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의 진화

| 2013. 2. 20. 13:22

'드디어 이 녀석이 진짜 본색을 드러내고 정말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기 시작했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이 책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책이 아니라구요!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 ㅡ 맞다, 지난 해 서울대 도서 대출 목록에서 영예의 1위를 차지한 《총, 균, 쇠》의 그 저자! ㅡ 또한 자기가 쓴 책의 제목[각주:1]이 가져다 줄 여러 오해의 싹을 처음부터 끊고 가기 위해 서문에 이런 이야기를 넣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름은 쎾쓰쎾쓰하지만 쎾쓰 책은 아니라구요!"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서 성행위를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줄 새로운 체위를 배울 수도 없고 월경이나 폐경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정보를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여러분의 배우자가 외도를 한다거나, 아이 돌보기를 태만히 한다거나, 아이 때문에 당신 존재를 무시하는 데서 여러분이 느끼는 고통을 줄여 주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또는 역자는 왜 이 책의 이름을 "왜 섹스는 즐거울까?" 또는 "섹스의 진화"라고 만들어놨을까?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그리고 이 책을 불과 12시간 전에 완독한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사실 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제목 학원의 세계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 정도가 되지 않을는지. 각설하고, 그렇다면 《섹스의 진화》는 무슨 구구절절한 내용을 담은 책인 것일까? 책을 읽는 사람마다 맞추는 포커스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우선 내 경우만 보면, 내가 이 책에서 어느 정도 "정답"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었던 질문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저것만 읽고도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긴다면 아래로 이어지는 글을 굳이 더 읽어볼 필요가 없다. 그냥 읽어보라. 그만큼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책이다.

1. 왜 비교적 인간 남성은 여성에 비해 자신의 가족 ㅡ 배우자와 아이를 포함 ㅡ 을 더 쉽게 저버리는 경향이 있는가?

2. 남성의 수유에는 어떤 장점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성 수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아젠다(?)인가?

3. 여성의 배란 시기가 외부적으로 알 수 없게 진화된 까닭은?

4. 폐경은 왜 생겼나?

5. 육체적인 섹스 어필의 진화생물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책의 뒷표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논제가 이 책에 등장한다고 나와 있다. 아무래도 책을 만들어 팔아먹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고른 구절일 것이므로 이 쪽이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보다는 좀 더 흥미로울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도(?) 질문 중 하나는 겹친다.

왜 인간은 남 몰래 섹스를 할까?

왜 인간은 1년 중 아무 때나 섹스를 하는 걸까?

왜 인간 여성은 폐경을 맞이할까?

왜 인간 남성의 성기는 큰 것일까?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짧은 포스팅을 통해 밝히는 것은 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역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이런 훌륭한 시리즈[각주:2]를 번역해준 사이언스북스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므로 내가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질문들에 대한 답만 짧게 요약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짧은 문장 세 개로 정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비이성적인 바람기를 두고 "이건 진화의 산물이야. 날 내버려둬."라는 궤변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본문을 참고하길.

이 세 가지 요소 ㅡ 자녀에 대한 불가피한 투자의 차이, 아이를 키우느라 잃어버리게 되는 기회의 차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에 대한 확신의 차이 ㅡ 때문에 남자는 여자에 비해 훨씬 더 쉽게 자신의 배우자와 아이를 저버리게 된다.

남성의 수유는 정서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나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의 건강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여러가지 이익을 가져다 준다. 게다가 남성 수유의 인프라는 이미 상당 부분 갖춰져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갖춰지지 않은 남성 수유의 신체적 한계 문제 ㅡ 자연적인 진화로는 수 백만 년이 걸릴 정도의 갭이 있다고 한다 ㅡ 는 차치하더라도 심리적인 걸림돌 때문에 빠른 미래에 남성 수유가 일반화되는 모습은 보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 다이아몬드 선생의 의견. 그러나 인간의 생식이 지난 몇 십년 동안 얼마나 비약적인 속도로 변화했는가를 살펴 보면, 남성 수유 또한 "인위 선택"의 한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의 가능성 제시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전 세계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 청춘 남녀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숨겨진 배란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여성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선택되었다는 주장이다. 어째서 숨겨진 배란이 아이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가? 역시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참고.

폐경 또한 간단히 말하면 진화의 산물로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 설명의 타당성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순 없지만 말이다.

폐경의 비용은 생식력이 정지됨으로써 포기해야 할 잠재적 아이들이다. 폐경이 가져다주는 이익은 노령에 아이를 출산하거나 키우다가 죽게 될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과, 이전에 낳은 자녀와 그 자녀의 자녀들의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익의 크기는 여러 가지 세부 사항에 따라 달라진다. 출산 중 혹은 후에 사망할 위험이 얼마나 큰가? 그 위험이 나이에 따라 얼마나 증가하는가? 아이가 없거나 육아의 부담이 없는 같은 연령대 사람의 사망 위험은 얼마나 큰가? 폐경기 이전에 생식 능력이 얼마나 빨리 감소되는가? 폐경을 겪지 않은 경우에는 생식 능력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감소하게 될까?

책의 마지막 장인 7장, 그 이름도 거룩한 "섹스어필의 진실"에서는 나의 오랜 궁금증이자 동시에 나의 확신 없는 철학에 한 줄기 빛이 되는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왜 남자는 근육에 집착하고 여자는 가슴과 엉덩이에 집착하며 둘 다 왜 그렇게 얼굴의 미용에 신경을 쓰는가.

아, 그것은 실로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의 대한 해답, 아니 최소한 조금의 힌트라도 얻고 싶다면 주저없이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를 집어 들라.

  1. 참고로 이 책의 영어 제목은 "Why is sex fun?"이다. 번역은 알아서들 하시길 바란다. [본문으로]
  2. 《섹스의 진화》는 사이언스북스의 사이언스 마스터스라는 시리즈의 책 중 하나다. 예전에 읽었던 《마음의 진화》나 《여섯 개의 수》 역시 같은 시리즈에 속한 책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