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5일 한가한 토요일 오후에 컵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숙소로 돌아갔다.
잘 오지 않는 잠을 재촉했다.
그 날도 지난 주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밤 근무를 서야 했기 때문이다.
나가야 할 시간에 숙소를 나서 일행과 함께 깜밥집에 들렀다.
그 날은 아마 치즈가 들어간 부대찌개를 먹었을 것이다.
앞으로 동두천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 4번이었고 밤 근무를 같이 서는 인원은 3명이었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저녁을 사고 마지막 밤에는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첫 날 돈을 내는 당번은 나였고 내가 깜밥집에서 결제를 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저녁은 내가 지난 번에 혼자 갔던 진미옥 설렁탕에서 먹기로 했다.
내가 혼자 다녀온 뒤에 사람들에게 호평을 했는데 그것에 사람들이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셋이서 6,000원짜리 설렁탕 세 그릇을 시켰다.
거의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후루룹 먹기만 했다.
같이 간 일행은 진미옥 설렁탕에 나의 예상보다 더 좋은 평을 내렸다.
대충 화요일 밤에 있을 최후의 만찬의 장소가 정해진 셈이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밤에는 중국집 라이라이에 갔다.
나는 짬뽕을 시켰고 지난 번에 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릇에는 홍합의 산이 나를 반겼다.
맛있게 먹고 나와 밤 근무를 섰다.
아침에 숙소로 돌아가 열심히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니 드디어 11월 8일 화요일 오후, 내가 동두천에서 머물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밤 근무를 서는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숙소를 떠나기로 했고 일어나자마자 3주간 퍼질러 놓았던 짐부터 정리했다.
매트에서 시트를 걷고 침낭을 챙기고 빨래할 것들도 모조리 배낭에 챙겼다.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돌아와 간단하게 씻을 짐만 따로 챙겨두었다.
대학교 시절, 나는 여름 방학 때는 항상 대전에서 보냈지만 겨울 방학에는 매 번 집에 올라왔다.
따라서 겨울 퇴사 기간이 되어 기숙사의 짐을 싸는 것은 나의 연례 행사였는데, 그렇게 싸놓은 짐을 보면 항상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동두천에서 보낸 날은 기간으로 따져서 채 3주가 안 되었고 서울에 있었던 날을 빼면 딱 2주쯤이 되었을텐데 그 기간이 꽤나 짧았던 것을 고려하면 방 한 켠에 우두커니 서있던 배낭들을 보고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괜한 사치였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사람이 감성을 컨트롤하는 것은 그 감성 자체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성이 겉으로 표현되지 않게끔 이성으로 꾹꾹 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는 수밖에.
이미 지난 일요일에 최후의 만찬 장소는 진미옥 설렁탕으로 암묵적으로 정했다.
보산역 근처의 익숙한 밤 풍경을 눈에 담으며 구 시내로 걸어갔다.
이제는 완전히 길을 익힌 덕에 15분 정도 걸어 진미옥 설렁탕에 도착했고 우리는 마지막 식사의 의미를 기리며 평소와는 다르게 특탕을 주문하기로 했다.
주문하기 전에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특탕과 그냥 탕의 차이를 물었다.
특탕은 고기의 양이 더 많다는 것이다.
원래 탕보다 1.5배가 비싼 만큼 양은 2배 정도는 많으리라고 생각하고 탕을 기다리는데 예상보다 적은 양의 탕이 나온 것이 아닌가.
고기의 양도 뭐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고기를 따로 찍어먹으라고 준 간장 종지 ㅡ 이는 일반 탕을 시켰을 때는 제공되지 않은 것이었다 ㅡ 가 무안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여전히 맛은 있었다.
만족스럽게 밥을 먹고 나와서 일터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동두천의 식당 이곳 저곳을 다닌 우리가 나름의 관점에서 평점을 종합해봤는데 아무래도 진미옥의 설렁탕이 단연 1등이었다.
