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oblems Of Philosophy : Chapter 6 ~ Chapter 10

| 2011. 9. 18. 13:11

<귀납에 관하여(On induction)>

앞의 장들에서 다룬 내용은 존재에 대한 지식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느낌소와 우리 자신에 대해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ㅡ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현재까지의 결론에 따르면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귀납(induction)'에 의해 다른 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면, 즉 A의 존재를 통해 B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ㅡ 예를 들어 천둥이 번개의 존재에 대한 징표인 것처럼 ㅡ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범위는 획기적으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문제는 귀납이라는 과정이 과연 가능한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이 우리의 논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것이 된다.

태양은 내일도 떠오를까?
아마 떠오를 것이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는 이 믿음의 근원은 반복되는 현상에 대한 기대감이다.
동물에게서도 이런 기대감은 나타난다.
모이를 먹는 닭은 주인이 다가오면 모이를 주리라는 기대감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 주인은 닭의 목을 비튼다.
이 경우, 닭이 가지고 있던 기대를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일도 해가 뜨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닭의 모이에 대한 기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과학적 법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개별적인 기대로부터 예외가 있는 법칙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나 풍선이라는 예외가 있는, '지지되지 않은 공중의 물체는 땅으로 떨어진다'와 같은 것.
과학은 이런 개별 법칙을, 그들을 종합할 수 있는 예외가 없는 법칙으로 ㅡ 중력의 법칙이나 운동의 법칙 같은 ㅡ 대체한다.
이런 법칙은 비행기와 풍선이 지지되지 않더라도 공중에 떠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지구가 혹성과 충돌하여 그 다음 날에 지구에서 태양이 떠오르지 않게 되더라도 성립한다.
그러나 그런 법칙이 과거에 성립했다고 해서 미래에도 성립하리라는 근거는 여전히 없다.

과거와 미래는 이렇게나 큰 괴리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귀납의 법칙(principle of induction)' ㅡ A와 B가 연관된 경우가 더 많을 수록 실제로 A와 B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며, A와 B가 연관된 경우가 충분한 숫자에 이르면 A와 B가 연관되었다는 법칙은 무한히 사실에 근접한다 ㅡ 역시 마찬가지다.
귀납적으로 유도된 모든 법칙은 우리의 경험에 의해 참으로 증명될 수도, 거짓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선천적(intrinsic) 근거에 따라 이 귀납적 법칙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포기하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문제는 이런 논의의 대상이 귀납적 원칙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법칙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On our knowledge of general principles)>

앞에서 귀납적인 법칙에 대해 제기되었던 문제는 다른 모든 법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은 스스로를 옳다고 증명하지 못한다.
철학사적으로 이에 대해 로크와 버클리, 흄 같은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empiricist)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이성주의 철학자(rationalist) 사이의 거대한 대립이 있어왔다.
러셀은 여태까지 논의한 사항을 정리하면, 이 대립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원칙이란 것을 알고 있고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경험만 가지고는 증명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성주의 철학자들의 입장이 옳다는 판단을 내린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으나 경험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선험적(a priori)'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하지만 러셀은,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과 원칙(a priori principle)도 제한이 되기 마련이며, 그런 관점에선 경험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줄 수 있다고도 한다.

선험적 지식의 또 다른 예로 윤리적 판단이 있다.
행복이 불행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험적 지식이면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경험에 의해 증명되지는 않는다.
모든 순수 수학에 관한 지식 또한 선험적이다.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여러가지 종류의 '2' ㅡ 두 동전, 두 책, 두 사람 ㅡ 가 두 개 더해져 '4'가 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가 '2+2=4'를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셀은 자신의 동료 화이트헤드를 인용하며, 우리는 '2'라는 추상적 존재를 떠올려 '2+2=4'라는 일반적 결론을 이끌어 낸다고, 하나의 일반적인 예가 다른 모든 예를 불필요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대수뿐만 아니라 기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음 문제는, 선험적 지식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러셀은 칸트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이 질문이 대단히 어려우면서 동시에 대단한 질문이라고 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선험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How a priori knowledge is possible)>

