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헌팅턴의 저 유명한 '문명의 충돌'을 읽은 것이 올해 초.
당시 내가 적어놓은 짧은 평과 지금 내가 이 책에 대해 늘어놓을 말을 살펴보며 이 반년 사이에 나의 가치관, 세계관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문명의 충돌'을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인문 서적'이라고 평하며 '각 문명 간의 대립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의 견지에서,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적어놨다.
다수의 현자들은 그럴 리 없겠지만, '문명의 충돌'을 읽은 사람 중 최소한 몇몇은 저 짧은 문장에서 어떠한 어설픔도 느끼지 못하리라.
마치 당시의 나처럼 말이다.
하지만 새뮤얼 헌팅턴의 책은 그렇게 간단하게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할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문명의 충돌'은 세계적인 갈등의 정세를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그런 방법을 제시함과 동시에 문명의 충돌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정당화의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편향된 자료를 인용하고,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 같은 애매한 중립을 취한다.
그러나 그 휘장을 거두고,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다 없애고 보면 결국 '우리는 이렇고, 너희는 그러니까 당연히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이다.
2011년 1월의 나는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보면 자명해보이는, 하지만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충분히 헛소리임을 알 수 있는 그 힘의 논리에 대해 '상당한 신빙성을 가'졌다고 평했다.
'문명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헌팅턴의 논리가 지니는 그 태생적인 결점은 인터넷에서 간단한 검색을 통해 알아볼 수 있으므로 계속 이어봐야 나의 부족할 것이 뻔한 주장은 더 이상 피력하지 않으려한다.
나에게 그렇게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노암 촘스키다.
촘스키라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어떻게 한 사람의 사고 방법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촘스키에 관한 아주 훌륭한 책인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시리즈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은 그가 '문명의 충돌'에서 보여준 시각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구성은 차례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만큼 명료하고 직설적이다.
'I. 정체성 문제' - 'II. 미국의 정체성' - 'III.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 - 'IV. 미국의 정체성 회복하기'.
당연히 첫 장에서는 간단한 미국의 현황, 즉 세계화의 물결 속에 침식되어가는 국가 미국의 정체성을 논하고 바로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탐구한다.
정체성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각각의 특성은 또 무엇인지, 하버드의 교수다운 훌륭한 분석을 보여준다. 1
'미국의 정체성'에서는 말 그대로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WASP라고 불리는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앵글로색슨계 백인 프로테스탄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의 중심이라는 것이 핵심.
WASP는 이 책의 원제인 'Who Are We?'의 'we'에 들어갈 수 있는 전제적인 조건으로 이런 글은 그런 논리의 편협함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2
그는 WASP라는 단어에서 바로 도출되는 미국의 정체성의 두 가지 주요 요소인 인종과 종교, 그리고 그에 곁다리로 딸리는 언어와 기타 몇 가지의 것들을 미국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때로는 은근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WASP 위주의 문화로 회귀하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새뮤얼 헌팅턴이 보수적인 정치사회학자라는 평을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3
그 외에도 미국의 '독특한' 노동 윤리라고 포장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든지, 대표적인 네오콘 계열의 사람들의 자료나 발언을 인용한다든지 하는 부분에서도 그의 보수적이 성향은 여지없이 드러나는 바이다.
어쨌든 두 번째 장의 내용은 미국의 국가 정체성이 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장인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에서 본격적으로 그 원인에 대해서 다룬다.
미국의 원조 문화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각종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본래의 정체성을 찾자는 어조는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헌팅턴은 일부 엘리트들이 초 국가적 정체성을 주장하며 단순 국가 정체성을 흐리는 여론을 이끌고, 각종 이민 때문에 초래되는 다문화 교육이 미국인 공통의 가치와 문화 교육을 희생하는 현실에 제동을 건다.
특히 인종이나 언어에 관한 문제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멕시칸 이민과 그에 따른 미국 남부의 히스패닉화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입장을 취한다.
다음과 같이 극단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는 것을 보자.
종교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이젠 고인이 된 빈 라덴과 2001년 9월 11일의 일을 언급하며 긍정적 전쟁 ㅡ 인종 차별과 분리주의를 비롯한 모든 차이가 줄어들고 국가적 단결이 확대된다는 의미 ㅡ 과 부정적 평화라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미국의 끊임없는 '적 찾기'에 관한 부분은 노암 촘스키가 주장하는 바와 별반 다를게 없다.
마지막 장 '미국의 정체성 회복하기'는 우리가 보통 하는 말로 '제곧내'다.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말이다.
WASP로 대동단결하자는 이야기가 위주.
오랜만에 다소 전문적인 인문 서적을 읽으며 느끼는 점이 꽤 있었다.
