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네이버가 제공하는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지만 가족의 의미는 사전적 정의로써 깨우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에 따르자면 가족은 단순히 유전자의 일부를 공유하는 개체로서 각 유전자들의 상호 작용과 자연 전반에 걸친 ESS의 흐름에 따른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고등한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이보다 더 끈끈한 무엇이 있는 그런 개념이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때론 정치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게 마련인데, 우리가 일상적인 의미에서 쓰는 가족이라는 두 음절이 각각의 독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가정하고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자신의 가족과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족이 매우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저 가족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 정도만 알게 된다고 해도 나로서는 만족스럽다.
불행히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이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다지 끈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긴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다.
'가까움'이라는 물리적 사실만 있었지 그로 인해 정신적인 유대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내 동네에 있는 안산과 인왕산 같은 관계였다.
그 두 산은 날 때부터 가까이 있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순간에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나고 보니 이미 나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그들과의 관계, 즉 가족이라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관계는 이미 내가 세상에 났을 때, 기원부터 따지자면 지금 내 유전자의 반을 구성하는 하나의 정자와 내 유전자의 또 다른 반을 이루는 하나의 난자가 만났을 때,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식의 기계적인 가족관을 어렴풋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확실히는 생물적 지식이 뒷받침된 중학생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내게 있어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다른 주위의 사람들과 비교해 하등 특별한 점이 없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관용적인 문구는 아주 멍청하고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세상에 나게 한 것이 고마우려면, 내가 세상에 나지 않았을 때가 났을 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여야 하는데 ㅡ 만약 저 문장,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이 반어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ㅡ 내가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무엇이 더 좋고 자시고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특히나 나의 형제 계열보다 부모 계열은,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한 것에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존재였다.
자식의 양육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사회적, 정책적 관점에서는 몰라도 최소한 부모와 자식 관계에선 말이다.
그리도 안타깝게도 내 부모님은 그런 책임을 잘못 행사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들을 없는 권리를 주장하려는 사람들로 보았고, 그들은 나를 도리를 다 하지 않는 자식으로 봤을 것이다.
하나뿐인 형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불신이 쌓이질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 형은 나에 대한 책임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다 있지도 않은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와는 불화의 담을, 형과는 무관심의 담을 쌓고 산 것이 꽤 길었다.
그 사이에 나는 가족과는 달리 내가 처음부터 그 관계 형성에 관여할 수 있으며 책임과 권리 따위에서 자유롭거나, 그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친구라는 집단에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1년 1년이 급격하게 변하는 20대의 삶에서는 1년 전의 나도 굉장히 어려보인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말이다.
10대까지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20대에는 1년에 한두 번, 많게는 너덧 번씩 나의 가족관을 강타하는 일이 생겼다.
절대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으며 나는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가족관이 어린 사고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새롭게 알게된 것은, 다시금 안타깝게도, 내 가족들의 권리 행사에 정당성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최소한의 의무감을 부여한 것이다.
내게는 그들로부터 오는 관심과 간섭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과 간섭을 줄 의무도 있던 것이었다.
뭐 어떻게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의무를 진다는 것이 그들의 권리 행사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과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의무'라고 표현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특수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내가 의무라는 개념이라도 끌어와 가족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것은 나에게나 나의 가족에게나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변화였다.
어려운 대화를 통해 나 자신 그리고 그들도 이런 변화 ㅡ 그 목적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수단만이라도 변화해야 한다는 ㅡ 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 변화가 궁극적으로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으니, 나는 의무감에 대한 거창한 이론만 제시했지 구체적인 방법론은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심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나는 이 방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라는, 꼭 스티븐 코비의 책에나 나올 법한 애매하면서 뼈 있어 보이는, 그러나 실제로는 별 의미 없는 구절로 부르고 싶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가족이라는 관계의 의미를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파악하지 말고 그 밖으로 한 발짝 물러나와서 보자는 것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잘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그 관계의 의미를 그 관계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비이성적인 일이고 절대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여태까지 내가 가족과 가져온 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 합당하게 대응이 될 경우, 내가 그 다른 사람들에게 지고 있는 의무를 가족과의 관계로 끌어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라고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누군가는 다른 방법론을 찾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나와 타인과의 관계만을 고려에 넣었으나 타인과 타인과의 관계 또는 나와 사물과의 관계, 나와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관점을 취할 수도 있겠고 아예 내가 생각해내지 못한 다른 방법론을 택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가족과의 관계와 적절히 매치할 수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찾는 것이 다음 단계다.
나는 우선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 다음에 여자친구나 또는 애인이라고 하는 사람 ㅡ '했던' 사람도 대상에 포함된다 ㅡ 과의 관계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지인이라는 큰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나와 오랜 시간을 같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ㅡ 이 경우에는 꼭 실존 인물만을 생각하지 않고 가상의 인물 X를 정하여 생각해보기도 했다 ㅡ 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의무를 지고 있으며 그런 의무를 어떤 식으로 지켜야 할지 생각했다.
