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범(Bumbum) 대전 공연 후기를 가장한 2월 4일의 일기

| 2012. 2. 7. 22:58

좋은 공연의 감동이란 실로 언어로 옮기기 어려운 것이다.[각주:1]
이 명제를 입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훌륭한 공연을 보고 와서 누군가로부터 공연이 어땠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치자.
대답으로 생각나는 문장은 아마 다음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진짜 좋았지!"
"개쩔었음."
"와, 씨X ㅋㅋㅋㅋㅋㅋ."
"대~박." 


좋은 공연을 묘사하는 1차 반응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의 양이 적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모(母) 밴드 범범의 2012년 첫 공연의 평을 "와, 씨X ㅋㅋㅋㅋ 진짜 개쩔었음. 대박." 따위로 휘갈기고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다.
심정적으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다지 주류적이지 못한 컨텐츠로 주류 대열로의 합류를 꾀하는 비영리 언론 매체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허세 섞인 잡담으로 이들의 공연을 치장하는 것은 거의 의무에 가까운 것이다.

근데 솔직히 그렇게 할 말이 많은 것은 아니다.
내가 범범 소속으로서 마지막으로 공연을 한 것이 2010년 1월의 일이었고, 약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범범의 최근 동향 같은 것엔 거의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기 ㅡ 또는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지 버클리식의 극단적인 경험론을 인용하자면, 범범은 지난 2년 동안 존재하지 않다가 바로 저번 토요일, 2012년 2월 4일에 도깨비처럼 뿅 나타난 밴드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르포를 위해서는 2년 간의 미싱 링크, 즉 잃어버린 고리를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대다수의 밴드원들에게 비밀로 한 채 나는 토요일 오후에 몰래 대전을 방문했다.
사실은 멤버 번경이 잦은 범범의 사정 탓에 누구한테 나 공연 보러 간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다.
게다가 그저 단순히 대전에 찾아가는 일정이었다고 치부하더라도, 과거의 전설과도 같았던 존재감을 상실해버린 내가 딱히 연락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각설하고 둔산동 터미널에서 택시를 잡고 카이스트 기계동으로 향했다.

그래, 범범은 원래가 계획이 엉망진창인 밴드였다.
대부분의 계획을 즉흥적으로 짜는 이 밴드 ㅡ 대표적인 예로, 공연 리허설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면서 어떤 곡을 공연에 올릴지 고민하고 앉았더라 ㅡ 의 악명을 바싹 잊고 있었다.
당초 예정에 따르면 점심을 먹고난 뒤 동방[각주:2]에서 리허설을 진행해야 했으나 내가 무려 오후 세시 반경에 동방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차!
바로 리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발신자 번호 표시 서비스를 이용해 관등성명 같은 거 안 대고 바로 용건을 물었다.


이제 슬슬 시작하려고 한단다.
동방이 있는 매점 건물 뒷편에서 이들과, 정말 오랜만에 재회했다.
기대했던 광경 ㅡ 모두가 합주에 열중하는 사이 동방에 깜짝 등장해 탄성과 환호를 온 몸에 받는 그 만화 같은 장면 ㅡ 은 개뿔, 그냥 동네에서 쓰레빠 찍찍 끌고 다니다가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와 그들의 마음은 진정한 반가움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는 그랬으니까.

그리고 동방 리허설을 감상했다.
리허설 때 최선을 다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합의는 거의 불문율, 터부 같은 개념이 되어버린지 오래.
마치 페이스북의 여자 사진을 보고 실물을 추정하는 고고학적, 관상학적 프로세싱을 거치는 것처럼 건성 건성 연주하는 그 모습에서 이 날의 공연이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자랑할지 유의하여 감상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범범의 사운드에서 유래 없던 꽉 찬 사운드를 들려주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멤버를 모두 동원할 경우 범범은 기타 두 대, 베이스, 드럼에 키보드 두 대, 퍼커션, 보컬 두 명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만큼 멤버의 수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고, 단순히 풍부한 소리를 내는 것을 떠나 과거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장르에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주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동방의 화이트 보드에는 흥미로운 선곡들이 가득 있었다.

확실한 셋 리스트는 60초후에 공개합니다.


창작곡의 경우, 과거에 꾸준히 밀던 여러 곡들은 자취를 감췄고, 리허설 때 합주조차 하지 않아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하지만 기대가 되기는 기성곡과 마찬가지였다.

공연장은 궁동에 위치한 하울 앳 더 문(이하 하울)이었다.