다양한 출신의 미국인들과 몸소 생활하면서 얻은 직접적 경험에, 내 취향에 맞든 맞지 않든 어쨌든 전문가의 분석이 곁들여졌기 때문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태도는 초 국가적인 입장에서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만 단순히 한 나라의 주류를 이루는 국민으로서 국가 정체성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바, 요새 주변에서 '다문화'라는 어휘와 자주 어울리는 한국 사회의 변화 상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4
여전히 기준을 잡는 데엔 어설프지만 어떤 학자의 성향을 판단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다.
가치관의 진정한 중용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관점의 글을 읽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그 과정에서는 때로 나와는 반대되는 입장의 글을 읽는 것도 불가피하다.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은 그런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이었다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나의 짧은 평.
당시 내가 적어놓은 짧은 평과 지금 내가 이 책에 대해 늘어놓을 말을 살펴보며 이 반년 사이에 나의 가치관, 세계관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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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명의 충돌'을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인문 서적'이라고 평하며 '각 문명 간의 대립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의 견지에서,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적어놨다.
다수의 현자들은 그럴 리 없겠지만, '문명의 충돌'을 읽은 사람 중 최소한 몇몇은 저 짧은 문장에서 어떠한 어설픔도 느끼지 못하리라.
마치 당시의 나처럼 말이다.
하지만 새뮤얼 헌팅턴의 책은 그렇게 간단하게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할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문명의 충돌'은 세계적인 갈등의 정세를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그런 방법을 제시함과 동시에 문명의 충돌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정당화의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편향된 자료를 인용하고,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 같은 애매한 중립을 취한다.
그러나 그 휘장을 거두고,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다 없애고 보면 결국 '우리는 이렇고, 너희는 그러니까 당연히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이다.
2011년 1월의 나는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보면 자명해보이는, 하지만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충분히 헛소리임을 알 수 있는 그 힘의 논리에 대해 '상당한 신빙성을 가'졌다고 평했다.
'문명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헌팅턴의 논리가 지니는 그 태생적인 결점은 인터넷에서 간단한 검색을 통해 알아볼 수 있으므로 계속 이어봐야 나의 부족할 것이 뻔한 주장은 더 이상 피력하지 않으려한다.
비일상적인 힘의 논리도 존재하기는 한다.
나에게 그렇게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노암 촘스키다.
촘스키라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어떻게 한 사람의 사고 방법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촘스키에 관한 아주 훌륭한 책인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시리즈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은 그가 '문명의 충돌'에서 보여준 시각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구성은 차례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만큼 명료하고 직설적이다.
'I. 정체성 문제' - 'II. 미국의 정체성' - 'III.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 - 'IV. 미국의 정체성 회복하기'.
당연히 첫 장에서는 간단한 미국의 현황, 즉 세계화의 물결 속에 침식되어가는 국가 미국의 정체성을 논하고 바로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탐구한다.
정체성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각각의 특성은 또 무엇인지, 하버드의 교수다운 훌륭한 분석을 보여준다. 1
'미국의 정체성'에서는 말 그대로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WASP라고 불리는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앵글로색슨계 백인 프로테스탄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의 중심이라는 것이 핵심.
WASP는 이 책의 원제인 'Who Are We?'의 'we'에 들어갈 수 있는 전제적인 조건으로 이런 글은 그런 논리의 편협함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2
그는 WASP라는 단어에서 바로 도출되는 미국의 정체성의 두 가지 주요 요소인 인종과 종교, 그리고 그에 곁다리로 딸리는 언어와 기타 몇 가지의 것들을 미국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때로는 은근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WASP 위주의 문화로 회귀하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새뮤얼 헌팅턴이 보수적인 정치사회학자라는 평을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3
그 외에도 미국의 '독특한' 노동 윤리라고 포장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든지, 대표적인 네오콘 계열의 사람들의 자료나 발언을 인용한다든지 하는 부분에서도 그의 보수적이 성향은 여지없이 드러나는 바이다.
어쨌든 두 번째 장의 내용은 미국의 국가 정체성이 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장인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에서 본격적으로 그 원인에 대해서 다룬다.
미국의 원조 문화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각종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본래의 정체성을 찾자는 어조는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헌팅턴은 일부 엘리트들이 초 국가적 정체성을 주장하며 단순 국가 정체성을 흐리는 여론을 이끌고, 각종 이민 때문에 초래되는 다문화 교육이 미국인 공통의 가치와 문화 교육을 희생하는 현실에 제동을 건다.
특히 인종이나 언어에 관한 문제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멕시칸 이민과 그에 따른 미국 남부의 히스패닉화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입장을 취한다.
다음과 같이 극단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는 것을 보자.
