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치마(The Black Skirts) - Don't You Worry Baby (I'm Only Swimming)

| 2011. 9. 25. 08:10

검정치마의 데뷔 앨범 '201'은 나의 음악 세계에 있어 거대한 혁명과도 같은 앨범이었다.
한국의 밴드 음악이라고는 블랙홀을 위시한 헤비 메탈류와 몇몇 익스트림 메탈 밴드, 피터팬 컴플렉스의 1집, MOT의 1집, 그 외 어쩌다보니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넬이나 델리스파이스의 히트곡 정도밖에 알지 못했던 나는 '201'을 통해 한국 밴드 음악의 현 주소를 알 수 있었고 그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한국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전자음이 섞인 음악은 절대 락이 될 수 없다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 자미로콰이의 'A Funk Odyssey' 앨범만큼이나 내게는 중요한 앨범인 셈이다.[각주:1]
데뷔 앨범의 포스에 질질 지리고 만 나는 검정치마의 프론트 맨 조휴일 ㅡ 당시엔 검정치마가 하나의 팀으로 구성된 밴드로 알았기에 조휴일이 검정치마의 리더이자 프론트 맨인줄만 알았다 ㅡ 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비록 여태까지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공연 소식을 트랙킹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다른 한국 밴드 음악을 접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장기하의 음악을 검정치마 이후에 또는 검정치마 때문에 듣기 시작했고, 장기하로부터 국카스텐을 알게 되었으며 ㅡ 국카스텐 예찬의 글은 10월 언젠가로 미루자 ㅡ 국카스텐을 듣다가 칵스를 접하게 되었다.
조휴일의 톡톡 튀는 감성이 이 모든 거룩한 연쇄 작용을 불러낸 것이다.
각설하고 다시 검정치마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네이버 뮤직 네티즌 선정위원단 활동을 막 시작한 언젠가 검정치마의 2집이 발매 예정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비살롱과의 불화로 소니와 새 계약을 맺은 지 2년 만에 들려온 반가운 신보 소식이었다.
왠지 몹시 여리여리한 감성을 가진 것처럼 생긴 재미교포 조휴일이 레코드사와의 마찰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음악 활동을 접어버리지는 않을까 했던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 다행스러웠다.
검정치마의 신보 소식을 접한 후 언젠가, 그 주의 미션 앨범 6개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나는 목록에서 검정치마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식적인 첫 네이버 뮤직 데뷔가 검정치마에 대한 글이라면 자타가 만족스러울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달리 리뷰의 기회는 내게로 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평점 10점을 던진 나 때문에 검정치마의 2집이 그 주의 발견에 무난하게 뽑혔다는 작은 성공은 있었지만 말이다.

다소 섭섭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네티즌 선정위의 검정치마 2집 리뷰는 내가 썼을 그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써졌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호기를 부렸던 내가 그보다 더 나은 글을 쓰지 못했을 것 같다는 후달림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로든 나는 그 이후로 검정치마 2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 미뤄왔다.
하지만 오늘 'Don't you worry baby(I'm only swimming)'를 다시 들으면서 이 훌륭한 뮤지션과 훌륭한 앨범을 소개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팬이라고 자처한다면, 그것도 아주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면 최소한의 팬질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검정치마의 1집은 당시 한국 밴드 음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잘 몰랐던 나에게조차 신선하게 들릴 만큼 이국적인 냄새가 짙게 풍겼다.
트랙 하나 하나에 독특한 분위기가 배어있었고, 각 트랙 안에서도 부분 부분마다 고유한 특성이 두드러졌다.
네이버 식으로 평점을 주자면 당연히 10점짜리 앨범이다.
그 앨범 자체만 놓고 봐도 충분히 만점짜리지만 그 앨범이 내포한 무궁무진한 가능성만으로도 만점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앨범도 계속해서 듣다 보니 나름의 한계점이 보였다.
첫째로 '201'이 갖는 이국적 분위기에 집중하다 보면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나듯 갑자기 이질감이 들 때가 있었고, 둘째로 트랙을 하나씩 따로 놓고 보자면 다들 굉장하지만 하나의 앨범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트랙 간의 유기성이 떨어져 외인구단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조휴일은 2집에서 이 두 가지를 완벽 이상으로 잘 커버해냈다.
우선 한국적인 컨트리 포크 사운드를 가져와 기존의 음악에서 느껴졌던 이국적 느낌을 대폭 완화했다.
그는 더 이상 2000년대 후반 홍대 인디신으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재미교포 음악인 '홀리데이 조'가 아니다.
그는 그런 사실을 거부했지만 다수의 청중이 느낄 수 있었던 기존의 UK적인 사운드의 옷을 벗어버리고 산울림의 담담함과 여유로움을 자신의 스타일로 승화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꼭 조휴일이 늙으면 김창완처럼 생겨질 것만 같다!


