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에 대하여

| 2011. 12. 28. 12:07

어렸을 적 나는,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면, 수불석권의 사내였다.

손에서 책이 떨어지다

책을 읽다 잠든 아이 손에서
책이 스르르 떨어진다.

수불석권(手不釋卷)하는 아이이다 보니
잠든 아이 손에서 풀려나
제멋대로 뒹구는 책이 자유로워 보인다.

지식이 즐거워 책에 파묻혀 지내는 아이를
대견히 바라보는 이도 많지만

때로는 책을 읽다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열 권의 책에 담긴 지식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식보다 소중한 것이 더 많은 세상이다.
아이 옆에 뒹구는 책도 잠이 든다.
잠든 아이 표정도 평화롭다.

하지만 내가 커감에 따라, 나의 잠든 표정이 점점 평화롭지 않게 되어감에 따라 책은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책이 내 손을 벗어나 자신의 자유를 찾아 떠난 이유를 대한민국의 기이한 입시 준비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다 흘리는 눈물 한 방울"보다 "열 권의 책에 담긴 지식" ㅡ 물론 후자의 책은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책이라기보다 참고서나 문제집 같은, 형태만 책(冊)이고 내용은 책(責) 또는 책(策)인 녀석들이다 ㅡ 의 가치를 추구했다.

내용은 여신, 형태는 하찮은 몸뚱아리.


그래도 나는 되도록이면 꾸준히 책(冊)을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간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대신 매일 매일 몇 페이지라도 한 책을 붙잡고 보는 습관을 길렀다.
그렇게 읽은 책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 ㅡ 그 당시까지 나온 책 전부를 다 읽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안정효의 '하얀 전쟁',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몇 권 따위.

대학교에 와서도 나의 빈곤한 독서력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머리가 좀 커진 나는 그 머리에 마음의 양식을 채우기는 커녕 각종 C2H5OH와 C10H14N2를 꾸역꾸역 쌓았고 그렇게 쌓인 녀석들은 나를 말초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도 나의 독서는 또 다른 장점을 어렵사리 살려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책을 읽었다면 몇 줄이든 몇 단어든 무엇이든 상관이 없으니 그것에 대한 나의 기억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제는 거의 파르테논 신전의 을씨년스러움만이 풍기는 나의 미니홈피를 참조하면, 내가 처음으로 책을 읽고 그 흔적을 남긴 것은 2007년 6월의 일이고, 그 대상은 김용 원작의 '사조영웅전' 만화책이었다.
글자는 하나도 없고 달랑 인상 깊었던 장면을 하나 사진첩에 올려놓았더랬다.
그 다음으로 올라온 것은 'I's'이고, 나는 거기에 "단순한 오덕거림은 아니다"라는 한 문장짜리 평을 남겼다.
그 다음은 '은하영웅전설'인데 나름 몇 문장의 평을 썼다.

핸드폰으로 눈알 빠지게 본 소설
괴작?이라는 말은 어째서 붙은건지 모르겠지만 대작은 대작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따위가 DIY제품을 사서 잘 조립한 경우라고 하면 은영전은 직접 나무부터 잘라와서 시작했다고나 할까..

어떤 사람들은 삼국지와 이 작품을 비교하던데 전체적인 흐름이 삼국지와는 사뭇 다른것 같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잘 그려냈고, 끝까지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들을 잘 선정했다

어쨌든 천재의(? 단 한 작품으로 이런 평을 내리긴 좀 뭐하지만) 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인듯

추천

그 다음은 '반항하지마'와 '슬램덩크'가 차례로 올라왔고, 뒤이어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의 평이 올라와 있다.