미국에서 이민과 동화에 멕시코가 갖는 중심성은 이런 가정을 해볼 때 한층 더 분명해진다. 즉, 앞으로도 다른 이민들은 전처럼 계속되지만 멕시칸 이민은 갑자기 중단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합법 이민자들의 수는 16만 명 정도 줄어들 것이고, 그래서 조던 위원회가 권장하는 수준에 근접하게 될 것이다. 불법 입국은 극적으로 줄어들 것이고, 미국 내 불법 이민자의 전체 숫자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남서부의 농업과 그밖의 사업들은 타격을 받겠지만, 저소득층 미국인들의 임금은 개선될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어의 사용과 영어의 공식화에 대한 논란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이중언어 교육과 그것에 관련된 논쟁도 줄어들 것이다. 또 이민자들에 대한 복지 혜택에 대한 논쟁도 종식될 것이다. 이민자들이 주와 연방 정부에 경제적 짐이 되는지의 논란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으로 해소될 것이다. 미국에 있는 이민자들과 계속해서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교육 수준과 숙련성 정도는 미국 역사에서 전례없이 높아질 것이다. 이민자들의 유입은 다시 높은 다양성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면 모든 이민자들이 영어를 배우고 미국 문화를 수용할 동기는 높아질 것이다. 압도적으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미국과 압도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으로 사실상 갈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며, 그에 따라 미국의 문화적, 정치적 통합에 잠재적으로 위협이 되는 주요 요인도 사라질 것이다.
종교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이젠 고인이 된 빈 라덴과 2001년 9월 11일의 일을 언급하며 긍정적 전쟁 ㅡ 인종 차별과 분리주의를 비롯한 모든 차이가 줄어들고 국가적 단결이 확대된다는 의미 ㅡ 과 부정적 평화라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미국의 끊임없는 '적 찾기'에 관한 부분은 노암 촘스키가 주장하는 바와 별반 다를게 없다.
만일 전쟁이 (적어도 일부 상황에서) 이와 같은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면, 평화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들을 초래할까? 사회학 이론들과 역사적 증거들은 외부의 적이나 남이 없을 때 내부의 분열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냉전의 종식이 다른 나라들에서도 그랬듯이 미국에서도 하부국가적 정체성들의 매력을 높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외부의 심각한 위협이 없을 때, 강력한 국가 정부와 통일된 국가의 필요성은 줄어든다. 1994년에 두 학자가 경고했듯이, 냉전의 종식은 국가의 정치적 단결력을 저해하고 민족적, 분파적 분열을 촉진할 것이며 내부의 사회 평등과 복지를 어렵게 하고 계급 갈등을 자극할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1996년에 폴 피터슨 교수는 냉전의 종식이 무엇보다 국가 이익의 한층 더 애매한 개념, 국가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의지의 감소, 정부에 대한 신뢰 하락, 도덕적 헌신의 약화, 그리고 경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필요성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외부의 적이 없는 상황에서는 개인의 자기 이익이 국가에 대한 헌신보다 앞선다. 계속해서 피터슨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는 말은 국가가 더 이상 악에게서 선을 보호하지 않는 시기에는 고루한 것, 즉 국수주의적인 것으로 들린다."
마지막 장 '미국의 정체성 회복하기'는 우리가 보통 하는 말로 '제곧내'다.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말이다.
WASP로 대동단결하자는 이야기가 위주.
오랜만에 다소 전문적인 인문 서적을 읽으며 느끼는 점이 꽤 있었다.
다양한 출신의 미국인들과 몸소 생활하면서 얻은 직접적 경험에, 내 취향에 맞든 맞지 않든 어쨌든 전문가의 분석이 곁들여졌기 때문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태도는 초 국가적인 입장에서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만 단순히 한 나라의 주류를 이루는 국민으로서 국가 정체성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바, 요새 주변에서 '다문화'라는 어휘와 자주 어울리는 한국 사회의 변화 상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4
여전히 기준을 잡는 데엔 어설프지만 어떤 학자의 성향을 판단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다.
가치관의 진정한 중용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관점의 글을 읽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그 과정에서는 때로 나와는 반대되는 입장의 글을 읽는 것도 불가피하다.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은 그런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이었다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나의 짧은 평.
- 내가 비판하던 것은 그의 논리의 전개 방향이지 그의 학자적인 역량이 아니다. [본문으로]
- 누르자마자 영어가 잔뜩 떠서 긴장한 사람을 위해 간략히 줄이자면 헌팅턴의 '우리'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아니라는 것. 결국 미국인의 입장에서, 우리들의 미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미국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정말 이 책을 혹평한다. [본문으로]
- '문명의 충돌'을 읽을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사항이다. 이는 '문명의 충돌'이 보수적으로 쓰여졌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지금보다 덜 진보적이었거나 아니면 단순히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을 따질만한 식견이 없었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 WASP가 미국의 정체성을 이뤘고, 현재도 이루고 있고 앞으로도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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