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죽을 때

| 2014. 8. 20. 20:27

식상한 치정극에 지나지 않을 제목을 가진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 러시아 전선과 독일 본토를 배경으로 하는 레마르크의 전쟁 소설이다. 전선에서의 이야기가 전체의 1/3쯤이고, 대동소이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직접 적군과 맞닥뜨리지 않는 본토의 이야기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운 좋게 후퇴 중인 전선에서 휴가를 명 받은 군인을 주인공으로 설정, 전쟁이라는 거대한 범죄 속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무기력함, 그와 대비되는 생물로서의 본능과 잔인함 등을 멋드러진 표현과 매력적인 캐릭터와 함께 풀어낸 소설이다.

전운이 모든 대기를 지배하는 와중에서도 그럭저럭 살아나가는 사람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만들어내는 실체 없는 공포와 긴장감, 이 모든 분위기와 대비되는 인간 본연의 휴머니티 등에 대해선 《개선문》을 통해 ㅡ 내가 칭찬을 마다 않는 몇 안 되는 소설이다. ㅡ 접한 적이 있지만 레마르크의 전장 묘사는 처음으로 읽는 바, 다음에 내가 읽어야 할 소설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무리없이 정하게 되었다. 읽어본 몇 안 되는 전쟁 소설 중에 좋아하는 안정효의 《하얀 전쟁》은 레마르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며 정적인 전장 묘사가 주를 이룬다. 조미료 맛이 나는 자극적인 묘사보다 훨씬 몰입감이 있는 진행 방식이라는 게 개인적인 평.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에 강하게 감정 이입이 되었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길을 가다가 문득 지금이 전시 상황이 아닌가 넋을 놓은 적도 있다. 물론 이는 그저 나의 애먼 멍때림의 하나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평이한 반전 소설 부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독일 출신의 작가로서 자국을 향해 강한 반성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에서, 일본 작가의 작품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것이 없는지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술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다. 레마르크의 소설에서 적절한 빈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묘사와 함께 등장하는 술은 나 같은 애주가에게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오늘도 술을 먹으러 나가볼까? 

사족을 달자면, 우리나라 영화 중에 동명의 영화가 있는 것을 검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반항과 유혹이 함께 타오르는 충격의 육탄드라마!"라는 문구가 포스터에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면 레마르크의 소설처럼 전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사랑과 전쟁'을 테마로 하는 영화가 아닌가 한다.

"세계는 멈추지 않아. 일정 기간 동안 조국에 절망했다면 세계를 믿어야 하네. 일식이라는 건 있지만 밤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거야.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어." 폴만은 이제 지구의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자네는 새롭게 시작할 만큼 남아 있을지 물었어. 교회는 어부들 몇 명과 지하 납골당의 신자들 몇몇 그리고 로마의 투기장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거네."

"그렇습니다. 나치스도 뮌헨의 맥주 집에서 죽치던, 직장도 없는 소수의 광신자들로부터 시작됐지요."

폴만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말이 옳아. 그러나 전제 정치가 오래 계속된 적은 결코 없었네. 인류는 편편한 대로를 걸어서 진보하진 않았어. 밀기도 하고 순식간에 전진하기도 하고 후퇴하면서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지. 우리 인간들은 너무 교만했어. 피투성이 과거를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는 현재를 성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요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단 수용소 대장들 중에 유머를 갖춘 사람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동지애를 갖춘 친위대원도 있어. 그리고 애써 세상의 선한 면만을 보면서 끔찍한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리거나 그것을 일시적이거나 엄혹한 필연으로 여겨 버리는 동시대인도 얼마든지 있어. 그들은 말하자면 탄력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지."

그들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포도주는 차고 향기롭고 신선했다. 그래버는 두 잔을 다시 채웠다. 술잔 속의 달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나의 당신, 밤 동안에 깨어 있으니 정말 좋아요. 이야기도 더 잘되고."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래, 맞아. 밤이면 당신은 하느님의 건강하고 젊은 딸이야. 군용 외투나 만드는 재봉사가 아니라. 그리고 나도 병사가 아니야."

"밤 동안 사람들은 원래 그래야 하는 존재로 돌아가요. 그렇게 되어 버린 존재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