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김현식 새노래>

| 2012. 3. 5. 14:55

김현식의 1집이다.
B 사이드야 뭐 그저 그런 포크 발라드 정도만 실려 있지만 A 사이드에는 틀자마자 깜짝 깜짝 놀랄 트랙들이 가득하다.

서라벌레코오드사.


'봄 여름 가을 겨울'은 1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곡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냥 평범하게 음악을 좋아하는 한 여자가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각설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영락없이 어스, 윈드 앤 파이어가 떠오르는 훵크 곡이다.
나는 이 트랙을 처음 들었을 때 토킹 헤즈의 곡으로 착각했는데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기타 소리를 듣고 '토킹 헤즈가 이렇게 블루지한 리프를 쓰기도 하는군.'하고 생각했더랬다.
깨알 같은 부분까지 계산하여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데 신나는 정도도 그렇고 후렴구가 가성인 것도 그렇고, 빵빵한 코러스와 관악 세션만 빼면 어스, 윈드 앤 파이어 불멸의 히트곡인 'September'와 비슷한 느낌이다.
가사는 뭐 별 내용 없다.


이어지는 트랙은 '어하둥둥 내 사랑'이다.
어"화"둥둥이 아니고 어"하"둥둥임에 유의하자.
이 트랙은 시작하자마자 제프 벡의 <Blow By Blow>를 듣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술을 부린다.
기본적인 분위기는 지난 트랙과 마찬가지로 훵키하지만 그 우주로 날아가는 신비로운 신디 톤과 거의 신디 소리를 표방한 기타 톤이 재즈 락 특유의 아스트랄함을 준다.
민요, 타령 느낌의 보컬 멜로디 라인만 빼고 좀 더 재지(jazzy)한 코드들, 그러니까 이름 복잡하고 긴 코드들 위주의 편곡을 했더라면 제프 벡의 뺨을 후려칠 정도는 아니더라도 가슴팍에 찹이라도 한 대 날릴 정도는 될 트랙이다.
마찬가지로, 가사는 별 내용 없다.

아래 유튜브 클립을 보면 제목에 "어화둥둥"이라고 나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트랙의 제목은 "어화둥둥"이 아니고 "어하둥둥"이다.
왜 이런 사실을 강조하냐면, 처음에 어하둥둥 내 사랑이라고 검색했을 때 아무 것도 안 뜨길래 이 노래는 없나보다 하고 그냥 넘어갈 뻔 하다가 나중에서야 어화둥둥 내 사랑이라고 올라온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괜히 심술이 났다.


A 사이드 세 번째 트랙은 '주저하지 말아요'인데 비록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 곡이야말로 <김현식 새노래>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역시나 시작하자마자 바쁘게 달리는 '주저하지 말아요'는 굳이 장르 구분을 하자면 신스 팝 정도로 부를 수 있겠다.
김현식은 다른 어떤 트랙에서보다 이 트랙에서 시원시원한 발성을 사용해 쭉쭉 뻗는 소리를 낸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의 윤도현과 비슷한 소리를 낸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윤도현이 이 노래를 커버한다면 상당히 들을 만한 리메이크가 완성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지만, 그냥 내 기대일 뿐이고.
1절이 끝나고 나오는 기타 솔로는 인상적.

'주저하지 말아요'는 나름 재미 있는 가사를 가지고 있다.
애가 타게 기다리던 그 때가 왔으니 주저하지 말고 내 손을 잡으라는 시대와 맞지 않게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하다가, 갑자기 코러스로 넘어가면서 오늘 밤엔 밤새도록 뭔가를 하자는 세 가지 제안이 등장한다.
차례대로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의 춤을 추자는 건데 대체 밤새도록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의 춤을 추자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부끄러워서 돌려 말하자면, 영어 가사에 참으로 많이 등장하는 "making love"와 같은 간접적 표현이 아닐까.
그 뜨거운 혈액 순환의 행위를 두고 사랑의 춤을 추자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낭만을 고려한 표현일 텐데, 2012년의 감성으로 바라보자면 그 낭만은 온데간데 없고 그냥 앙증 맞음 정도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술을 먹다가 은밀하게 눈이 맞은 남녀, 자리를 피해가자는 사인을 주기 위해 남자가 문자를 친다.
"우리, 사랑의 춤 추러 갈까? ><"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거의 뭐 모성애적인 본능에 이끌려 "ㅇㅋㅇㅋ"라고 답장을 치게 되지 않을까.


네 번째 트랙 '떠나가 버렸네'는 가창력이 돋보이는 발라드.
다섯 번째 트랙은 베토벤의 운명을 편곡한 '운명'인데 대체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음악을 어째서 음반에 넣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꼭 폴 길버트가 일렉 기타로 바흐를 커버하려고 했던 그 느낌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B 사이드 마지막 ㅡ '아름다운 노래'라는 건전 가요[각주:1] 바로 전에 ㅡ 에 아베마리아를 편곡한 경음악이 또 들어 있다는 사실인데, 제임스 롤프가 이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맥주를 뿜으며 분노했을 것이다.
이 역시 지금의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80년대 초의 낭만일까.

B 사이드의 트랙들은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막~ 깊은 인상을 남기기엔 조금 아쉬운 곡들이다.
어쨌든 훌륭한 앨범임에는 틀림 없다.
  1. 건전 가요는 1970년대에서 80년대 어느 때까지 음반을 내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실어야 하는 곡들로, 가요는 건전해야 한다는 당시의 정치 이념을 반영한 개똥 행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링크에서 참조하면 되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