이런 영향의 가장 대표적인 트랙이 '우리 젊은 사랑'이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와 간결한 피아노 라인으로 시작해 호젓한 산길을 걷는 듯한 느낌의 드럼 비트가 복고적인 맛을 한껏 돋운다.
첫 트랙 '이별노래'도 포크 사운드가 빛을 발하는 트랙이다.
중간에 리버브 가득한 코러스 라인과 거대한 타악기가 빵빵하게 빈 자리를 채우는 부분은 트렌드를 좇은 듯한 느낌이 강하지만 멜로디 면에서 색다름을 추구했다.
타이틀 곡 'Love shine'과 'International love song'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가사를 쓰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장점을 잘 살려, 비록 가사는 영어지만 정상적인 의무 교육을 마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Love shine'의 관악 세션에, 'International love song'에서는 현악 세션에 집중한다면 각 곡이 가진 매력을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특히 국제적 사랑 노래는 정말 들을 수록 좋다.
후반부에 나오는 전조는 막시밀리안 헤커를 연상시킬 만큼 서정성이 뛰어나다.
가사는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아, 정말 좋다.


조휴일은 1집이 앨범의 컨셉 면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점 또한 2집에서 훌륭하게 커버했다.
앨범 제목과 앨범 자켓, 그리고 몇몇 트랙 ㅡ '이별 노래', '무임승차', 'Love shine', 'Ariel', '앵무새' ㅡ 에서 바다와 항해라는 공통적인 메타포를 사용해 사랑과 인생 살이를 아름답게 노래했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앨범 전반적으로 컨트리 포크 사운드를 채택해 앨범 전체로서의 완성도도 높였다.
'무임승차'는 컨트리 기타 라인이 깔린 담백하고 무난한 락 넘버, 'Ariel'은 전작의 'Tangled'를 떠올리게 하는 감성적인 발라드 넘버, '앵무새'는 레니 크라비츠나 프린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찐득찐득 느끼한 분위기의 발라드다.
'앵무새' 같은 분위기의 노래에 '부산'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센스는 정말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1집의 '좋아해줘'나 '강아지'에서 보여주었던 통쾌한 포스트 펑크 스타일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그런 가사를 쓰게 되었는지 그 동기에 상당한 궁금증이 생기는 '외아들'과 '음악하는 여자' 같은 트랙도 있고, '강아지'에서 보여준 가사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거기서 느껴지는 팽팽한 텐션이 청중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기사도'와 '날씨' 같은 트랙도 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검정치마의 마법에 빠져버린 것이 분명하다.

아직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아침식사'는 정말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각주:2] 선정된 이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다.
앞에서 하도 진부하고 의미 없는 표현들로 훌륭한 곡들을 망쳐버려서 이 곡만큼은 그냥 내비두려고 한다.
무작정 무언가를 타인에게 권하는 타입이 아닌 내가 이렇게 간절히 권하니 한 번은 들어보자.
이건 뭐 듣자마자 입이 떡, 아니 고막이 떡 벌어진다.


나는 가사가 있는 곡에서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조휴일의 가사는 무지, 매우, 몹시, 정말 굉장히 좋다.
스토리에 치중한 장기하의 가사도 좋고 이미지에 집중하는 국카스텐의 가사도 좋지만 그 양 극단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조휴일의 가사도 좋다.
'머리와 분리된 몸짓으로 구애를 했던 밤', '길고 젖은 니 머리카락이 내 목을 타고 쏟아지기만을 기대했던 밤 / 돌아온 건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너의 속맘', '오 흉터도 하나없이 깨끗이 아물어 버린 그 곳 / 우리 추억을 집어 삼켰던 예전엔 내 입이 있던 곳', 'Sleep all day to see you / you'll be in my arms tonight' 같은 문구를 보자.
한 번이라도 가사를 써보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감탄을 금치 못하리라.
음악의 가사가 문학적으로 시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조휴일은 분명히 뛰어난 낭만 시인이다.
시라면 읽는 것도 쓰는 것도 꺼리는 나라도 조휴일의 시집이라면 구미가 당길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칭찬 일색인 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점이 내 글의 객관성을 떨어뜨린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앨범은 이 정도의, 아니 이 정도 이상의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다.
벌써부터 검정치마의 신보를 기대하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훌륭한 앨범을 연달아 내놓았는데!

조만간 검정치마의 공연을 꼭 보러 가야겠다.
  1. 내가 자미로콰이를 얼마나 끔찍히도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201'을 'A Funk Odyssey'와 비교한 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잘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2. 'International love song'과 '기사도'와의 삼자 경쟁에서 승리했다. 전자는 포스가 조금 부족했고 후자는 이미 한 번 소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