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했을 당시, 그러니까 1998년에라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영화였겠지만 2014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그다지 질이 좋은 영화는 아니다. 1
그러니까 윌 형의 튼튼한 허벅지나 감상하자.
1998년이라 하면 내가 모뎀으로 유니텔과 하이텔을 즐기던 시절이다. 미지의 장소에 존재하는 미지의 인간(들)과 미지의 수단이 동원된 소통을 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던 시절이다.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전자 정보는 물리적인 장치에 담아 보관하고 교환하며 이동되는 존재였고 전화선 단자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장난 전화나 '달려라 코바'류의 전화 오락 서비스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던 시절이다. 1998년 당시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가 던지는 시사점이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부가 나를 감시한다. 우리가 생각해오던 단순한 감청, 감시, 미행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관찰하고 보고하고 기록할 수 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뭐 이 정도의 이야기, 딱 이 정도의 시대적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논의는 전무하다. 그 이상의 논의는 커녕 영화의 나머지는 정말 유치뽕짝으로 가득차 있다는 유치뽕짝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메인 스토리를 끌어가기 위해 디테일이 너무도 많이 희생되어 메인 스토리마저 지탱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도대체가 사실성이나 현실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권선징악류의 졸렬한 프레이밍에 사로잡혀 있다. 그 허무한 엔딩 앞에서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그 전부터 이미 힘을 너무 많이 써버린 나머지 더 주먹에 줄 힘도 없어졌을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안 그래도 정리가 안 되는 판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적인 요소가 총출동해서 전 영화를 개싸움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다. 개그, 우정, 음모, 첩보, 위트, 반전, 사랑, 허세, 액션, 쌈빡함, 추격, 스릴 등이 어지럽게 섞인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찬찬히 떠올려보면 온갖 허섭쓰레기가 모인 거대한 멜팅 팟 같은 것이 떠오른다. 오버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이다. 이 영화는 정말 쓰레기의 멜팅 팟이다.
물론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대중적이지 않은 이슈를 끌고오니 가십성, 음모론성의 캐주얼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그럴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정말로 레이저 총을 뿅뿅 쏘고 웜홀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미래가 왔을 때 그들이 바라보는 70년대, 80년대 SF 영화들이 어떤 느낌일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상대성이 절대적인 견지에서의 가치를 지지해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 영화를 만든 감독과 연출 ㅡ 등은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ㅡ 의 필모그래피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진지한 소재를 가지고 이보다 더 조악한 플롯을 짜내는 건 있어서 안 될 일이다. NSA의 활동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검찰의 증거가 조작되고 민간인 사찰이 자행되고 있는 이런 시대에서라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더 이상 영화 속 윌 스미스와 진 해크먼처럼 히히덕거리면서 인생을 즐길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 정관사 the는 어디에다 빼먹은 건지 알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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