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활

| 2011. 9. 10. 23:40

정말 오랜만에 찾은 영화관에서 슬금슬금 올라가는 '최종병기 활'의 크레딧을 보면서 나는 추억에 잠겼다.
추억의 시기는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했을 때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2005년.
당시에 나는 중독성 짙은 OST를 동반한 일본 만화에 빠져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TV판 애니메이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사무라이 디퍼 쿄우'였다.
총 26편으로 구성된 그 애니메이션을, 학원에서 가끔 만화책으로 봤을 때 다가온 느낌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큰 마음 먹고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 주파했다.
'최종병기 활'은 '사무라이 디퍼 쿄우'의 TV판과 이모저모 닮았다.

최종병기 활
감독 김한민 (2011 / 한국)
출연 박해일,류승룡,김무열,문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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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병기 활'을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일관성이 결여되어있다.'는 문장이 꽤 적절할 것이다.
'사무라이 디퍼 쿄우' TV판의 쿄우는 무명신풍류 살인검, 주작이라는 필살기를 가지고 있다.
전 편에 걸쳐 딱 한 번 다른 필살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ㅡ 그 필살기는 물론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ㅡ 쿄우에겐 분명히 다른 필살기도 있었겠으나 어쨌든 주로 쓰는 필살기는 주작임이 분명하다.
'사무라이 디퍼 쿄우'에서 관객을 꽤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는 쿄우의 필살기가 단 하나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과 필살기를 필살기답게 사용하지 않고 너무 잦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통키의 불꽃슛을 매 화 보면서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내가 어렸기 때문이다.
머리통이 커진 나에게 그런 식의 중복과 반복은 더 이상 흥미롭지 못하다.

'최종병기 활'도 비슷하다.
'태산처럼 받쳐주고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서 쏴라!'라는 뭔가 영화의 주제가 담겨있으면서 곡사의 핵심이 되는 문장은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면서 결국 별 의미 없는 문장으로 격하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처럼 곡사를 묘사해놓고, 곡사를 실제로 사용하는 장면에서는 그에 대해 강조하지 않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실제로 곡사를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초반의 필살기 연마와 후반의 필살기 구사가 별개의 것으로 생각될 정도다.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영화의 효율성과 집약도 면에서 이를 바라보면 꽤 중요한 부분임에도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티가 난다.

신경을 좀 써달란 말이야.


영화의 주 스토리에 역사를 끌어오는 것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높이는 목적으로 최근에 활발하게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잘못 사용될 경우 관객의 흥미를 한순간에 떨어뜨리는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다.
실재하는 역사를 잘못 사용한 점에서도 '사무라이 디퍼 쿄우'와 '최종병기 활'은 닮았다.
그래도 '사무라이 디퍼 쿄우'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시작부터가 판타지물이었으니 ㅡ 마지막 도쿄 타워에서의 대결은 그 어린 나이에 느끼기에도 으잌하는 수준이었다 ㅡ 오다 노부나가가 지하의 마왕이라느니하는 설정은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최종병기 활'에서 일개 사냥꾼에 불과한 사람들에 의해 청의 왕자가 죽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역사 왜곡이다.
역사 왜곡에 그렇게 민감한 민족이 어찌 다른 나라의 역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왜곡할 수 있는가.

정권 비판의 메시지를 담은 부분이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것도 위와는 다른 의미에서 역사를 잘못 끌어온 한 예가 될 수 있다.
압록강을 다시 넘어가면 문책을 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나오면서 관객들에게 강조시켜놓고, 대체 마지막에 뜨는 그 자막의 패러독스는 무엇인가.
두 설정의 패러독스를 떠나, 마지막 두 줄의 자막은 순식간에 영화를 용두사미로 만든다.
아니, 용과 뱀은 그나마 비슷한 동물이기라도 하지 이건 뭐 거의 사자의 머리로 시작해서 독수리의 날개로 끝나는 스핑크스다.
차라리 설정을 위한 최소한의 역사성만을 사용하고 나머지 조잡한 설정은 다 빼버리는 게 어땠을까.
훨씬 더 탄탄한 시나리오가 되었을텐데.

'최종병기 활'에서 빠질 수 없는 비판거리는 호랑이의 등장일 것이다.
호랑이가 나와서 청의 병사들을 물어 뜯는다는 상황 자체도 비현실적인데 CG까지 비현실적이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뭔가 호랑이를 강조하겠다는 것 정도는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굶주린 호랑이가 사냥할 대상은 상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는 사람인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조선의 호랑이가 조선인을 지켜준다는 컨셉이라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압록강을 아직 건너지 않았을 때 마주친 호랑이 굴은 조선의 땅이 아니므로 그런 컨셉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고 그렇다면 호랑이 장면은 정말 'What were they thinking!'이다.

http://media.photobucket.com/image/what%20were%20they%20thinking%20james%20rolfe/CommanderD/1239883733_Angry_Video_Game_Nerd-1.gif


주인공 박해일이 미친듯이 화살을 피해간다는 것은 주인공 위주의 액션 영화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관대하게도 '최종병기 활'의 제작진은 박해일에게 한 대의 화살을 허용하는데 그 화살은 오른팔인지 왼팔인지 이두를 관통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우리의 주인공 박해일은 그 상처 때문에 추격당할 위협을 받지만 이를 꽉 깨물고 화살을 뽑고 상처를 싸맨 뒤 다시 도망에 나선다.
그 이후로 나오는 모든 활을 쏘는 장면에서 상처의 아픔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차라리 마지막에 화살이 빗나가는 장면에서 그 상처를 관객들에게 상기시켜 빗나감을 정당화했다면 어땠을까.
추격과 도망의 속도가 물리적인 법칙을 벗어난다는 점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여러모로 비현실적이다.
영화가 비현실적이라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현실적이어야 할 부분에서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 모든 단점을 커버하며 이 영화를 '중간은 하는' 영화로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빛나는 배우들의 열연.
박해일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대사로 엄청난 감정 표현을 해낸[각주:1] 유승룡의 연기는 명불허전.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 제작진이 벙어리를 등장시킨 것은 다소 계산적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은 나만 하고 나만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청의 정병들로 나온 모든 배우가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고, 김무열이라는 배우의 행적에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문채원은 그저 빛났다.

김희선과 김태희가 얼핏 보이는 것 같다. 포카리 스웨트 마시고 싶다.


비헐리우드 영화가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작품성'이다.
작품성에 가장 손쉽게 영향을 미치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시나리오다.
한국 영화가 여전히 '한국 영화'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바로 이 시나리오 때문이라고 보는데, '최종병기 활'은 그런 면에서 그냥 '한국 영화'다.
  1. 비슷한 맥락에서 '로스트'의 꽈찌쭈의 연기 역시 정말 최고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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