어렵다. 책 안의 내용을 그대로 흡수하기에 나의 인문교양적 지식은 배가 고프다는 소리만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책의 흐름만 파악하고 있었다면 8번째 회상이자 마지막 회상인 부분을 읽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마지막 부분을 위해서라도 이 책을 한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 다들

▒ 왜냐하면 그녀는 치마폭 가득히 꽃잎을 따서 모았다가 다시 아낌없이 잔디위에 뿌려버리는 아이처럼 자기의 생각을 무심히 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은 그녀처럼 내 마음을 모두 보여줄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내 마음을 무겁고 우울하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항상 자기의 마음을 다 내보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런 것을 예의니 점잖은 태도니 체면이니 현명함이니 생활의 지혜니 하고 부름으로써 우리의 생활 전체를 가장무도회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습관에 물들어 있으면서 자기의 진실되고 참된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문 법이다.
심지어 사랑을 하면서도 자기가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입을 다물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을 꺼려, 자유로이 인사하고 서로 마주보며 자기를 내보여야 할 때조차도 시인의 상투어를 빌어 떠들어대고 한숨을 쉬고 아첨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나도 될수만 있다면 솔직하게 내 마음을 다 털어놓으면서 그녀에게 당신은 나를 잘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맞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막스 뮐러는 이와 같은 사람과 지냄으로써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까
내게 이런 말벗은 없는건지 곰곰히 생각해 볼만한 시간

여기서 또 한 번의 중대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데, 우선 어떤 책을 읽고 1차적으로 느끼는 감상을 넘어 2차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이 1번이고, 2번은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찾아 그것을 인용하는 것이다.
마지막 긍정적[각주:1] 조짐을 찾자면 학교 수업을 듣는 도중 어쩔 수 없이 읽어야만 했던 '총, 균, 쇠'를 통해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같은 석학의 책을 읽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는 것, 리더십 수업에서 알게 된 '생각의 탄생'을 읽다가 리처드 파인만과 버트런드 러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 영어 문법 구조 수업을 들으면서 노암 촘스키를 알게 되었고 그의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었다는 것 정도랄까.

내가 본격적으로 책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2010년 8월부터의 일이다.
제대로 된 활자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환경,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사색밖에 없었던 그 환경에서 2달을 보내면서 나는 내 사고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 무한한 거리를 나아갈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의 사고는 자기가 자신의 뒤꽁무니를 물려는 무한 후퇴에 빠지거나 더 이상 논의를 심화할 수 없는 그 경계까지 이르러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내가 제대로 된 활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독서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 2달 동안 참아왔던 ㅡ 어쩌면 십수년 동안 억눌려 있던 ㅡ 나의 욕구는 콸콸 넘쳐 흘렀고, 나는 다독의 세계로 빠졌다.

초반에는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난폭하게 읽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읽은 책의 양이 어느 정도 되자 책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책을 보는 안목이 생기자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나만의 독서 원칙과 계획도 생기게 되더라.

내가 읽는 책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당위성의 성질이 짙게 깔린 것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보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르는 책이다.
두 번째는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흥미와 취향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내가 좋아하는 특정 인물이 쓴, 또는 그 인물에 관한 책이다.
세 번째 부류는 1번과 2번의 혼합형으로, 어떤 책을 읽다가 언급된 책 중 당위성과 관심이 적절히 섞인 결과 고르게 되는 책이다.
마지막은 앞의 세 부류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냥 아무 지인이나 추천해 주는 책이다.

읽을 책을 이런 식으로 고르면 그 책들을 읽는 계획도 세워야 하는 법.
나는 큰 두 가지 원칙에 따라 독서 계획을 세우는데, 첫 번째는 문학과 비문학을 번갈아가면서 읽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같은 성향의 책이나 같은 작가의 책을 한 번에 몰아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의견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하나의 전문 분야를 몰두해서 파고 그렇게 관심 분야를 다른 방향으로 옮겨가며 나의 식견을 넓히는 것보다 조금씩 조금씩 다양한 분야를 두루 접하는 것이 더 포괄적인 태도를 지니는데 도움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에 책을 읽은 뒤 무엇에 관한 것이든 좋으니 그 책을 읽었다는 기록을 남겨두는 피가학적 행위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확실히 그런 글을 남겼을 때가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기억이 오래 남는 편이다.
그리고 평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 검색을 통해 책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이는 꼭 도서뿐만 아니라 내가 평을 남기는 다른 매체들인 영화와 음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

다음에는 "나의 독서"가 아닌 "독서"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훠얼씬 더어 마아않은 독서가 필요하니까 언제 그런 글을 쓰게 될지는 기약이 없다.

  1. 이 마지막 조짐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내 독서 습관을 형성했다기보다 취향을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나의 입장에서 돌이켜봤을 때 "긍정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