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 넛(Crying Nut) <서커스 매직 유랑단>

| 2012. 3. 14. 17:41

왕년에 펌프 기계 위에서 스텝 좀 밟았다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트랙 '서커스 매직 유랑단'[각주:1]이 수록된 크라잉 넛의 2집이다.
전체적인 퀄리티는 데뷔 앨범보다 일진보, 아니 이진보했고 앨범을 지배하는 테마는 펑크에서 뉴 메탈 쪽으로 선회했다.


커버부터 컬트함의 끝을 보여주려고 작정한 <서커스 매직 유랑단>은 첫 트랙 '서커스 매직 유랑단'부터 청자의 뺨을 찰싹찰싹 내려친다.
이런 분위기의 음악을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ㅡ 폴카? 테트리스 음악? ㅡ 서커스 장에서 으레 나올 듯한 그 음악에 육중한 드라이브 기타, 스카 리듬을 기가 막히게 잘 섞어놨다.
완급 조절도 귀신 같고 전하려는 메시지도 도깨비 같은 것이 흥겹기는 흥겹고 요상하기는 요상한 서커스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크라잉 넛은 첫 트랙의 분위기를 죽이지 않고 이어지는 '신기한 노래'까지 여세를 몰아간다.
간주 전 "너무나도 서글픈 노래" 부분에서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가 다시 홱! 낚아채는 모습, 간주에서 등장하는 관악 세션,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황새가 뱁새…(어쩌구 저쩌구)"하는 부분 ㅡ 거의 고딕 메탈의 단편이다 ㅡ 은 아주 그냥 크라잉 넛이 아니면 누구도 시도하지 못할 사운드 실험.
참 제목만큼이나 "신기한" 노래다.
'강변에 서다'는 조금만 세련되게 다듬으면 2012년에도 히트칠 수 있는 테크닉한 메탈 넘버다.
중간 중간 그 빽빽한 틈을 쪼개는 16비트의 드럼이나 스래쉬 메탈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타 솔로는 들을수록 입이 떡 벌어진다.

'베짱이'로 분위기가 한 번 풀린다.
중간 템포의 스카 사운드로 시작해 무난항 펑크로 변화하는 이 트랙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달려온 청자의 고막에 잠시간의 휴식 시간을 준다.
베짱이라는 곤충이 주는 한가하고 유유자적한 인상으로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가사를 이리저리 잘도 써놨다.

갑자기 이 불후의 명작이 생각난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03759&no=39&weekday=wed


월광 소나타의 인트로로 시작해 갑자기 읭?하면서 7분에 가깝게 진행되는 '다 죽자'는 프로그레시브하다고 해도 좋은 스케일을 자랑한다.
누가 뭐래도 나에겐 이 앨범 최고의 트랙이다.
호흡이 길어서 서사적인 흐름이 느껴지는 트랙을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십분 반영된 결과니, 전국의 많은 펌프 팬들은 나를 원망하지 말길.
아무래도 이 트랙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3분 20초부터 시작되는 80년대 LA 메탈식 코러스다.
왠지 모르게 가사의 진지함과는 상반되는 진부함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온다.


1집의 '요람을 흔드는 돈'과 비슷한 분위기의 '더러운 도시', 중·고등학교 남자애들이 노래방에 가면 멋도 모르고 까불면서 부르는  '군바리 230' ㅡ 펑크 정신만큼은 앨범을 통틀어 최고다 ㅡ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각주:2]에라도 나와야 어울릴 자연 속 사나이의 외로운 오디세이를 노래하는 '탈출기 (바람의 계곡을 넘어…)' 등 주옥 같은 트랙들이 앨범 후반부를 장식한다.
'탈출기' 같은 노래를 듣고 있으면 크라잉 넛은 곡의 영감을 대체 어디서 받아오는 건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형님들, 형님들은 대체 그 세기 말에[각주:3] 무슨 음악을 듣고,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영화를 보고, 무슨 술을 먹었으며 무슨 여자를 만나 무슨 삶을 살았나요?

'벗어'는 뭔가 다 벗어버리고 속에 감춰진 진실한 모습을 보자는 메시지의 펑크 트랙.
'브로드웨이 AM 03:00'은 무슨 되도 안 되는 나레이션으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주는 깨알 같은 재즈인데, 그냥 듣기에도 무난할 뿐만 아니라 1990년대가 아니었으면 태어날 수 없었을 손발 퇴갤의 나레이션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트랙이니 클립을 첨부해둔다.
진짜 노래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웃길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
수준급의 연주가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아 노래에 실린 가사가 진정한 진지함의 발로였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나, 판단은 각자의 몫에 맡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S.F (Science Fiction)'은 또 어떤가.
이건 뭐 시작하자마자 웃음이 빵빵 터진다.
진지하고자 하는 장고(長考)가 얼마나 거대한 악수(惡手)로 이어질 수 있는가 여실히 보여주는 트랙이다.
2012년을 살아가는 크라잉과 너트에게 이 트랙을 다시 들려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으으, 생각만 해도 주먹이 꽉 쥐어진다.
억지스럽게 맞춘 가사만 아니라면 대한민국 인더스트리얼 장르의 막을 연 개벽의 트랙이라는 평을 내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정통 펑크 '빨대맨' ㅡ 나는 처음에 이 노래 가사가 fight man인 줄 알았다. 의도한 바였을까? ㅡ 이 나오고, 제목만 들으면 끝에 아쉬움 없이 달리는 트랙일 것 같지만 사실은 달달한 포크에 불과한 '게릴라성 집중 호우'를 끝으로 앨범이 끝난다.

당연히 지금 확답을 내릴 순 없는 노릇이지만 어떤 앨범이 이 정도의 다양성에 이 정도 완성도를 자랑한다면 ㅡ 굵직굵직한 트랙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밍숭맹숭하게 언급하거나 다소 비꼬는 식으로 말하고 넘어간 트랙들도 막상 들으면 미천한 글 재주에 큰 영감을 줄 수 있는 화수분 같은 녀석들인 경우가 많다 ㅡ 다음 앨범에서는 한 번 크게 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밴드가 정력을 쏟아부은 앨범의 차기 앨범은 아무래도 이기적인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렵고, 설령 비슷한 퀄리티의 앨범을 내놓았다 하더라도 기대의 관성에 의해 실망스러운 느낌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쩍 3집의 트랙 리스트를 봤다.
아니 근데 세상에!
세기의 명곡 '밤이 깊었네'를 포함하여 고등학교 밴드에서 만족스럽게 커버했던 '지독한 노래', 블로그 초창기에 소개한 적이 있던 '몰랐어' 등이 떡하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대체 이 울부짖는 땅콩의 숨겨진 내공은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단 말인가.

조용히 2집 <서커스 매직 유랑단>을 사둬야 할 음반 목록에 적어두고 3집을 들으러 간다.
이 위대한 밴드의 음악을 지금이라도 이렇게 듣고 있게 된 것이 참 다행이다. 
  1. 매직 서커스 유랑단이 아니다. [본문으로]
  2. 1집의 평을 쓸 때 맨 마지막 트랙 '싸나이'에 대해서도 세르지오 레오네의 이름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본문으로]
  3. 2집 <서커스 매직 유랑단>의 발매년도는 1999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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