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주의적인 관점에서야 일요일과 월요일의 일과를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베이니아"라는 주제 하에 묶을 수 있지만, 월요일 아침만 해도 사정이 이렇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아직 마땅한 계획이 없었고, 시내에 나가 관광지를 돌아보기엔 너무 조급한 관광객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또 한 번 집 근처나 둘러보기로 했고, 그렇기 때문에 전 날의 일과와 묶어 하나의 짧은 시리즈를 쓰고 있는 것뿐이다.
계절 학기를 듣는 내 친구가 납입금과 수업 정보와 관련해 학교에 들를 일이 있다고 했다.
조금 귀찮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밖에만 돌아다니지 말고 건물 안에도 좀 들어보자는 말에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
아점으로 라면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지난 번 포스팅과 마찬가지로 사진기 메고 막 찰칵찰칵 찍어대는 것에 별 흥미를 못 느꼈기 때문에 사진의 질이 좋을 리가 없다.
정 유펜 건물들 내부 구조가 궁금하다면 구글 검색을 추천한다.
원체 큰 관심을 두고 다닌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무슨 건물인지 기억하는 것은 힘든 일이니 양해를 바란다.
아마 정경대 건물의 한 강의실.
계절 학기가 시작하는 날이긴 했지만 캠퍼스는 여전히 조용한 편이었다.
전혀 수업이 없는 강의실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문이 열려 있어 그냥 들어가서 둘러봐도 된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굳이 카이스트 강의실과 비교를 해보자면, 아무래도 유펜의 강의실이 더 좋다는 인상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22세기형 강의실을 보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낀 것도 아닌 것이 대충 거기서 거기라는 평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평은 유펜의 자랑, 와튼 스쿨(Wharton School)의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조금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해 보인다고?
전면의 칠판은 우선 여러 겹으로 되어 있는데 교수의 편의를 위해 각 층의 칠판을 한 번 올렸다 내리기만 하면 칠판이 깔끔하게 지워지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칠판 지우는 방법을 저런 식으로까지 편리하게 만든 것은 단순히 교수의 육체적인 노동을 절감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 크겠지만, 왠지 모르게 저 간단한 시스템 하나에서도 대단한 학구열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교실의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칠판이 걸려 있었는데, 친구의 말에 따르자면 이는 고학년 수업의 토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했다.
대학교 수업이라고는 공대식의 일방향적인 수업만을 들어 왔던 ㅡ 그마저도 열심히 들었던 적은 없지 ㅡ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괜히 별 거 안 느꼈는데 너무 있어 보이려고 쓰게 되는 것 같아서 이상한 소리는 그만.
겉으로 보기에는 무슨 호그와트의 건물처럼 보이는 도서관에서도 들어갔다.
기억이 맞다면 인문대 도서관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친구가 추천했던 만큼 내부가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사람도 거의 없었고 공기에서도 치열함, 진지함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그랬을까.
다른 곳 같았으면 그냥 묻혔을 법도 한, 내 휴대폰 카메라에서 시작된 0.3초 가량의 짧은 촬영음이 도서관 내부의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퍼져 나갔다.
경비의 경고에 멋쩍은 웃음으로 대응하고 밖으로 나왔다.
데자뷰가 느껴지는 것은 분명히 해리포터 탓이다.
할 일을 모두 마친 친구와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 왔다.
앞으로 할 일에 대비해 친구는 내게 몇 가지 읽어볼 만한 책을 던져주었고 나는 그 책들을 슬쩍 슬쩍 훑어보다가 미국에서의 첫 낮잠에 빠졌다.
깨어보니 저녁 7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기절한 듯이 잠에 들었다.
꿈에서 잔뜩 영어를 썼기 때문인지 한동안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영어 꿈이라면 살면서 꿔본 적이 손에 꼽는 정도인데, 아무래도 미국에 있는 동안에 몇 번은 더 꾸지 않을까 싶다.
어제 저녁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플레이오프 5차전.
시리즈 스코어 2대2로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황에서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경기라고 할 수 있는 맞대결이었다.
스포츠 바에 나가서 보기엔 사람들이 꽤 많을 것 같고, 건물 라운지에서 보기엔 주변 눈치를 살펴야 해서 그냥 집에서 보기로 했다.
TV가 없는 집안에서 대체 무엇으로 경기를 보나 궁금했는데, 유학생들이 사는 집이라 그런가 재미 있는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예.
집에 온 커튼을 내리고 실내를 어둡게 만든 뒤, 프로젝터를 벽에 쏴서 경기를 관람했다.
소규모 프로젝터를 써본 적은 굉장히 많았지만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써본 적은 또 처음이었다.
파파 존스에서 치킨 스틱과 피자 한 판을 시켜놓고 경기를 보며 먹었다.
4차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이뤄냈던 필라델피아는, 이번 경기에서는 팽팽했던 상황에서 급격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결과적으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밤에는 집으로 손님이 몇 명 찾아 왔다.
맨날 처음으로 소개를 받아 인사하는 것이 뻘쭘해서 그냥 방에 조용히 앉아 컴퓨터나 만지고 있었는데 뭐 그냥 같이 나와서 이야기나 하자는 말에 반갑게 나갔다.
간단히 와인이나 마시면서 이야기나 하려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는 같은 층의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더 많은 술과 함께 로디드 퀘스천(loaded question)이라는 보드게임을 했다.
술을 먹기는 했지만 상큼하고 건전한 환경에서 먹어서 그런지 컨디션에 별 무리는 없었다.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잘 일어났다.
필라델피아에서 맞는 네 번째 아침.
사족을 붙이자면, 대학가 나들이는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있을 계획이다.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베이니아" 시리즈는 추후에 더 이어질 예정이니 '으아니! 왜 사진이 이것밖에 없는 고야!'하고 분노하지 말고 조금만 너그럽게 기다려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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