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oblems Of Philosophy : Chapter 1 ~ Chapter 5

| 2011. 9. 3. 21:43

<외양과 실재(Appearance and reality)>

논의의 시작은 책상에서부터 출발한다.
러셀은 먼저 현상을 그저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자와는 다르게 철학하는 사람들은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욕구가 강하다고 독자에게 은근슬쩍 기를 불어넣어주고는, 우리가 단순히 눈으로 '보는 책상'과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궁극적인 '실재하는 책상' 간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책상으로 대변되는 모든 물체의 '외양(appearance)'은 관찰자의 관점에 종속된다.
빛의 유무, 각도, 거리 등이 달라질 때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외양 또한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는 단지 시각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지하는 수단으로 쓰는 오각(五覺)에 대해 모두 적용되는 이야기다.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감각 중 어떤 감각이 물체의 '궁극적 실재(reality)'를 나타내는 걸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어떤 물리적 객체의 실재을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기껏해야 그 실재가 나타내는 '징표들(signs)' 뿐이며 그 신호들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을 수용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책상은 '실재하는 책상'이 아니다.
과연 '실재하는 책상'이라는 개념은 존재하기는 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그 개념의 본질은 어떤 것일까?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러셀은 뛰어난 논리학자답게 몇몇 단어를 정의한다.[각주:1]
우리가 사물을 접하고 바로 알 수 있는 정보, 예를 들어 색깔, 소리, 냄새 같은 것은 '느낌소(ㅡ素, sense-datum)'라 하고 그 느낌소의 존재를 경험하는 현상은 '느낌(sensation)'이라고 하자. 앞에서 '실재하는 책상'이라고 불렀던 것은 '물질체(physical object)'라 하고 그들의 집합은 '물질(matter)'이라 하자.
우리가 앞에서 관찰한 내용 ㅡ '우리가 보고 만지는 책상은 실재하는 책상이 아니다.'는 것을 새 용어로 표현하면 느낌소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제기한 두 질문은 '물질이란 과연 존재하는가?'와 '만약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가?'로 치환된다.
'비현실주의자(idealist)'에 속하는 버클리와 라이프니츠는 첫 질문에 대해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물질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물질이란 존재한다는, 즉 느낌의 원인이 되는 느낌소를 유발하는 어떤 존재는 분명히 있다는 주장을 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버클리는 물질이란 존재의 의미가 신에 의해 부여된다고 보았고 라이프니츠는 사고의 집합에 의해 부여된다는 답을 내렸다.
러셀은 다음 장에서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더 심도 있게 다룬다.

<물질의 존재(The existence of matter)>

데카르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러셀은 여기서 한 차례 더 나아가 의심을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과연 정말 존재하는 것이 확실할까?
'나'라는 물질은 없고 생각하는 느낌을 들게하는 느낌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러셀은 이처럼 모든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고 느낌소만 존재하는 상황을 가정해본다.
사실 그런 어색한 상황을 가정하는 것엔 아무런 논리적 결함이 없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그 가정이 사실이라는 증거 또한 없다.
우리는 두 가지 가설 ㅡ 물질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ㅡ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좀 더 단순하고 좀 더 '본능적으로(instinctively)' 다가오는 전자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러셀은 문질의 존재 여부를 이런 방식으로, 즉 정확한 논리의 전개에 의한 방법이라기보다 더 합리적인 것을 고르는 식으로 결정 짓는다.
물질은 존재한다.
그러면 그 본질은 어떠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가슴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실재하지 않는 가슴을 내세우다니.


<물질의 본질(The nature of matter)>

우선 확실한 것은 물질의 본질이 존재하는 '물질 공간(physical space)'과 우리가 물질로부터 기인한 느낌소를 느끼는 '개인 공간(private space)'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러셀은 이 두 분리된 공간이 서로 대응되는 '공간 관계(spatial relationship)'를 가짐으로써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직선의 본질은 알 수 없으나 일식 때 지구와 달과 태양이 한 직선 위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물질 공간과 개인 공간의 공간 관계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예가 말해주는 또 다른 것은, 우리는 개인 공간에서 느낀 바를 통해 물질 공간의 세계를 유추할 수 있으나 물질의 본질을 깨닫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물질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개인 공간과 물질 공간이 서로 굉장히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은 물질이 느낌소를 유발할 때, 그리고 그 느낌소가 감각기관을 통해 느껴질 때 왜곡이 불가피하게 끼어든다는 사실 때문에 설득력을 잃는다.
어쩌면 물질이라는 것은, 또는 느낌소를 유발하는 어떤 존재라는 것은 분명히 있지만 그 존재는 단순히 우리의 '정신(mind)' 속, 즉 개인 공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비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현실주의(Idealism)>

