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오랜 신념 중의 하나인 반종교론을 이보다 더 잘 대변하는 책이 있을까 싶다. 하도 책 머리에서부터 소개를 해놨기에 내 머리에서 오래 남아 있게 될 사실인, "100인의 지식인 가운데 5위에 오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훌륭한 책이다. 책의 제목은 "신은 위대하지 않다"지만, 사실 이 책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럴 것이다. "신은 존나 위대하지 않다". 글쓴이의 입을 빌려 이 책의 주제를 조금 더 정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리고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종교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러분과 나를 파멸시킬 계획, 인류가 힘들게 얻은 모든 성과를 파괴할 계획을 짜고 있을 것이다. 종교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그렇다. 이 책은 점잖은 수준에서 종교의 좋지 못한 점을 집어내는 수준의 책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를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개념으로 잡고 시작부터 끝까지 그 개념의 부덕함을 역설하며 궁극적으로는 그 존재의 정당성 자체를 박탈시켜버린다. 다르게 말하면 이 책은 종교인을 무교론자로 끌어들인다거나, 종교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던 사람을 반종교인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의도를 두었다기보다 철저히 무신론자의, 무신론자를 위한, 무신론자에 의한 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책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섣불리 종교를 가진 지인들에게 권하지는 말자. 이건 내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생각해오던 건데, 이런 이성적인 호소를 보고 자신의 마음을 바꿨을 사람이라면 애초에 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의해 망가진 인간 본성의 좋은 예.
다소 비관적이었던 중간 결론은 대충 넘어가고 본격적으로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 그렇게 분량이 많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는 고대의 언젠가부터 시작되어 현대 21세기까지 쌓아왔던 무신론, 또는 반종교론의 정수들이 대부분 담겨 있다. 간단한 에피소드로 서두를 뗀 히친스는 우선 종교의 무오성에 대해 공격하며, 그들의 텍스트가 가진 내적 모순과 외적 아이러니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나 같은 골수 무신론자에게야 익숙한 주장들이지만, 아직 신념이 약한 무신론자들에게 히친스의 일갈이 얼마나 큰 토양으로서 작용할지는 아래의 몇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느낄 수 있다. 왜 세상에는 이런 뻔하디 뻔한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것일까?
종교는 보편적인 도덕과 윤리가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한 가지 분야에서 유난히 범죄를 저지르는 성향이 있음을 증명했으므로, 내 생각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다. 첫째, 종교와 교회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 사실이 너무나 뻔히 드러나 있어서 무시할 수가 없다. 둘째, 윤리와 도덕은 신앙과 그다지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신앙에서 유래할 수 없다. 셋째, 종교는 자신의 행위와 믿음 덕분에 신에게서 특별한 면죄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무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신이 전지전능한 것은 고사하고 과연 상식이나마 갖춘 존재인지 다시 한 번 궁금해진다. 게다가 이야기 속에서 대지는 항상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다. 성경의 무대가 숨이 막힐 정도로 한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 지방 사람들도 그들이 섬기는 신도 사막과 자기들이 기르는 가축 무리, 그리고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들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이 동네 시골뜨기들의 경우에는 이런 무지를 용서해줄 수 있지만, 그들을 이끄는 최고의 안내자이자 노기등등한 폭군인 신은 어떤가? 혹시 신이 시골뜨기들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렇게 구약의 신을 조롱하던 히친스는 신약의 히어로 예수로 그 조롱 대상을 바꿔나가며 카톨릭 전반에 대해 강한 회의를 표출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사회암적인 존재로서의 종교, 그리고 보통 무신론 논쟁에서 왠지 모르게 까방권을 획득해온 불교에 대한 깨알 같은 반론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이 산재해 있어 그 정수를 콕 찝어내기는 어렵지만, 내가 충분히 공감을 느꼈던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히친스의 박학함을 맛보기 판으로나마 느껴보길 바란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그래도 종교가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공공선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강한 반박이다. 인간이란 종교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물 타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종교는 그 존재만으로 암이다. 그것도 인류 전체의 진보를 방해하는 암 덩어리.
