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각이 좀 사나?
1층으로 내려와 숙소에서 제공하는 공짜 아침을 먹었다.
플레인 베이글에 포도 잼을 발라 사과 주스와 같이 먹었고, 호랑이 기운이 난다고 뻥 치는 시리얼도 우유에 말아 먹었다.
다리를 덜덜 떨면서 TV를 보고 있는데, 세상에나 그 전 날 그렇게 발리던 필라델피아가 보스턴을 이겼다니.
NBA 플레이오프 역사에 길이 남을 역전승이었을 것이다.
시간만 잘 맞아준다면 아마 필라델피아 홈 경기때 NBA 경기를 직접 보러 가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했다.
물론 티켓 값으로 적지 않은 출혈이 있겠지만.
다시 방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하고 누워서 빈둥거렸다.
이 숙소를 떠나면 다시 언제 와이파이를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열심히 인터넷을 즐겼다.
아침 11시쯤 되어 ㅡ 체크 아웃은 12시였다 ㅡ 거대한 가방을 끌고 숙소를 나섰다.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었고, 일단 목표는 시내로 나가는 트레인을 타는 것.
퇴역 군인 기사 아저씨가 알려준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역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역인지도 몰랐다 사실.
완전히 시골 간이역의 풍경이었다.
딱히 무슨 안전 장치도 없다.
허름한 의자가 몇 개 설치된 것을 빼면 사실상 구조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없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 바닥에 주저 앉아 햇빛을 피했다.
기차는 거의 정해진 시각에 맞춰 도착했고, 짐을 영차 들어올려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내부의 모습.
한산한 객실 안에서 대충 자리를 잡았다.
조금 기다리니 역무원이 나타났고, 새로 탄 사람들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표를 끊어 주었다.
머리를 길게 길러 포니 테일로 묶은 이탈리아 양아치 같이 생겼던 그 역무원이 내게로 왔다.
나 : How much should I pay?
그 : I don't know where you are going.
나 : Ah, it's... ah... East...
그 : Market East station. 4 dollars.
4달러를 꺼내 주자 무슨 마권처럼 생긴 긴 종이를 꺼내 펀치로 몇 군데 구멍을 뚫고는 내게 그것을 주었다.
기차 안에서 바로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나 하도 흔들거렸기 때문에 나중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한다.
우선 우측 상단에는 승차권의 가격이 표시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아마 승차권의 종류가 ㅡ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WEEKDAY"란에 구멍을 내는 대신 "EVENING"란에 구멍을 냈다 ㅡ 나와 있고, 그 아래로는 출발 지역과 도착 지역 ㅡ 가격은 개별 역과 역 사이의 거리를 고려한다기보다 구간과 구간 사이의 차이로 계산하는 것 같다 ㅡ 이 찍혀 있다.
그 아래로는 승차권이 유효한 날짜에 구멍이 뚫려 있다.
내가 탔던 기차는 정말 무궁화호 열차 노선에서나 볼 수 있는 한적하고 허름한 철로를 따라 쭉 달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지하로 진입했다.
탑승감은 서울의 지하철만큼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함을 느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이 내렸고, 그보다는 조금 많은 사람들이 계속 기차에 올라 탔다.
내가 가고자 했던 시내 중심지의 역인 마켓 이스트(Market East station)까지는 약 20분이 걸렸다.
흥미로웠던 것은 분명히 객실 내에 방송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 역에 대한 방송은 승무원의 육성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는 그럼 대체 무슨 용도인가 궁금했었는데 내가 막 기차에서 내릴 때쯤에 얼핏 광고가 나오는 것을 들었던 것 같다.
뼈 속까지 자본주의인 나라의 한 단편이랄까.
라고 반응하는 것은 내가 너무 오바하는 것이겠지.
짐을 낑낑 들고 위로 올라갔다.
굉장히 조용했던 역 내부.
간단하게 끼니를 챙길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이 있었고, 더 옆쪽으로는 옷가게도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계획도 없었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전혀 감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색감이 좋은 사진.
가장 중심인 거리로 나왔다 싶었다.
애초에 목적지도 없었고 지도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아무 쪽으로나 걸어보기로 했다.
중간에 작은 표지판을 하나 발견했고, 내가 걷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시청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관광에 있어 한 도시의 시청을 방문한다는 것이 무슨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전히 그 근처에 가면 여행에 대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속 걸었다.
거대한 짐 꾸러미가 조금 방해가 되긴 했지만 괜찮은 수준이었다.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는 확성기를 들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쳐대는 한 흑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으로 어그로를 끄는 역설적인 별종들은 만국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중간에 가다가 다시 만난 표지판에서 내가 걷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가면 여행객을 위한 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청은 뭐 다음 기회에 다시 가보기로 하고 방향을 바꿔 느릿느릿 걸었다.
어차피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땀을 뻘뻘 흘려서 도착한 곳은 인디펜던스 비지터 센터(Independence Visitor Center).
입구에서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자세하게 정보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손쉽게 관광을 시작할 수 있는 곳임이 분명했다.
많은 단체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리 저리 몰려 다니고 있었고, 건물 내부에는 18세기 또는 19세기의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자세한 관광은 어차피 나중으로 미루자는 생각에 사진 같은 것을 찍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파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를 찾았다.
첫 번째로 물어봤던 것은 근처에 어디 짐만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냐는 것이었는데 데스크 직원은 일단 여기에는 그런 시설이 없고 한 블럭 건너가서 있는 호텔에 한 번 물어보라는 다소 무책임한 답을 내놨다.
두 번째로 물어봤던 것은 괜찮은 스포츠 바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었고 그녀는 작은 지도를 꺼내 이 거리에 이 부분에 가면 스포츠 중계를 내내 틀어주는 바들이 있다는 대답을 했다.
물론 스포츠 바를 가려는 목적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최대의 축제 중 하나인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보기 위한 것.
땀을 계속 흘려서 그런지 목이 몹시 말라서, 데스크 바로 옆에 있던 작은 카페테리아에서 사과 주스를 하나 사먹었다.
과연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나의 최종 목적지와 시내가 꽤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아무 호텔에 짐만을 맡길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와는 관계 없이 그냥 하루 종일 거대한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당시 시각은 정오를 조금 넘겼을 무렵이었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이 곳 시각으로 약 오후 3시쯤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별로 망설일 것도 없었다.
택시에 돈을 쓰느니 그냥 걷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상당히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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