칸트 이전에, 선험적 지식은 모두 '분석적(analytic)'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분석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주어부를 분석하면 술어부가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모든 대머리 남자는 남자다' 따위의 것으로, 이 외의 선험적 지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흄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 시대의 이성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던 '충분한 지식만 있다면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논리적으로 추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대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성주의적 전통에 영향을 받은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에 반발하며 다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칸트는 대수와 기하의 명제들이 분석적이지 않다고, 즉 주어부의 분석이 술어부에 그 어떤 사실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했다.
'7+5=12'를 보면 12라는 개념은 7에도 없고 5에도 없으며 +에도 없다.
결국 모든 순수 수학은 선험적인 동시에 '종합적인(synthetic)'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결론에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의문이 뒤따르게 된다.
우리가 경험이 없는 개별 대상들에 대한 진실을 미리 안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성립하는 명제가 아닌데 우리는 실제로 그런 진실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100년 전에 런던에 누가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중 2명과 다른 2명을 더하면 4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놓았다.
러셀은 칸트의 결론이 썩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꽤 흥미롭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결론이 굉장히 어렵고,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다르게 이해되기 때문에 대강의 윤곽만 언급하기로 한다.
칸트가 제시한 의견은 우리가 앞에서 물질과 느낌소에 차이를 두었던 것과 같은 시각을 배경으로 한다.
구분되는 점은, 우리가 그런 느낌소를 시간과 공간, 비교와 인과와 같은 관계를 통해 해석한다는 점이다.
칸트가 주장하는 이런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그런 해석 방식 ㅡ 시간과 공간, 비교와 인과와 같은 ㅡ 에 대한 지식은 선험적이나 실제 물질에 대한 지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대상들은 우리가 가진 선험적 지식이 인지할 수 있는 특성들을 획득함으로써만 우리의 경험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우리는 선험적 지식으로 물질 그 자체는 알 수 없으나 물질이 나타내는 '현상(phenomenon)'을 포착할 수 있다.
이는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의 조화를 꾀한 결론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자체적으로 선험적 지식의 범위를 제한하고, 그 확실성에 의문을 품게 한다는 약점이 있다.[각주:1]

아… 어렵다.


우리가 가진 모든 선험적 지식은 정신적 영역에도 물질적 영역에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방에 있다.(I am in my room.)'는 문장에서 '안에(in)'와 같은 개념인데, 러셀은 다음 장에서 정신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은 이와 같은 '관계(relation)'에 대해서 더 자세히 다룬다.
그 관계의 세계가 선험적 지식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그리고 더 큰 범주인 철학의 문제에 있어 굉장한 중요도를 띄기 때문이다.

<보편자[각주:2]들의 세계(The world of universals)>

정신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문제는 플라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플라톤은 '이데아 이론(theory of ideas)'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러셀은 전반적으로 그의 방법이 가장 성공적인 시도 중에 하나라는 평가를 내린다.
플라톤은 그것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개념들 ㅡ 정의(justice), 백(白, whiteness) ㅡ 을 이데아라 부르고 이데아만의 세계,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세계를 가정한다.
러셀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영어의 사고, 생각 등을 가리키는 아이디어(idea)의 스펠링이 같아서 생길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플라톤의 이데아 대신 '보편자(universal)'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고유 명사는 개별자(particular)를, 기타 명사와 형용사, 전치사, 동사는 보편자를 나타낸다.
대명사는 개별자를 가리키지만 그 대상이 문맥에 따라 달라지므로, '지금(now)'과 같은 단어는 현재의 순간을 가리키지만 그 시점이 끊임 없이 바뀌므로 애매한 경우다.
철학사적으로 개별 대상에 대한 성질을 나타내는 형용사와 기타 명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두 개 이상의 대상에 대한 관계를 나타내는 전치사와 동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경향은 대상 간의 관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냈고, 그 결론은 스피노자에 의해 주창되어 브래들리까지 이어지는 '일원론(monism)' ㅡ 보편자는 유일한 하나만이 존재한다 ㅡ 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주창된 '단자론(monadism)' ㅡ 보편자는 여러 개가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ㅡ 으로 이어지게 된다.
버클리와 흄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보편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보편자라고 할 수 있는 백(白)이나 삼각형 같은 개념을 생각하는 것은 특정 개별자를 떠올리는 것이며 그런 개념을 아는 것은 보편자 때문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개별자들과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러셀은 그런 유사성이 바로 보편자라고 주장한다.
즉, 러셀에 따르면 보편자는 존재한다.

