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중간에 좀 잤다. 내가 공연을 대비해서 들었던 앨범은 《Takk》이 전부였는데 귀에 익숙한 트랙이 들려오면 ㅡ 그것조차 내가 들었기 때문에 익숙한 건지, 아니면 내가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익숙하게 느껴졌던 건지 확실하지가 않다 ㅡ 조금 들어볼 만했으나 그렇지 않은 트랙은 영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셋리스트는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스케일이 생각보다 컸기 때문에 소리는 빵빵하니 듣기가 좋았다. 연주나 소리 셋팅에 있어서 귀에 거슬리는 점은 전혀 없었다.
연출: 솔직히 말해서 내가 시규어 로스의 공연을 보게 된 이유는 이들의 무대 연출 자체가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벌써 본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1콜드플레이 공연의 기억은 내게 음악 공연이란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과연 무대 연출이 음악 공연에 있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지 "확실히" 느끼기 위해서 나는 약간 일부러 이들의 음악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다른 라이브 무대 영상 또한 전혀 찾아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에서 과연 사람들이 말하던 그 뛰어난 무대 연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갔다. 이 정도면 콘서트를 들으러 갔다기보다는 콘서트를 보러 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그리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우선 내 저질스러운 전화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몇 장 업로드한다.
불교에서 내려오는 말 중에 치지재월(置指在月)이라는 말이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을 본다는, 살면서 어디에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던 바로 그 말이다. 나는 시규어 로스의 공연을 보면서 이런 연출이야말로 관객들이 손가락보다 달을 쳐다볼 수 있게 하는 최적의 연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대개 무대 자체를 하이라이트하는 조명과는 달리, 이들은 초반에는 스크린에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조명을(위 사진 두 장을 참고하면 되겠다.), 중후반에는 무대의 뒷편에서 관객석을 향해 뻗어나오는 밝은 조명을(맨 마지막 사진의 느낌.) 사용했다. 물론 중간 중간에 무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조명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 날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의 의도가 관객들의 시선을 무대 위 그 자체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것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2
콘서트를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대 위의 사람들에게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게 뮤지션에게 먼저 집중을 한 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2차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 이것이 보통의 관객들이 보통의 콘서트에서 집중을 하는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시규어 로스의 무대는 그런 보통의 것들과는 분명히 차별화가 되어 있었다. 이들의 연출은 철저히 무대를 배제시켰고 관객들에게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의도한 다른 정보(예를 들어 오로라 빛 조명 등)에 흠뻑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많은 밴드가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킬 때 작위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하이라이트하는 식이라면, 시규어 로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달로 이끈다.
덕내를 조금 내면서 다른 예를 들자면 이는 캐리어 파워가 제거된 억압 반송파 진폭 변조(Suppressed carrier amplitude modulation)의 방식과 비슷한 느낌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그 정보를 전달하는 것 자체의 부담은 완벽히 덜고, 오로지 순수한 정보만을 전달하는 것. 시규어 로스의 공연 연출은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감동은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다.
총평: 다소 비쌌던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공연이었다. 콘서트에서 무대 연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공연 뒤의 만족도만을 놓고 봤을 때 음악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곡의 영상을 올리면서 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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