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 복도가 하나만 나 있는 작은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를 이륙했다.
내 자리는 창가 쪽.
보딩 순서를 몰라서 끝까지 기다리다가 느즈막히 탔더니 복도 쪽 좌석에 배 덩어리만 썰어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아저씨가 타 있었다.
뭘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나 여기 타야 돼, 이 돼지 아저씨야.'하는 눈길을 보내니까 자기가 일어날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라며 길을 터주었다.
시카고에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비행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었다.
어렸을 적 '심시티'를 플레이하면서 대체 미국 도시는 왜 아무리 만들려고 노력해봤자 서울처럼 안 생겨질까 고민했던 것이 십수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말끔히 풀렸다.
'심시티'는 애초에 미국형 도시만을 만들 수밖에 없는 알고리즘으로 짜여진 게임이었다.
정말 바둑판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수직 수평으로 뻗은 도로와 정해진 구역 안에 지어진 집들, 뚜렷하게 구분된 주거 지구와 상업 지구, 공업 지구 등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제 나보고 '심시티'를 하라고 한다면 누구보다 재밌고 즐겁게 플레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볼거리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비행기가 동쪽으로 향하면서 탁 트이는 미시간 호수의 광경은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한 풍경이었다.
세상에 무슨 놈의 호수가 바다를 연상시킬 만큼 거대했다.
입에서 감탄사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직 그 때까지는 이륙 중이라 사진을 찍진 못했지만 분명히 사진으로 찍어봤자 찐따 같이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작은 비행기 창 너머로 펼쳐지는 그 파노라마는 정말 대단했다.
썩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일단 이 정도로 대체. http://www.chicagodossier.us/visit/il,chicago/65,001,air-and-water-show-chicago
비행기는 계속 해서 동부로 날아갔고 나는 또 다른 5대호인 이리 호수도 볼 수 있었다.
엄청난 고도르 나는 비행기가 아니었기에 가는 내내 내 눈 아래 어떤 지형이 있는지 내다볼 수 있었는데 두 번 봤던 호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농장이었다.
저렇게나 많은 농작물들을 소비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봤던 "미국의 모든 돈 중 절반은 먹는 데에, 나머지 절반은 살 빼는 데에 쓰인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약 두 시간 비행 후에 필라델피아 국제 공항(Philadelphia international airport)에 내렸다.
그 때가 현지 시각으로 5월 18일 오후 4시 20분쯤이었고, 내가 한국을 출발한 것이 5월 18일 오전 11시쯤이었으니 약 5시간 정도 걸린 셈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고 가도 2시간이 걸리는 마당에서 이 정도면 정말 빨리 온 편이라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혼자 위로했다.
필라델피아 공항 화장실은 최신 테크놀로지의 경연장이었다. 수도부터 거품 비누는 물론, 심지어 손 닦는 휴지까지 센서가 인식해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결과는 보시다시피 빈번한 오작동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
짐을 찾았다.
혹시나 해서 와이파이를 켜봤더니 놀랍게도 공짜 와이파이를 잡을 수 있었다.
꼭 연락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만 짧게 연락을 마치고 슬슬 일어나기로 했다.
다음 순서는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놨었던 숙소에 찾아 가는 것.
나름 유럽에서 가볍지 않은 캐리어를 들고 낑낑 거리면서 여행했던 경험이 있기에, 대충 방향을 잡고 스트리트만 제대로 찾아가면 금방 도착할 것이라 생각, 벅찬 마음을 먹고 공항을 나섰는데.
사진으로 느낌이 잘 안 살아서 아쉽다.
뭐 아주 바깥이 개판이다.
듣던 대로 흑형들과 흑누나들이 득시글거렸고 ㅡ 이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거대한 그들을 그냥 보기만 해도 움찔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ㅡ 도로는 픽업을 나온 차들로 정신이 없었다.
나름 경찰이 교통 정리를 하고 있었으나 뭐 무단 횡단에 클랙슨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무작정 길을 걸어보자 싶어서 조금 길을 걷다가,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한 번 방향을 잘못 들면 정말 힘든 하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하여 다시 공항으로 유턴.
반대편 출구로 나와보았으나 주변이 조금 조용해진 것을 제외하면 뭐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도무지 내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공항으로 돌아가 무료 전화를 이용해서 예약을 마쳤던 숙소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상태가 워낙에 안 좋았고 공항도 조용한 편은 아니었기에 서로 의사 소통을 하기가 썩 좋진 않았지만 어쨌든 난 예약 손님이고 , 공항으로 셔틀을 보낼 수 있냐고 물었고, 수화기 건너 편의 남자는 내가 기사니까 바로 나갈 테니 어디어디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 보니 만나자고 했던 곳은 위 사진 속의 장소였다.
다시 혼잡한 인파 속에 빠져서 셔틀을 기다렸다.
약 5분쯤 기다리자 멀리서 숙소의 이름이 박힌 낡은 차가 왔다.
이미 전화에서 영어를 버벅거려 나 스스로가 미국인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렸기 때문일까 트럭에 가까운 그 버스도 나를 알아보고 근처에 차를 세웠다.
짐을 잽싸게 올리고 숙소로 출발.
굉장히 특이한 영어를 구사하는 인심 좋게 생긴 흑인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웰컴 투 필라델피아!"라고 반갑게 인사하는 것에 사실 미국 자체가 처음이라고 하자 "웰, 웰컴 투 어메리카!"라고 기분 좋게 이야기하는 아저씨 덕에 드디어 내가 어딘가에 오긴 왔구나 하는 것이 실감 났다.