하울앳더문
주소 대전 유성구 궁동 402-3
설명
상세보기

공연장 자체 장비만으론 범범의 인해 전술적 스케일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직접 동방의 장비를 그 곳까지 옮겨야 했다.
콜밴을 불러 각종 장비를 싣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물론 손님인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멍 때리다가 그냥 택시를 타고 궁동으로 갔다.
도울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이 공연은 그들의 공연이었고, 딱히 내가 빈둥거린다고 해서 핀잔을 주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만 여러 번 들어본 하울은 기대보단 좋았지만 절대적으로 좋은 공연장은 아니었다.
일단은 무대가 매우 좁았다.
범범처럼 멤버가 많은 팀은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 대대적인 무대 구조 조정이 필수적이었다. 

오른쪽 위에 처량하게 올라간 키보디스트 a.k.a. 휴학의 제왕이 보이는가.


짐들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끝에 겨우 겨우 무대에 모든 사람들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봤자 무대 위에서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없었지만 말이다.

간단한 사운드 체킹이 시작되었다.
공연장을 관리하는 측에서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구성이라 그런지 다소 헤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바로 가장 답답했던 것은 마이킹 메커니즘이 대체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작동이 안 되는 녀석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울링 방지를 위해서였다면, 그래 좋다.
하지만 그런 의도로 볼륨 조절을 하는 것이었다면 마이크의 위치와 그에 대응되는 믹서의 인풋을 정확히 매치시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마지막 순간까지 불안하게 이어진 사운드 체킹은 그래도 막판에는 대충 구색을 맞출 정도는 되었고, 그 정도 선에서 공연 준비를 마치기로 했다.
조금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별다른 추가 조치없이 그냥 넘어갔다.

저녁으론 궁동의 명물 "압구정" 철판 구이에서 볶음밥을 먹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공연에 대한 긴장감을 풀었다.
입구에 피켓이라도 하나 세우자는 의견에 근처 문방구에서 하드보드지를 하나 사와 공연을 간단히 소개하는 내용을 채웠다.
밥을 다 먹고 나와서 공연장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에게 알린 공연 시작 시각은 오후 8시, 당시 시각 오후 7시 30분이었다.
나는 기념으로 받은 입장권으로 카스 병맥주를 한 병 바꿔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손님들이 차기 시작했고 나는 낯이 익은 몇몇 지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약 8시 10분쯤 되었으려나, 공연이 시작했다.
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앉아 범범의 무대를, 처음으로 밴드의 멤버가 아닌 관객의 일원으로서 지켜보았다.

사진으로 보면 진짜 후져보이는데 그렇게 후지지는 않았다.


트리오 셋이 보여준 흥겨운 두 곡, 신중현의 '미인'과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Can't stop'은 범범의 락 지향적인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는 오프닝이었다.
흥미롭게 지켜봤던 점은 과거 락 드러밍에 불만을 호소하던 드러머가 락 드러머로의 전향에 거의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것.
무엇보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넘치는 파워가 반가웠다.
언젠가는 내가 공연을 하고 말리라고 다짐했던 존 레전드의 'Soul joint'가 나올 때는 뒷통수를 뻑 맞는 기분이었지만, 내가 그보다는 더 노래를 잘 할 자신이 있었기에 아주 좌절하진 않았다.
언젠간 나도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를 날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라이브로 직접 듣는 'Soul joint'가 인상적인 선곡인 건 확실했다.

기타리스트가 바뀌고 키보드가 가세한 두 창작곡 공연에선 범범의 음악성이 기량면에서 뿐만 아니라 깊이 면에서도 일취월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영향의 원동력은 아무래도 새로 영입한 천재 기타리스트로부터 나온 것일 게다.
자신의 색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직선적인 주법으로 소리를 채우는 그런 기타리스트라면 밴드를 이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그런 인재일 수밖에 없다.
'얕은 Blues'로 블루스에의 사랑 ㅡ 여전히 범범을 "블루스 밴드"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지만 ㅡ 을 내비친 뒤에 새로운 보컬을 세워 아소토 유니온의 'Think about'chu'와 인큐버스의 'Summer romance'를 깔끔히 소화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창작곡 'One step to you'는 빅 밴드 훵크에서나 느낄 수 있는 웅장한 박진감을 살린 곡이었는데 정말 신이 났다.
내가 다시 이 밴드에 들어간다면 과연 무엇을 공헌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사그라드는 느낌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그룹에든 한 명쯤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http://www.gamechosun.co.kr/board/view_ucc.php?site=fifa2&bid=fun&num=1579899&page=50


