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 2012. 1. 1. 02:10

공자가 말했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나는 오늘 하루를 죄다 블로그 껍데기를 바꾸는데 사용했다.

물론 배우고 익히는 것은, 우리의 공구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전혀 익숙하지 않은 CSS 언어와 씨름하다보니 점점 그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버거워지더라.
나중에는 저 학이편의 첫 문장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감탄문의 감탄과 느낌표는 어딘가로 쏙 빠지고 대신 물음표가 끝에 너덧개 붙으면서 억양이 슬쩍 올라가는 일종의 비꼬는 문장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부차적인 탓을 원 스킨의 제작자에게 돌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내답지 못한 일이다.
어쨌든 총대를 스스로 든 사람은 나였으니까.
하지만 내 책임감은 나아갈 길이 막막하다는 사실까지는 어떻게 책임지지 못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깜깜한 곳에서 손으로 내 앞이라고 추정되는 방향을 더듬거리던 그 때 갑자기 위에서 번쩍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 있던 내 두 눈을 다시 빛에 적응시키기엔 다소 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공구 선생이었다.
참 명성에 걸맞지 않은, 그런 이죽거림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즐겁냐?"

공구 선생은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킬킬거리는 웃음이 잘 어울릴 얼굴 아닌가.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3&Total_ID=3528701


당장에 달려가 저 망할 영감탱이의 축 늘어진 볼따구니를 철썩 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는 내 팔이 도저히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위인전 시리즈에서 매 번 그 이름이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손해보는 것은 없기에 대답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무어라고 대답해야 맞는지 갈팡질팡하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과연 즐거운가.
나는 과연 배우고 때로 익히는 그 과정을, 기쁘다고 느끼고 있는가.

내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습이라는 행위를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유치원이기보다는 초등학교 때부터다.
정규적인 수업 시간이 생겼고, 정해진 커리큘럼도, 그에 맞는 교재도,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다.
나는 그 수업들을 꽤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면 책을 읽는 것을 즐겼고 그렇게 집은 자연스레 나의 2차 교육기관이 되었다.
과학 만화 전집이 훌륭한 1인 3역 ㅡ 커리큘럼, 교재, 선생 ㅡ 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꽤 준수한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상황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막연하게 공부 잘 하는 아이, 공부 좀 하는 아이, 공부 그냥 하는 아이, 공부 좀 못 하는 아이로 나뉘어 왔던 나와 동갑인 아이들의 학습 능력이 수치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객관적인 지표에서도 비교적 상위권에 속했고 매 시험마다 전교 20등에서 30등 사이에 랭크되곤 했다.
전체 비율로 따져보면 상위 10%보다 조금 더 좋은 성적.
시험 문제를 얼마나 잘 풀고 얼마나 잘 맞추는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여전히 공부를 좋아했다.
뭔가를 알아가는 것은 왠지 기분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쩌다가 좋은 고등학교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곳엔 공부가 재밌어서 하는 아이들보다 뭔가 청부 살인업자 분위기를 풍기면서 부탁 받은 문제집을 하나 하나 조용히 살해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초반에는 그런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도 그런 타고난 킬러의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 나이로 19살이 되었을 때 나는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좋다고 불리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없을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 무렵에 이미 나의 지적 흥미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름이 지나 내가 개인적으로 가고 싶었던 학교에 수시 지원을 했고 채 수능을 보기 전에 합격 발표가 났다.
수능 날 아침, 고사장에 도착한 친구로부터 안 오냐는 전화를 받으며 일어난 나는 꽤 공부에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생각했을 나의 빈 자리. http://jinko225.egloos.com/2242263


그리고 20살이 되었다.
지방에 소재한 학교라 기숙사 생활이 불가피했던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과분한 자유를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고 그 자유가 지닌 소중한 가치를 흥청망청 쓰기 시작했다.
성적 같은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일단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중요했고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관심 있는 일이 아니면 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학년은 어찌어찌 넘겼다.
2학년 때는 예비 전공 과목을 들어야 했기에 꽤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지만 한 번 고삐가 풀린 나는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겨우 겨우 그 고비들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하지만 문제의 3학년 1학기, 나는 더 이상 내 손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짜 문제는,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내게 학업에의 의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놀았다.
곧바로 휴학을 했고, 6개월은 대전에서 탱자탱자, 그 뒤 6개월은 서울과 동유럽에서 탱자탱자 놀았다.
머리를 벅벅 밀고 자기 수양의 시간으로 들어갔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자유를 되찾았고 그나마 그간 쌓인 자유 마일리지를 또 탕진했다.
보바리 부인도, 제르베즈도 가볍게 제칠 수 있는 그런 방종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분명한 전환점이 있었다.

나는 남는 시간에 열심히 책을 읽었고 그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자 애썼다.
하다 못해 시간이 남을 때 보는 영화로부터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듣는 음악으로부터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어떤 사람들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거기서 내가 뭔가 더 얻을 것은 없는지, 무언가 배울 것이 없다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도 배울 수 있는 점은 없는지 고심했다.
변화의 계기로 무엇을 딱히 꼽기는 어렵다.
그냥 이제는 이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의 변화의 개혁의 시기에 맞춰 때마침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아직 구체화된 이야기는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지만, 나는 그 곳에서 무언가 비전을 보았다.
시기도 꽤 적절했다.
나에게는 아직 주어진 시간이 있고 따라서 진짜 제대로 일을 해치우기 시작할 때까지 대비할 시간이 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에 뭐라 확답을 줄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니, 이 일은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일의 성패를 떠나서 내 자신에 대한 오랜 기만의 시간을 속죄할 수 있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작은 블로그를 내 취향대로 바꾸는 일은 나름 그 큰 그림의 시작이었다.
엄청난 관성을 온 머리로 느끼면서 내가 공부라는 것에 정말 오래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도 시작부터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계속 매달렸다.
블로그를 다 닫아버리고 당분간 때려칠까 생각할 정도로 "조금만"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시간을 제외하고, 2011년 12월 31일에만 컴퓨터를 10시간은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먼 길을 돌아온 오늘의 블로그 손질은, 아직도 100% 만족할 수준은 못 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가 지어졌다.

2012년 흑룡띠의 해에 내가 이룬 첫 성과는, 내가 여전히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배움과 익힘이 재미 있으려면 "때때로"라는 부사가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될 나의 앞날에는 전혀, 심지어 한 획조차 보이지 않는 단어다.
"때때로"가 아닌 "항상" 공부하게 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기쁘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리고 나는 쬐끔이나마 학습이 주는 마조히즘적인 쾌감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니던가.

나는 고개를 들고 공구 선생에게 대답했다.

"쎼쎼."

그는 예의 그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공구 선생이 중풍에라도 걸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싶어도 뭔가 한쪽이 찌그러진 썩소를 지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속단을 자책하며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으나, 내가 아는 중국말 목록에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알 수 없는 미소를 내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ㅡ 사실 펼쳐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ㅡ 저 컴컴한 어둠을 한 번 보고, 선생의 올라간 입꼬리를 한 번 보고, 다시 더듬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공구 선생을 밝히는 스포트라이트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의 고무된 사기 때문인지 어두운 길이 더 잘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제 이딴 글은 그만 쓰고 어두컴컴한 거실을 가로질러 내 방 침대에 안착하는 일만 남았다.

지난 해 미천한 블로그를 찾아준 45,436명 모두가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 한 해 맞았으면 좋겠다.
여러 번 들어온 사람은 그만큼 기쁘지 아니한 한 해가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