가성비에서 압승을 거둔 라이라이와 특유의 소세지 맛이 일품이었던 호수식당이 공동 2위 정도.
그리고 첫 날 이후로는 계란말이를 주지 않았던 깜밥집이 4등이었다.
어차피 후보가 4개밖에 되지 않으므로 절대적인 순위에 크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네 식당 모두 우리의 입맛에는 괜찮은 곳이었고 우리는 그저 재미삼아 상대적인 순위를 매겨본 것뿐이다.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서울로 돌아간다고, 앞으로 잘 지내라고 짧게 인사 말을 나눈 뒤 헤어졌다.
화요일의 밤 근무는 모든 것이 끝나가는 마당이라 그런지 가장 한산했다.
나의 동두천 답사기의 초안을 손으로 쓱쓱 쓰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 짐을 꺼내 버스 터미널에 집합했다.
나의 동두천 답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 시체처럼 잠을 잤다.
아마 내가 살면서 다시 동두천이라는 도시에 갈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깜밥집도 라이라이도 진미옥 설렁탕도 모두 마지막이다.
보산역 앞 편의점의 그녀도 마지막이다.
시간이 지나면 어영부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든 말든 어떻게 어영부영 잘 살아가겠지.
미군 부대 앞의 쥬시 걸들도, 구 시내 근처에서 빨간 조명과 함께 일하는 여자들도, 지행역 앞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학생들도 알아서들 잘 살아가리라.
밤 근무에 바이오 리듬이 맞춰져 있던 나는 서울에 돌아가고 나서 바이오 리듬을 정상으로 되돌리느라 며칠을 소요했다.
동두천에서의 기억도, 나의 생활 패턴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같이 잊혀져갔다.
동두천에서 돌아온 지 3주가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있던 여러 가지 일들에 기억이 많이 퇴색되었다.
빛 바랜 그 기억을 안고 '대체 이걸 써서 어따 써먹나?'하는 회의감과 싸우며 열심히 한 자 한 자 타이핑했고 이제서야,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지 거의 1달만에 끝을 본다.
언젠가 내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글을 마친다.
잘 오지 않는 잠을 재촉했다.
그 날도 지난 주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밤 근무를 서야 했기 때문이다.
나가야 할 시간에 숙소를 나서 일행과 함께 깜밥집에 들렀다.
그 날은 아마 치즈가 들어간 부대찌개를 먹었을 것이다.
앞으로 동두천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 4번이었고 밤 근무를 같이 서는 인원은 3명이었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저녁을 사고 마지막 밤에는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첫 날 돈을 내는 당번은 나였고 내가 깜밥집에서 결제를 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저녁은 내가 지난 번에 혼자 갔던 진미옥 설렁탕에서 먹기로 했다.
내가 혼자 다녀온 뒤에 사람들에게 호평을 했는데 그것에 사람들이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셋이서 6,000원짜리 설렁탕 세 그릇을 시켰다.
거의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후루룹 먹기만 했다.
같이 간 일행은 진미옥 설렁탕에 나의 예상보다 더 좋은 평을 내렸다.
대충 화요일 밤에 있을 최후의 만찬의 장소가 정해진 셈이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밤에는 중국집 라이라이에 갔다.
나는 짬뽕을 시켰고 지난 번에 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릇에는 홍합의 산이 나를 반겼다.
맛있게 먹고 나와 밤 근무를 섰다.
아침에 숙소로 돌아가 열심히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니 드디어 11월 8일 화요일 오후, 내가 동두천에서 머물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밤 근무를 서는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숙소를 떠나기로 했고 일어나자마자 3주간 퍼질러 놓았던 짐부터 정리했다.
매트에서 시트를 걷고 침낭을 챙기고 빨래할 것들도 모조리 배낭에 챙겼다.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돌아와 간단하게 씻을 짐만 따로 챙겨두었다.
대학교 시절, 나는 여름 방학 때는 항상 대전에서 보냈지만 겨울 방학에는 매 번 집에 올라왔다.
