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2014. 8. 14. 14:59

http://inlanding.wordpress.com/2012/09/07/narrow-dog-to-wigan-pier-by-terry-darlington/

좌파 정책을 ㅡ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주의 성향의 정책 ㅡ 지지하는 사람, 넓게는 모든 먹물 지식인들을 향한 "젊은" 조지 오웰의 일갈이다. 원문이 좋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겠)고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라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 평하고 싶다. 스스로를 돌이켜 볼 여유가 있을 때라면 언제든지 다시 읽어보고 싶은 구절이 가득하다. 80년도 더 된 옛 시절의 이야기지만 오웰이 전달하는 메시지 하나 하나의 울림은 매우 크다. 그 울림으로 나의 가치관을 빚어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길 정도다.

그러므로 지금의 조악한 인격의 감상적인 배설은 그만 두고 오웰의 거룩한 울림을 느껴보자. 냉철한 휴머니스트인 조지 오웰이 말하는 노동과 인간, 사회와 자본, 이념과 정치가 무엇인지 조금의 힌트를 얻어보자.

어떤 면에서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 만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시 앤드 칩스', 인조견 스타킹, 연어 통조림, 할인 초콜릿(6페니에 2온스짜리 초콜릿 바가 다섯 개), 영화, 라디오, 진한 차, 축구 도박 같은 것들이 혁명을 막은 게 사실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실업 문제를 개선하지 않는 게 전부 지배층의 교활한 술책이라는(일종의 '빵과 서커스'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본 바로는 우리 지배층에게 그만한 머리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말하자면 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는 제조업자들과 값싼 고통 완화제가 필요한 배고픈 사람들의 형편이 그럭저럭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먹을 거리의 변화가 왕조나 종교의 변천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통조림 음식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세계대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세 말기에 근채류나 그 밖의 다양한 채소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또 그 얼마 뒤 무알코올성 음료(차, 커피, 코코아)와 맥주를 마시던 영국인에게 익숙지 않던 증류주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난 400년 동안 영국의 역사는 엄청나게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묘한 일이다. 정치인이나 시인이나 주교의 동상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요리사나 베이컨 제조인이나 과채 재배인의 동상은 아예 없다.

우리 시대가 살기에 완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근대 기술의 승리도, 라디오도, 영화도, 매년 5천 종씩 출간되는 소설도, 애스컷 경마장의 인파도, 명문교 이튼과 해로의 크리켓 라이벌전도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하게도 내 기억에 남은 노동 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이며, 그중에서도 아직 영국의 번영기이던 전쟁 이전의 내 어린 시절에 이따금 보았던 정경들이다.

http://micahu.wordpress.com/2013/09/02/it-is-so-with-all-types-of-manual-work-it-keeps-us-alive-and-we-are-oblivious-of-its-existence/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상습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품는다 해도, 아무리 그의 정신과 성품을 존경한다 해도, 입 냄새가 고욕하면 그는 끔직한 대상이 되며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를 혐오하게 된다.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바로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번민 끝에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그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계급적 특권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은밀한 속물근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취향과 편견도 억눌러야 한다. 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 계급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억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마도 그러기 위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http://www.brainpickings.org/index.php/2012/06/25/george-orwell-why-i-write/

골즈워디에 대해 언급한 바와 같이, 감상주의자의 견해란 현실과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돌변해버린다. 평범한 평화주의자를 한번 건드려보라. 대외 강경론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산층 독립노동당 당원과 수염 기른 과일주스 애호가는 망원경을 거꾸로 대고 프롤레타리아를 보는 한, 모두 계급 없는 사회를 지지한다. 그런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와 '진정'으로 집촉할 기회를 줘보라(이를테면 토요일 밤에 술 취한 생선 운반인과 싸우도록 내버려둬보라). 그러면 그들은 가장 평범한 중산층 속물근성을 대번에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은 취한 생선 운반인과 싸울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이 노동 계급과 진짜 접촉을 한다면, 그것은 대개 노동 계급 인텔리와의 접촉이다.

이런 유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얘기를 꺼내보면 "사회주의는 반대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자는 반대한다"는 말이 안 되는 듯한 대답을 하곤 한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는 부실한 주장 같지만 상당한 무게를 지닌 말이다. 기독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홍보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그 신봉자들인 것이다.

외부의 관찰자가 보기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발전된 형태의 사회주의가 중산층에게만 국한된 이론이라는 점이다.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는 두려움으로 덜덜 떠는 노부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기름투성이 작업복에 목소리가 걸걸하며 인상 험악한 노동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5년 뒤면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가톨릭교도로 개종할 가능성이 다분한 젊고 속물적인 과격파다. 아니면 그보다 전형적인 경우로, 비국교도 출신에 절대 잃을 생각이 없는 사회적 지위를 지녔으며, 은근히 금주주의자인 데다 종종 채식주의자인 경향이 있으며, 사무직 종사자인 작고 깐깐한 사람이다. 특히 후자는 어느 사회주의 정당에서나 놀랍도록 흔한 유형이다. 그들은 옛 자유당을 '무더기'로 탈퇴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괴짜들이 불길할 정도로 많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말 자체가 영국의 온갖 과일주스 애호가나 나체주의자, 샌들 애용자, 섹스광, 퀘이커교도, '자연 치유' 사기꾼, 평화주의자, 여성주의자를 다 끌어들이는 자력을 지녔다는 인상을 받는다. (중략) 일례로 나는 지금 한 주가 한 학기인 어느 여름학교의 입학요강을 들고 있는데, 이 요강은 내게 "채식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즉, 그들은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걸 당연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질문 자체가 멀쩡한 사람들을 상당수 멀어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들의 본능이 확실히 옳은 것은, 음식에 대해 별난 사람은 송장 같은 삶을 5년 더 연장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스스로를 인간 사회와 단절시키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보통의 인간과는 접촉하지 않겠다는 사람인 것이다.

나아가 대부분의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애쓰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사회적 위신에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추악한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거기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전문용어도 문제다. 일반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니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심지어 '동지'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사회주의 운동을 불신하는 데 적지만 한몫을 했다. 머뭇거리던 사람들 중에 용기를 내어 대중 집회에 갔다가 자의식 강한 사회주의자들이 의무적으로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제일 가까운 맥줏집으로 들어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그의 본능은 건전하다. 오랫동안 써봐도 부끄러움을 삼키지 않고서는 부를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을 왜 붙여야만 한단 말인가? 평범한 문의자들을 사회주의자는 샌들을 신고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가버리도록 만드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사회주의 운동에도 인간미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게임은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