세속적인 생각이나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부당한 체제 전체를 비판하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높지만,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신앙 때문에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반대하게 될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꽤 낮은 편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종교적 신앙 때문에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주의를 떠받치게 될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짖극히 높다. 그러니 간단한 정의가 승리를 거두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자유로운 개인과 정신을 경멸하고 복종과 체념을 가르치며 삶을 한심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종교는 자기비판을 할 능력이 없다. '성경'을 믿는 전통적인 종교에 싫증이 나서 자신의 비판능력을 분해해 모든 종류의 열반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깨임'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은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들은 경멸스러운 물질주의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들이 찾은 새로운 종교 역시 그들에게 이성을 잠재우고 정신을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후반부로 접어들면 종교 논쟁에 있어 빠질 수 없는 떡밥이자 종교의 절친한 친구인 정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과연 그 정치 이야기란 건강한 것일까?
원래도 흙탕물인 정치 이야기에 종교 이야기가 가미되면 그 이야기의 질이란 불 보듯 뻔하게 낮아질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히친스가 소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 이야기 ㅡ 대부분이 다소 먼 과거에 해당하는 이야기 ㅡ 그리고 현대의 국가 분쟁에서 수단으로서, 가끔은 목적으로서 이용되는 종교 이야기 ㅡ 이는 촘스키의 책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ㅡ 를 찬찬히 읽어보면 인류의 앞날이 도무지 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성도착자 주제에 위선적인 금욕생활을 해야 하는 성직자들의 손에 연약한 아이들을 맡겨 놓고 사람들은 과연 어떤 결과를 예상했던 걸까? 그러면서 아이들이 사탄의 '자식' 또는 '수족'이라고 가르치다니. 사람들은 이런 현실 때문에 쌓인 좌절감과 분노를 풀기 위해 때로 끔찍한 신체적 처벌을 가했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금기가 무너지면, 자위행위와 간통을 저지르는 평범한 죄인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행위들이 자행되는 법이다. 이는 목자들 중에 범죄자가 몇 명 섞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적인 본능은 물론 심지어 성적인 기관까지 통제함으로써 성직자들의 통제권을 확립하려 했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책은 이쯤에서 마무리 단계로 들어간다. 역시 당연한 소리지만, 과거와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신들리게 꼬집어 놓고 글을 끝내는 것은 위대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행동이다. 한 때 세계 5위의 순위에 오른 지식인 히친스 역시 이 점을 간과하진 않았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곳은 지금보다 나은 곳이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염세주의와 비관주의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그 위대하지 않은 신보다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거국적인 계몽으로 이성과 합리의 세계에서 종교라는 비이성, 불합리를 쫓아내자는 훈훈한 내용으로 끝이 난다. 물론 여기에 낙관주의를 끌어들일 여유 또한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내용이 책 최말단으로 들어간다. 진부하지만 훌륭한 결론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종교가 가진 내재적인 텍스트의 문제, 진화론과의 논쟁에서 자꾸 주장하는 억지 등을 넘어 그것이 사회 전반에 끼친 악영향,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악용 등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의 분량이 허용하는 한에서 최대한 다양한 관점을 다룬 책이다. 그 논조는 극단적으로 공격적이고, 그 논리는 이성의 끝단에 있으며, 그 논지는 뚜렷하기 이를 데 없다. 끝.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계몽주의 운동이다. 인류의 견본은 바로 인간 그 자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 운동 말이다. 예전의 계몽주의자들처럼 대단히 용감하고 재능 있는 소수의 영웅적이고 획기적인 성과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계몽주의 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 범위 안에 있다. 문학과 시를 그 자체로서 연구하는 작업과 그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영원한 윤리적 문제들을 연구하는 작업이 이제는 오류가 많고 조작된 것으로 알려진 경전들의 엄격한 감시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다. 아무런 제한 없이 과학적 탐구를 하고, 손쉬운 전자기기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연구와 개발의 개념 자체가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성생활과 두려움, 성생활과 질병, 성생활과 폭정 사이의 연관성을 끊어버리려는 시도가 이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담론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말이다. 이 모든 일과 그 밖의 많은 것들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손이 닿는 거리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사족인데,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심하게 웃을 수 있었던 구절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 책을 한 권쯤은 더 사다가 봐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뒤에 남겨진》 시리즈는 겉으로 보기에는 팀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오랑우탄 두 마리를 워드프로세서 앞에 풀어놓는 낡은 편의주의적 방법으로 만들어진 책임이 분명하다.
- 참고로 항상 출처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은 이 리스트는 2005년도에 포린 폴리시(미)와 프로스펙트(영)가 손을 잡고 뽑아낸 리스트로, 당시의 1위는 노암 촘스키, 2위는 움베르토 에코, 3위는 리처드 도킨스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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