 부식을 안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훈련병들의 마음을 졸이곤 했다.
다수의 불량한 훈련병에게 엄한 채찍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맞게 소수의 불량하지 않은 훈련병에게 당근을 하사하는 역할의 사람도 필요한 법.
역시 그런 이미지에는 수녀가 어울렸던 걸일까, 육군 훈련소 성당의 미사에는 꼭 수녀가 간단하게 교리를 설명하고 퀴즈를 내서 그것을 맞추는 사람에게 초코파이 한 박스를 주는 레크리에이션 성격의 시간이 꼭 포함되어 있었다.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종교 활동이 있는 한 일요일이었다.
차라리 잡일을 하더라도 종교 활동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날 주어진 잡일을 마치고 혼자 생활관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바깥 쪽이 웅성거리더니 성당으로 종교 활동을 하러 갔던 분대원들이 생활관으로 들어왔다.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알고 보니, 언젠가 퀴즈를 맞춰서 초코파이를 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32번 훈련병 이우성의 손에 초코파이 박스가 들려있었다.
부식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상으로 받은 초코파이를 28번 훈련병 오세만부터 40번 훈련병 문학중까지 기꺼이 1개씩 나누어주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날의 문제는 미사에서 파견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답은 바로 그 날 미사에서 수녀가 설명한 대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를 맞췄던 그가 훈련소를 벗어난 이후로 천주교 신자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아니 그보다 천주교 신자로 계속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전도(傳道)는 자기 수양보다 더 효율적으로 어떤 신념의 존재를 굳건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결국 수싸움으로 몰리게 되면 100인분의 믿음을 가진 한 사람보다 적당한 믿음을 가진 100명의 사람이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법이다. 1
전도를 신도의 기본 활동으로 삼은 모든 종교는 이런 면에서 영리한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지난 글에서 내가 힘주어 말했던 것 역시 이 영리한 방법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다.
비록 그 출처는 종교적인 색채를 띄고 있으나 그 누구도 음악의 전도를 종교적인 활동으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비종교인이라고 해서 음악의 전도라는 방법론에 대해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밥 말리나 와이클리프 장을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도 더러 있겠으나 그것이 종교와 관련된 문제를 불러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장교주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에서 나는 불균형적인 대한민국 음악계의 실태와 문제점, 그리고 해결 방안을 서툰 언어를 통해 제시했다.
마지막 글의 마지막을 장식한 내용이 바로 서로 서로 자신의 음악관을 공유하고, 이 글의 맥락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음악 감상법을 채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음악에 대한 양(陽)의 시너지가 발휘되면 자생력 있는 음악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바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일련의 글이 갖는 공통적이며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궁극에 다다르기 전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들이 있다.
그 대부분은 나의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들로, 언젠가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만한 의문들이라고 판단된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로 나는 클래식 음악을 의도해서 듣지 않는다. 2
비발디 사계 중 ‘봄’의 인트로가 어떤 진행인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메인 멜로디가 어떤 식인지 정도는 알고 있지만 결국 그 수준이 음악 과목 필기 시험을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생의 그것과 비슷한 정도다.
비틀즈의 음악이 나왔을 때 당시의 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그들의 음악을 신나게 비난하다가 나중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평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현존하는 대중 음악은 모두 그 뿌리를 클래식에 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도 클래식을 듣는 고상한 남자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아있고, 클래식적인 요소와 크로스오버된 음악도 싫어하지 않는 편이지만 여러 변 겪었던 실패 때문인지 별로 손이 가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이 저렇게 자연스레 포장한다면 알아서 손이 갈 텐데 말이다. 만지는 클래식이라. 포스트 모더니즘적 클래식 음악 발표회 제목으로 아주 이상적이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클래식 음악이 요새의 밴드 음악이나 MR 음악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면 어떨까?