차가 공항을 벗어날 때까지는 숙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살짝 한적한 곳으로 접어들면서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그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나는 코리아 ㅡ 유럽에서 하도 당했던 "노스 코리아?" 드립 때문에 사우스 코리아임을 강조하면서 ㅡ 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근데 갑자기 생뚱맞게 "안뇸하~세yo!"라는 인사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나는 한국 관광객이 많냐고 물었고 ㅡ 예전에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삐끼로 붙었던 현지인 아주머니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것에 놀라 영문을 물으니 자기 숙소에 묵었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알려준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ㅡ 그는 옛날에 한국에서 2년을 있었다는 대답을 했다.
이런 사람이 옛날에 한국에 있었다면 무조건이다.
순식간에 그와 나는 세월을 초월한 미군 - 카투사의 전우애로 이어졌고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게 놀라운 일이지만 캠프 케이시와 동두천, 의정부, DMZ의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보다 우리 말 구문을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가 자기는 한국이 정말 맘에 들었다고 했던 것이 100% 립 서비스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시카고 공항에서 괜히 미군 군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괜히 반가워졌던 것이 떠오르면서 참 군대 이야기는 만국 공통의 남성들의 떡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공항에서 차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나의 일정을 묻고 어떻게 하면 되겠다고 이야기해주는 그와 사진이라도 한 번 찍고 싶었으나 바로 다음 손님을 공항에 떨궈야 했기 때문에 여건 상 생략.
숙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좋았다.
잽싸게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갔다.
와이파이도 공짜였다.
드디어 휴대폰과 랩탑도 충전할 수 있고 인터넷도 마음껏 쓸 수 있는 환경을 맞이했다.
짐을 간단하게 풀고 샤워를 마친 뒤 그동안 부족했던 나의 온라인 중독증을 마음껏 해소했다.
처음으로 가져 온 카메라를 꺼냈다. 매우 쾌적한 공간.
대충 이 곳 시각으로 저녁 6시쯤이 되었을 때 당장 할 일들은 마쳤다.
쏟아지는 잠에 그냥 이대로 누워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앞으로 두 달은 여기서 머물 건데 시차에 적응하려는 눈꼽만큼의 노력조차 안 하는 것은 너무 무기력하다는 생각에 그럼 밖이라도 좀 걸어다니자고 마음을 먹었다.
프론트에 내려가서 근처에 갈 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다.
바로 근처에 맥주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있고, 기차 역 근처에는 편의점이 있다고 했다.
방향이 반대였기에 둘 다 둘러 보기엔 좀 귀찮을 것 같아 바에서 맥주를 먹을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다 먹을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여행인데 어디 들어가서 분위기라도 즐길 겸 바에 들르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니 바람이 솔솔 부는 것이 아주 상쾌한 오후였다.
바 건물은 숙소 코 앞에 있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좀 더 근처를 걷기로 했다.
야! 기분 좋다!
굉장히 조용한 동네였다.
숙소가 연달아서 4~5채가 있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공항 근처 숙소촌이었다.
천조국의 흔한 자전거 도로와 인도.jpg
한 바퀴 구경을 하고 바로 들어갔다.
테이블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바 자리는 몇 자리 남는 것이 있어서 바로 한 자리를 겟!
메뉴판을 안 주길래 벙찌게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저 메뉴를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먼저 알아서 주지 않는 모양.
한 3분 정도 TV만 보면서 앉아 있으니까 종업원이 뭐 먹을 거냐고 물어봤다.
눈 앞에 보이는 사무엘 아담스를 한 잔 달라고 했다.
내 페이스북에서 퍼옴.
아주 맛깔스러운 맥주가 한 잔 뙇! 나왔다.
사무엘 아담스라면 예전에 미군 대령 집에서 병맥주로 몇 개 마셔본 것이 전부.
먹기 전에 역시나 찐따 같은 자세로 아무도 모르게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플래쉬가 터지고 난리라서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손쉽게 여행객 인증하고 표정 관리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기 만지고 맥주를 한 입 들이켰다.
예전에 먹어봤던 것보다 훨씬 강한 향이 입안에 퍼지는 게 아우 여기가 진짜 미국인 게 실감이 나더라.
영화에서 보면 바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서로 말도 걸고 뭐 하던데 그런 거는 전혀 없었고 그냥 계속 TV만 바라봤다.
나중에 옆 자리에 앉은 흑인 아저씨랑 보스턴 대 필라델피아 농구 경기를 보면서 "댓츠 어글리." - "예, 아이 어그리."와 같은 개드립이나 쳤고 맥주 한 잔을 다 먹고 나서는 값을 치르고 바를 나섰다.
저녁 8시가 넘었는 데도 해가 완전히 안 져 있어서 기분 좋은 하늘 색을 볼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씻고 거의 바로 잠을 청했다.
거의 밤 9시쯤까지 깨어 있었으니 시차 적응을 위한 노력으로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날밤치고는 괜찮았다고 본다.
침대가 두 개나 있는 넓은 방에서 혼자 잠을 자려니 약간 쓸쓸한 느낌도 났지만 센치해질 겨를 없이 바로 골아 떨어졌다.
중간에 한 번 깨고 새벽 5시에 상쾌하게 잠에서 깼다.
시차 적응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증거.
이제 오늘은 무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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