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ohead <The Bends>

| 2011. 12. 17. 08:34

내내 라디오헤드 불후의 명작 'OK Computer'가 그들의 2집으로만 알고 있던 내게 'The Bends'가 2집이고, 'OK Computer'가 3집이라는 사실은 작은 충격이었다.
사실 그런 착각을 하고 있던 것에 무슨 엄청난 확신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냥 내 지식과 사실의 괴리에서 느낀 낯설음에 대한 충격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The Bends'를 열심히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별 부담없이 들을 수 있다는 라디오헤드의 1, 2, 3집을 다 들은 이 상황에서 가장 즐겁게 들었던 앨범을 고르라면 단연 2집, 'The Bends'다.
2위는 무난하게 'OK Computer'고, 3위는 'Pablo Honey'다.
메달의 색이 바뀌는 1, 2, 3이라는 순위에는 꽤 큰 차이가 있어보이지만 실제 앨범의 질 차이는 아주 작다.
그만큼 아주 훌륭한 세 앨범이라는 뜻.
명불허전.

참고로 bends는 잠수병을 의미하는 단어다.


'The Bends'가 1, 2, 3집 중 가장 맘에 드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첫째는 기타 위주의 사운드 메이킹.
일렉트로닉 사운드로의 극적인 전환이 드러난다는 4집인 'Kid A'로 넘어가는 디딤돌답게 'OK Computer'에서 우리는 전자적인 소리를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러나 'The Bends' 앨범은 그런 전자적인 소리로부터 안전(?)하게 대피(?)된 곳이다.
전곡이 인트로부터 아웃트로까지 기타 위주의 사운드로 구성되어 있다.
톰 요크, 쟈니 그린우드, 에드 오브라이언이 연주하는 세 대의 기타는 레너드 스키너드의 그것들만큼이나 완벽한 합주를 들려준다.

'OK Computer' 앨범이 순전히 전자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다는 말은 아니다.
3집을 만들어낸 라디오헤드는 여전히 기타, 베이스, 드럼 세션을 가진 밴드였고 세 명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의 기타도 여전했다.
다만 3집의 경우 F/X의 비중이 거의 무에서 유로, 무한대의 비율로 급증했고 기타의 이펙팅이 매우 현란해져 그 사운드의 기반이 기타라고 하는 것에 다소 무리가 생긴 것이다.
여기에 원체가 기타 소리를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되었다.
중학교 때 우연히 시작한 기타 연주가 내 음악적 취향에 이렇게나 큰 영향을 줄지는 몰랐다.
나중에 자식을 갖게 되면 그 또는 그녀가 연주할 첫 악기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The Bends'에서 가장 아끼는 트랙은 내가 좋아한다는 ㅡ 심지어 내가 2집을 좋아하는 첫째 이유이기도 한 ㅡ 비전자적인 사운드와는 가장 거리가 먼 트랙 'Planet telex'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다가 끝나갈 무렵에 슬슬 이 곡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마침내 끝나버리면 아쉬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듣게 되는 과정을 몇 번은 반복해야 겨우 다른 트랙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개미지옥 같은 트랙이다.


'네 취향 따위로 라디오헤드의 앨범을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분노하고 있다면 두 번째 이유도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2집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Creep', 'Android paranoid' 등으로 점철되는 라디오헤드에 대한 선입견적 이미지들, 예를 들어 을씨년스러움, 어두움, 우울함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음악이 2집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개개인의 문제지만 내가 듣기에 'The Bends'에서 암흑 계열의 분위기를 가진 트랙은 맨 마지막 트랙인 'Street spirit (Fade out)'밖에 없다.
가사까지 다 훑을 여력은 없어서 가사의 내용이 어떤 분위기를 띠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앨범의 나머지 11개의 트랙은 음악만 감상했을 때 꼭 밝다거나 화창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어두운 무채색 계열의 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또 역설적이게도 'Street spirit (Fade out)'은 이 앨범의 다섯 번째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싱글 차트에서 5위에 오르는 성공 ㅡ 이 다음 싱글인 'Paranoid android'가 3위로 기록을 깨기까지 최고의 성적 ㅡ 을 거두었다.
나도 이 거리의 영혼 트랙이 싫다는 게 아니고 그저 라디오헤드의 밝은 면이 좋았다는 것뿐이다.
아무래도 이 세계의 수많은 라디오헤드 팬들은 대부분 톰 요크의 음울한 면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http://www.fempop.com/2011/06/19/sexy-sunday-thom-yorke


마지막으로 내가 'The Bends'를 선호하는 이유는 톰 요크의 노래하는 방식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곱게 지르기도 하고, 갸냘픈 가성을 내기도 하며 우리의 감성을 능숙하게 주무르는 그의 노래가 좋다.
'Pablo Honey'나 'OK Computer'에서는 느끼지 못한 톰 요크 노래의 힘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앳되다는 말이 어울리는 톰 요크의 여린 목소리도 2집까지만 들을 수 있고 3집부터는 들을 수 없다.

두 가지 역설과 세 가지 개인적 취향이 뒤섞인 평은 여기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오리지널 버전의 끝판왕이고 다른 의미에선 확장팩의 첫 액트라고 볼 수 있는 문제의 4집 'Kid A'를 들을 차례다.
나의 레벨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 있는지, 새로운 스킬 트리를 찍을 수 있는지, 다른 계열로의 전직이 가능한 수준인지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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