버클리는 대표적인 비현실주의자다.
그는 우리의 '사고(idea)' ㅡ 버클리의 사고는 느낌소와 기억, 상상 같이 우리가 즉시 받아들이고 떠올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ㅡ 만이 물질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물질은 결과적으로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보는 책상은 눈을 감는 동안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쓰다듬고 있는 고양이는 손을 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모든 감각을 폐(閉)하더라도 물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사고를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러셀은 버클리의 사고가 모호한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버클리는 사고하는 과정과 사고되는 대상을 둘 다 사고라고 치부했기 때문에 비현실주의적 오류에 빠져든 것이다.
사고하는 과정은 분명히 정신적인 영역에 포함되지만 사고되는 대상은 정신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신의 지력(知力)을 제한하는 것이거나 무의미한 유의어 반복에 해당된다.
버클리의 비현실주의 옹호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비현실주의에는 또 다른 형태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존재는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저 명제에 쓰인 두 '알다(know)'는 그 뜻에 차이가 있다.
앞에 나온 '알다'는 '사물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ings)'의 의미로, '직접적으로 아는 것(acquaintance)'의 뜻을 가진다.
반면 뒤에 나온 '알다'는 오류와 반대되는, 즉 '참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ruths)'을 가리키며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념,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두 '알다'의 뜻을 명확히 밝히면 주어진 명제는 '우리는 직접 알지 못하는 것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가 된다.
러셀은, 자신은 중국 황제를 모르지만 그가 존재하는 것을 안다는 단순한 예로 명제의 그름을 증명한다.

당신은 중국의 스티브 잡스를 알고 있는가?


만일 내가 무엇에 대해 직접적으로 안다면,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지식도 당연히 얻게 된다.
하지만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 내가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안다'는 역(逆)은 항상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간접적 설명(description)'이라는 개념이다.
러셀은 이어지는 장에서 '직접적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과 '간접적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의 개념을 심도있게 다룬다.

<직접적 지식과 간접적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

먼저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란 앎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어떠한 중간 과정을 거치는 것 없이 직접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책상의 외양을 구성하는 각종 느낌소는 있는 그대로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아는 것'의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반면, 물질체로서의 책상을 안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지식이 아니다.
'물질체로서의 책상은 이런저런 느낌소를 유발한다.'는 문장은 책상이라는 물질체를 느낌소의 개념을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한다(describe)'.
이처럼 간접적인 설명을 알고, 그 설명의 대상이 단 하나라는 것을 알 때 ㅡ 비록 그 대상 자체를 직접적으로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ㅡ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한 '간접적 지식'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느낌소는 가장 명백한 직접적 지식의 예다.
하지만 느낌소만이 직접적 지식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대해선 아무 것도, 심지어 과거의 존재 자체도 몰라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memory)'은 직접적 지식의 다른 예로 우리의 과거에 대한 모든 직접적 지식을 관할한다.
또 다른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존감(introspection)'이 있다.
자존감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지하고 떠올리는 그 행위를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가 고픈 것'을 느끼는 것이 자존감이다.
다른 말로는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과연 우리가 자존감의 주체인 '자아(self)'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재하는 대상이 아닌 것, 우정, 다양성 같은 '추상자(universal)'에 대한 직접적 지식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와 관련된 논의는 나중으로 넘긴다.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물체에 대한 지식은 간접적 지식이다.
간접적 지식을 구성하는 간접적 설명은 부정(不定)이 아닌 정(定)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간접적 설명은 많은 평범한 단어들과 고유 명사로 분류되는 인명, 지명 등을 포함한다.
간접적 설명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선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직접적인 지식이 있는 대상들로만 이루어진 문장이라야 정오 판단이 가능하긴 하지만, 어쨌든 간접적 지식을 통해 우리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간접적 지식이라는 개념이 있어야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이 불가사의와 의심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1. 이 문장 전후로 이 글에서 내가 사용하는 철학적인 단어는 순수하게 나 혼자서 생각해서 번역한 것으로, 일반적인 철학계의 관습과 다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순수한 감상문으로 남겨두기 위한 조치다. 내가 멋대로 번역했다고 생각되는 단어는, 일상적인 단어이든 내가 억지로 만든 느낌이 풀풀 풍기든, 맨 처음 등장에 작은 따옴표로 구분해두었다. 그 뒤로 등장하는 같은 단어는 내리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고, 필요한 경우 한자와 영어를 적어두었다. 당연히 러셀은 한자를 모르므로 한자는 내가 만든 단어가 어떤 뜻인지 쉽게 유추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내가 삽입한 것이고, 내가 번역한 대상이 된 영단어는 러셀의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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