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폴즈의 첫 내한이라는 것을 간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을 시점에 친구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해에 뭉쳤다는 소식을 들은, 그러나 아직 그 결과물까지 듣지는 않은 벤 폴즈 파이브가 다시 한 번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 하지만 시규어 로스 내한 예매의 빈곤함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통장 잔고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그들의 공연을 거부했다. 사실 벤 폴즈의 공연을 이미 한 번 봤기 때문에, 그리고 만약 내가 벤 폴즈 파이브의 내한을 보기로 결정했을 경우 그 근처의 일정이 완전히 개판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에 큰 망설임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운명 같은 일인지, 그저 장난 삼아 해본 페이스북 이벤트를 통해 나는 이들 공연의 표를 공짜로 두 장 얻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운명의 장난과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다.
공짜 티켓치고 이 정도면 꽤나 괜찮은 뷰였다고 본다.
라고는 했지만 사실 별 이야기는 없다. 그 날 나의 일정은, 우선 아침 6시까지 술을 먹다가 방에 들어갔고 두 시간 뒤에 일어나 짐 정리를 시작하고 아침을 먹었으며 약 정오 무렵부터 방 이사를 시작, 오후 2시쯤 되어서 이사를 마쳤고 그 때서야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가 강변행 고속 버스를 타고 약 2시간 뒤 강변역에 내려 열심히 지하철을 갈아타 광나루역에 도착, 근처에 있던 설렁탕 집에서 설렁탕 한 사발을 먹고 같이 공연을 보기로 한 친구를 만나 공연을 보고 왕십리에서 곱창과 청하로 뒷풀이를 한 뒤 집에 돌아가 새벽 세 시까지 글을 쓰고 잠에 든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미 지난 앨범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공연의 주가 된 벤 폴즈 파이브의 신보는 고작 2시간, 많아봐야 3시간 남짓 건성으로 들은 것이 전부요, 벤 폴즈 파이브의 옛 곡에 대한 복습 따위는 전혀 없었다. 누군가의 내한 공연에 이렇게 무방비된 자세로 가본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이 모든 것이 다 "공짜"에서 유래한 안이함이라 할 수 있겠다.
거의 공연 시작 시각에 맞춰 도착한 나는 서둘러 매표소로 가 이벤트 티켓을 발급 받았는데 그 결과는 충격 그 자체.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늦은 새벽까지 글을 쓸 요량으로 가방에 랩탑이다 뭐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내게 유니클로는, 그 지독한 제국주의적 글로벌 의류 기업 유니클로는 꼴랑 스탠딩 티켓 두 장을 던져줄 뿐이었다. 2007년 뮤즈의 첫 내한 공연 이후 첫 스탠딩 공연이었다. 다시는 스탠딩 공연을 보지 않기로 마음 먹은 내게, 그리고 이미 그 전부터 무릎이 안 좋다며 ㅡ 그럼에도 높은 하이힐을 신고 온 ㅡ 내 공연 메이트에게 이는 정말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공짜로 주는 밥 가지고 양념이 어떻게 간이 어떻네 운운할 것이 아니다. 잠시 사물함 같은 곳에 내 백팩이라도 맡길까 고민했지만 이곳저곳에서 정시 공연 시작을 강조하는 스태프들 덕에 마음이 급해진 나는 곧바로 공연장에 입장했다. 공연장은 2년 전 벤 폴즈의 공연이 있었던 악스홀이었다. 2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니클로 악스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
정말 6시 정시에 시작한 공연은 약 두 시간여 동안 매우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셋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Michael Praytor, Five Years Later
2. Jackson Cannery
3. Hold That Thought
4. Selfless, Cold and Composed
5. Erase Me
6. Improv 1 (Robert broke a bass string)
7. Theme From Dr. Pyser (fan request)
8. Improv 2 (Robert replaced a bass guitar)
9. Landed
10. Sky High
11. Missing the War
12. Battle of Who Could Care Less
13. Draw A Crowd
14. Thank You for Breaking My Heart
15. Brick
16. Emaline (fan request)
17. Philosophy
18. Kate
19. Improv 3 - Eye of the Tiger (Survivor cover) (fan request)
19. Do It Anyway
20. Improv 4 (Audience threw a couple of … more)
21. Alice Childress
22. Underground
23. Song for the Dumped
24. Army
Encore:
25. One Angry Dwarf and 200 Solemn Faces (with Younha)
26. Uncle Walter
애드립의 황제답게 중간 중간 팬들의 반응과 상황에 맞춰 훌륭한 잼을 선보였는데, 역시 그 중 가장 돋보였던 것이 위 셋리스트에서 6~8번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Erase me"의 공연 도중 끊어진 로버트 슬레지의 베이스 줄을 소재로, 세 명의 노련한 드립 중년은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점진적으로 곡의 흐름을 심화했고 급기야는 이 날 공연곡을 모두 통틀어 가장 자유분방한 곡인 "Theme from Dr. Pyser"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그들의 애드립이 사전에 어느 정도 조율이 되어 있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웠으며 한편으로는 전위적이기까지 했던 대목.
콘트라베이스와 전자음 잔뜩 섞인 신디까지 동원해 다양한 사운드를 내려고 노력했던 이들의 공연은 정규곡 마지막 부분인 21~24번쯤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벤 폴즈 파이브 시절의 노래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트랙들이 총출동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아래의 유튜브 클립은 벤 폴즈의 공연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빼놓을 수 없는 곡 "Army"의 영상이다.
이미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등장을 예고한 윤하는 앵콜 스테이지 첫 곡인 "One angry dwarf and 200 solemn faces"의 도입부에 등장, 벤 폴즈와 피아노 반주를 주고 받으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참 맘에 들었던 점은 그 존재감이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았다는 점.
Can Korean fans identify tonight's mystery guest? twitter.com/BenFolds/statu…
— benjamin folds (@BenFolds) February 24, 2013
정시에 시작한 공연은 공연장에 있던 모든 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시간에 정리가 되었고 무릎에 큰 통증을 느끼던 공연 메이트와 어개 근육이 슬슬 뭉쳐올 것 같았던 나는 잽싸게 공연장을 빠져나와 맛있는 곱창이 기다리던 약속의 땅 왕십리로 향했다. 공연장을 빠져나온 뒤로 공연에 대한 이야기라고는 거의 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에서 감상평을 정리하면 될 것 같은 느낌. 1
그의 유쾌한 에너지는 어떤 조합으로든 비슷한 수준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는 점과 벤 폴즈 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의외로 재즈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악스홀의 공연 시설은 아직까지 국내 최고라는 점 등은 이처럼 한 문장으로 짧게 풀어써도 될 만한 이야기이므로 이렇게 한 문장으로만 적어놓고 넘어간다. 이번 벤 폴즈 파이브의 공연은 내가 여태까지 봤던 내한 공연 중
1.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봤던 공연
2. 가장 복습을 하지 않고 갔던 공연
3. 가장 정시에 맞춰 시작했던 공연
4. 가장 뒷이야기가 없었던 공연
5. 가장 공연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공연 감상평을 쓰게 된 공연
이었다. 낮에 이 글의 초안을 쓰고 있을 때 이 날의 공연 메이트에게 물리치료 받는 사진이 "벤 폴즈 공연의 후유증"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날라왔다는 훈훈한 소식과 함께 글을 마친다. 피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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