이 의문은 이 글에서 다루는 음악이 크게 밴드 음악과 MR 음악, 두 가지인데 반해 현대 음악에 있어 분명히 또 다른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클래식이 그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비록 내게 미지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음악 감상법을 다루면서 클래식 음악을 빼놓는다는 것은 검은 잉크만으로 무지개를 그리려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다.
클래식 음악을 제 3의 카테고리로 병렬 배치하는 방법으로 분류의 문제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이미 글의 방향을 밴드 음악과 MR 음악으로 한정 지은 것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책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네 번째 글을 쓴 이후에서야 이 시리즈의 제목을 ‘바람직한 대중 음악 감상법’이라고 정하는 게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클래식 음악을 새 카테고리로 추가시키면 각종 음악 장르가 꼬리를 물고 따라와야 한다는 문제점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음악이라는 거대한 단어의 범위를 대중 음악으로 한정짓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3
클래식 음악은 분명히 MR 음악이나 밴드 음악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글에서 나는 MR 음악은 가창력과 춤을 대변하고, 밴드 음악은 악기의 연주라는 측면을 대변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클래식 음악은 음악에 대한 구조적인 지식과 이론을 제공하고 심층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음악이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된다는 것은 현재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이유는 한 시대를 유행하는 음악이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때로는 그 반대 방향의 현상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이 가지고 있는 중요도를 고려하면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중요한 존재가 빠져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고 느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또 짚고 가야 할 음악은 바로 전자 음악, 흔히들 일렉트로니카라고 말하는 장르다.
클래식 음악이 밴드 음악과 MR 음악 두 카테고리의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면 전자 음악은 저 두 음악의 교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와 이제는 락만큼이나 분위기 별로 세분화가 이루어진 전자 음악은 내가 밴드 음악이라고 구분하는 음악의 특성과 MR 음악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잽 앤 로저의 ‘Computer love’와 다프트 펑크의 ‘Something about us’, 자미로콰이의 ‘Twenty zero one’ 같은 음악과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샤이니의 ‘산소 같은 너’, 이효리의 ‘Hey Mr.Big’ 같은 음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스스로 만들어 낸 음악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과 다른 사람의 음악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차이점을 제외하고 음악 그 자체만 들었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상업성이라는 ㅡ 그 단어를 운운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책임하게 내뱉는 그 단어를 ㅡ 단어를 꺼낸다면 저 두 부류의 음악을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나로선 그런 차이를 두기가 사실상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서 이는 구분 본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쩌면 전자 음악의 대두는 밴드 음악과 MR 음악의 절충안으로서, 두 음악이 갖는 서로 다른 한계를 극복해내는 해결법일지도 모른다.
미묘한 목소리의 떨림, 팔과 손목과 손가락의 관절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피킹 같이 자잘하고 세세한 부분에 집중하기보다 모든 소리들이 조화된 상태의 ‘분위기’에 초점을 두는 전자 음악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걸까.
아아, 나의 음악 세계 안에 전자 음악이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슬픈 사실 때문에 내가 이 21세기의 최신 장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논의를 이어나가면 정말 끝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이라는 거만한 제목의 글은, 어떤 사람이 쓰게 되든,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문제 제기는 음악과 사회의 관계성이나 상업적인 음악의 정의, 전자 가상 악기와 어쿠스틱 악기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전기(electric) 악기의 차이 같은 별도의 주제로 포스팅될 수 있다. 비겁하고 무식한 나는 우선 여기에서 키보드질을 그만두기로 했다.
우선 너무 졸립고 방금 전의 양치질에서 미량의 치약을 섭취했기 때문인지 머리 속이 화~하고 하~얘지는 기분이 들어서 사고 능력이 저하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말은 다 집어치우자.
건강하게 살기 위해 가질 수 있는 사소한 습관 중 하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이다.
건강한 음악관을 가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도 마찬가지다.
편식하지 말고, 건강해지자.
끝.
맛있다고 너무 과식, 아니 과음하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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