따라서 겨울 퇴사 기간이 되어 기숙사의 짐을 싸는 것은 나의 연례 행사였는데, 그렇게 싸놓은 짐을 보면 항상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동두천에서 보낸 날은 기간으로 따져서 채 3주가 안 되었고 서울에 있었던 날을 빼면 딱 2주쯤이 되었을텐데 그 기간이 꽤나 짧았던 것을 고려하면 방 한 켠에 우두커니 서있던 배낭들을 보고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괜한 사치였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사람이 감성을 컨트롤하는 것은 그 감성 자체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성이 겉으로 표현되지 않게끔 이성으로 꾹꾹 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는 수밖에.
이미 지난 일요일에 최후의 만찬 장소는 진미옥 설렁탕으로 암묵적으로 정했다.
보산역 근처의 익숙한 밤 풍경을 눈에 담으며 구 시내로 걸어갔다.
이제는 완전히 길을 익힌 덕에 15분 정도 걸어 진미옥 설렁탕에 도착했고 우리는 마지막 식사의 의미를 기리며 평소와는 다르게 특탕을 주문하기로 했다.
주문하기 전에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특탕과 그냥 탕의 차이를 물었다.
특탕은 고기의 양이 더 많다는 것이다.
원래 탕보다 1.5배가 비싼 만큼 양은 2배 정도는 많으리라고 생각하고 탕을 기다리는데 예상보다 적은 양의 탕이 나온 것이 아닌가.
고기의 양도 뭐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고기를 따로 찍어먹으라고 준 간장 종지 ㅡ 이는 일반 탕을 시켰을 때는 제공되지 않은 것이었다 ㅡ 가 무안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여전히 맛은 있었다.
만족스럽게 밥을 먹고 나와서 일터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동두천의 식당 이곳 저곳을 다닌 우리가 나름의 관점에서 평점을 종합해봤는데 아무래도 진미옥의 설렁탕이 단연 1등이었다.
가성비에서 압승을 거둔 라이라이와 특유의 소세지 맛이 일품이었던 호수식당이 공동 2위 정도.
그리고 첫 날 이후로는 계란말이를 주지 않았던 깜밥집이 4등이었다.
어차피 후보가 4개밖에 되지 않으므로 절대적인 순위에 크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네 식당 모두 우리의 입맛에는 괜찮은 곳이었고 우리는 그저 재미삼아 상대적인 순위를 매겨본 것뿐이다.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서울로 돌아간다고, 앞으로 잘 지내라고 짧게 인사 말을 나눈 뒤 헤어졌다.
화요일의 밤 근무는 모든 것이 끝나가는 마당이라 그런지 가장 한산했다.
나의 동두천 답사기의 초안을 손으로 쓱쓱 쓰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 짐을 꺼내 버스 터미널에 집합했다.
나의 동두천 답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 시체처럼 잠을 잤다.
아마 내가 살면서 다시 동두천이라는 도시에 갈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깜밥집도 라이라이도 진미옥 설렁탕도 모두 마지막이다.
보산역 앞 편의점의 그녀도 마지막이다.
시간이 지나면 어영부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든 말든 어떻게 어영부영 잘 살아가겠지.
미군 부대 앞의 쥬시 걸들도, 구 시내 근처에서 빨간 조명과 함께 일하는 여자들도, 지행역 앞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학생들도 알아서들 잘 살아가리라.
밤 근무에 바이오 리듬이 맞춰져 있던 나는 서울에 돌아가고 나서 바이오 리듬을 정상으로 되돌리느라 며칠을 소요했다.
동두천에서의 기억도, 나의 생활 패턴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같이 잊혀져갔다.
동두천에서 돌아온 지 3주가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있던 여러 가지 일들에 기억이 많이 퇴색되었다.
빛 바랜 그 기억을 안고 '대체 이걸 써서 어따 써먹나?'하는 회의감과 싸우며 열심히 한 자 한 자 타이핑했고 이제서야,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지 거의 1달만에 끝을 본다.
언젠가 내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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