짧은 인터미션 뒤에 불세출의 여보컬이 전면에 나서 아델이 커버한 샘 쿡의 'That's it, I quit, I'm movin' on', 이효리의 '10 minute' 편곡 버전, 한영애의 '누구 없소'를 불렀다.
'10 minute' 편곡은 나는 가수다를 방불케하는 무시무시한 고퀄이었고 '누구 없소' 또한 특유의 폼 나는 걸쭉함을 잘 표현했다.
어반 블루스의 모범과도 같은 'When love comes to town'의 허비 행콕 버전을 마지막 곡으로, 스티비 원더의 'Sir Duke'를 앵콜곡으로 공연한 뒤 범범의 공연은 막을 내렸다.
범범 멤버들과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포를 푸는 사이에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 공연의 티켓 값은 5,000원이었다.
3,000원 이하의 음료와 바꿔치기를 한다면 사실상 공연에만 투자하는 돈은 2,000원이 되는데 실제 공연은 최소한 이 10배의 가치를 넘는 수준의 공연이었다.
최근 나의 음악적 트렌드와는 상반되는 경향의 선곡이었지만 어쨌든 내 음악 세계의 기반을 이룩해준 성질의 것들이었다.
창작곡은 창작곡대로, 기성곡은 기성곡대로 원래의 취지와 밴드 주관적 해석을 적절히 버무려 신선하면서도 익숙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깨알 같은 멘트와 애드립은 공연의 몰입도를 유지시켰고 다양한 구성은 산만함보다는 다채로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런 밴드에 있었다는 것, 그 전(前) 멤버라는 정체성을 알리고 싶었다.[각주:3]
언젠가 범범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될 때 ㅡ 꼭 스탠포드의 구호 "Die Luft der Freiheit weht.[각주:4]"처럼 ㅡ 를 위해 열심히 수신(修身)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참 범범이란 밴드는 기똥차게 멋진 밴드임이 틀림없다

공연의 문제는 단 한가지였지만 그 하나의 문제가 공연의 전반적인 질에 입힌 타격은 꽤나 컸다.
사운드 체킹 때부터 나를 불안하게 했던 마이크가 공연 내내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갑자기 마이크가 안 나오는 것은 겨우 겨우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노래 중이든 멘트 중이든 끊임없이 발생한 하울링과, 그로 인해 곡과 곡 사이의 간극이 질질 늘어진 것은 치명적인 에러였다.
블루 스크린이라도 뻥뻥 터질 느낌이었다.
나도 불안했고, 범범도 불안했고, 관객도 불안했다.
자연히 공연의 질도 의도치 않게 덩달아 떨어졌다.
기본적인 부분이 불안해지니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정말 상관도 없는 요소들까지 구석구석 삐걱대는 것을 보고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범범이 어느 정도의 노력을 들였는지는 잘 모르나,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놓고는 그런 대접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잘은 몰라도 이들의 마음을 꽤나 무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밴드 멤버도 아닌 나조차 쏜살 같이 빠져나간 관객들에 모습에서 언짢음을 느꼈을 정도니 말이다.
엔지니어링에 그렇게 능하지 못한 사람이 믹서를 잡았을 때 이런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정말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박수다.


정리를 잽싸게 마친 뒤 뒷풀이에 참석했다.
맛있게 술을 먹고 밤 12시에 서울로 올라가는 막차를 탔다.
터미널에 도착해 총알 같이 달리는 택시에 몸을 맡기니 두시 반이 채 되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범범 공연을 위한 당일치기 대전행이 완전히 끝나는 순간이었다.
교통비만 따졌을 때 거의 5만원이 들었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은 날이었다.
물론 서울 새벽의 혹독한 추위를 온 몸으로 받으며 술도 잠도 덜 깬 상태로 고속터미널 앞을 서성거렸던 걸 생각했을 때, 다시 저 토요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돈으로 진 토닉이나 몇 잔 걸치고 말겠지만 말이다.


  1. 내가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않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절대 귀찮아서 안 그런 게 아니다. [본문으로]
  2. 대학교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를 위하여, 동방은 동아리 방의 줄임말로 범범은 카이스트의 정식 동아리는 아니나 리더의 학번 누르기 기술을 사용, 정식 밴드 동아리의 동방을 자신의 본거지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3. 사실 그래서 나는 인터미션 뒤 후반부 공연에서 키보드 옆자리에 앉아 마치 스태프인양 행세했더랬다. [본문으로]
  4. 독일어다. 영어로 직역하자면 The air of freedom blow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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