보편자가 정신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러셀은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북쪽이란 개념을 모른다 해도 에딘버러가 런던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는 예를 든다.
이 같은 주장은 버클리나 칸트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러셀은 이미 그들의 논리가 충분하지 못한 것을 확인했다고 하며 다시 한 번 보편자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비현실주의를 다룬 4장에서 봤듯이,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과정과 그 무언가는 별개의 것이다.
우리가 보편자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 머리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보편자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보편자를 생각하는 과정과 보편자 자체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보편자는 물질적 영역에서도, 정신적 영역에서도 벗어나 독립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편자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보편자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On our knowledge of universals)>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개별자에 대한 지식처럼 직접적으로 아는 것과 간접적으로 아는 것이 있고,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보편자의 가장 좋은 예는 백(白), 적(赤), 흑(黑), 달콤함, 심(sour), 시끄러움, 딱딱함 따위의 것이다.
이를 좀 더 일반화하자면 우리는 하나의 복합적 느낌소의 여러 부분을 통해 그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A는 B의 왼쪽에 있다.'와 같은 공간적 관계도, 'A는 B보다 먼저 일어났다.'와 같은 시각(時角)적 관계도, 'A와 B는 A와 C보다 더 닮았다.'와 같은 유사성의 관계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류의 지식은 우리가 개별자의 느낌소를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결국 우리는 모든 선험적 지식은 오로지 '보편자들의 관계만을' 다룬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떤 선험적 지식은 개별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궁극적으로는 보편자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있다.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선험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실제 개별자에 적용될 때는 항상 경험적인 요소가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경험 없이는 선험적 지식을 알 수 없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러셀은 여기서 진정한 선험적 지식과 단순한 경험적 일반화를 대조한다.
경험적 일반화의 대표적인 예인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체 인류 한 명 한 명의 생사 여부가 아니라 '인간'과 '죽는다'라는 보편자에 대한 지식이다.
선험적 지식과 경험적 일반화의 차이는 그 의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증거(evidence)'에 대한 성질에서 오는 것이다.
선험적 지식이란 그 지식의 실례(實例)를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실례들의 일반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예가 '그 어떤 사람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생각할 일도 없는 두 자연수의 곱은 100을 넘는다.'와 같은 명제다.
러셀은 사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선험적 명제 또는 일반화는 본질적 의미의 물질을 다루고 있고, 비록 우리가 그 물질들로부터 유래된 느낌소를 통해 그 명제를 이해하는 것이 경험적인 일반화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보편자로 구성된 명제는 경험적 일반화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지식은 궁극적으로 선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음 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러셀은 여태까지 우리가 살펴 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처음에 우리는 사물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ings)과 참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ruths)을 구분했다.
각각의 지식은 즉각적으로(immediate) 알 수 있는 것과 파생적으로(derivative) 알 수 있는 것으로 나뉜다.
사물에 대한 즉각적 지식은 직접적으로 아는 것(acquaintance)으로, 개별자와 보편자에 대한 지식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개별자에 대한 지식으로는 느낌소와 우리 자신 ㅡ 확실하진 않지만 ㅡ 에 대한 것이 있었고, 보편자에 대한 지식으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 즉 관계나 시공간, 유사성 등에 대한 것이 있었다.
사물에 대한 파생적인 지식은 간접적으로 아는 것(description)이고 이는 항상 직접적으로 아는 것과 진실에 대한 지식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했다.
참에 대한 지식 중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intuitive)' 지식이며 이는 자명한(self-evident) 진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참에 대한 지식 중 유도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자명한 진실들로부터 연역할 수 있다.
따라서 진실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려면 직관적인 지식에 대해 아는 것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계속 된다.

슬슬 끝이 보인다. 씨X, 우린 할 수 있어!


  1. 두 가지 약점이 각각 한 문단씩 설명되어 있는데 단지 그런 약점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왜 그런 것인지는 이해를 못하겠다. 솔직히 칸트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이는 한글판 책에서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지난 글에서는 'universal'이라는 단어를 추상자라고 번역했는데 보편자가 좀 더 어울리는 해석인 것 같아서 급하게 고친다. 지난 글에 있는 추상자라는 단어는 따로 고치지 않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