이런 식의 고찰이 가능한 이유는 나의 가족은 어떤 면에서 나의 친구이면서 애인이고, 나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것과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할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관계에 대한, 보잘 것 없는 구체적인 내용은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기에 생략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방법을 사용해 가족이라는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나조차 의무감을 느껴 생각하게 된 방법이기 때문에 아직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이 몸에 배지 않았고, 막상 관계의 재정립이 끝났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변화를 가져오기까지엔 일정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실 나의 가족들은 관계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는 꾸준히 노력할 것이고 언젠가는 그 노력이 우리들에게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보일 만한 변화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외적인 변화가 언젠가는, 내가 바람직하다고 느끼는 진정한 나와 가족의 관계, 아니 나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로, 그런 내부로의 변화로 이어지리라고 꼭 믿고 있다.
가족이란 단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사람들로 '가족'이라는, 혈연 관계에만 기대는 이름표를 제외하고는 다른 60억명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족을 가족 그 자체의 특별함으로 받아들이게 될 날이 꼭 올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소시오패스로 비춰지게 만드는 글이었으나 급격하게 붕괴하는 대한민국의 '가족'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무슨무슨 패스 같이 아주 특이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리라는 생각에서 좁은 소견을 적어보았다.
제목 그대로 그냥 한 가지 조언 정도로 받아들이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
PS :
어쩌면 가족에게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못해서 생각한 방법이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하나의 근거라니, 상당히 역설적이나 고무적이고 희망찬 일이 아닌가.
허허.
네이버가 제공하는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ㆍ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하지만 가족의 의미는 사전적 정의로써 깨우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에 따르자면 가족은 단순히 유전자의 일부를 공유하는 개체로서 각 유전자들의 상호 작용과 자연 전반에 걸친 ESS의 흐름에 따른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고등한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이보다 더 끈끈한 무엇이 있는 그런 개념이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때론 정치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게 마련인데, 우리가 일상적인 의미에서 쓰는 가족이라는 두 음절이 각각의 독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가정하고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자신의 가족과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족이 매우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저 가족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 정도만 알게 된다고 해도 나로서는 만족스럽다.
불행히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이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다지 끈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긴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다.
'가까움'이라는 물리적 사실만 있었지 그로 인해 정신적인 유대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내 동네에 있는 안산과 인왕산 같은 관계였다.
그 두 산은 날 때부터 가까이 있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순간에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나고 보니 이미 나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그들과의 관계, 즉 가족이라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관계는 이미 내가 세상에 났을 때, 기원부터 따지자면 지금 내 유전자의 반을 구성하는 하나의 정자와 내 유전자의 또 다른 반을 이루는 하나의 난자가 만났을 때,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식의 기계적인 가족관을 어렴풋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확실히는 생물적 지식이 뒷받침된 중학생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내게 있어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다른 주위의 사람들과 비교해 하등 특별한 점이 없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관용적인 문구는 아주 멍청하고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세상에 나게 한 것이 고마우려면, 내가 세상에 나지 않았을 때가 났을 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여야 하는데 ㅡ 만약 저 문장,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이 반어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ㅡ 내가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무엇이 더 좋고 자시고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특히나 나의 형제 계열보다 부모 계열은,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한 것에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존재였다.
자식의 양육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사회적, 정책적 관점에서는 몰라도 최소한 부모와 자식 관계에선 말이다.
그리도 안타깝게도 내 부모님은 그런 책임을 잘못 행사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들을 없는 권리를 주장하려는 사람들로 보았고, 그들은 나를 도리를 다 하지 않는 자식으로 봤을 것이다.
하나뿐인 형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불신이 쌓이질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 형은 나에 대한 책임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다 있지도 않은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와는 불화의 담을, 형과는 무관심의 담을 쌓고 산 것이 꽤 길었다.
그 사이에 나는 가족과는 달리 내가 처음부터 그 관계 형성에 관여할 수 있으며 책임과 권리 따위에서 자유롭거나, 그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친구라는 집단에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1년 1년이 급격하게 변하는 20대의 삶에서는 1년 전의 나도 굉장히 어려보인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말이다.
10대까지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20대에는 1년에 한두 번, 많게는 너덧 번씩 나의 가족관을 강타하는 일이 생겼다.
절대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으며 나는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가족관이 어린 사고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새롭게 알게된 것은, 다시금 안타깝게도, 내 가족들의 권리 행사에 정당성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최소한의 의무감을 부여한 것이다.
내게는 그들로부터 오는 관심과 간섭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과 간섭을 줄 의무도 있던 것이었다.
뭐 어떻게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의무를 진다는 것이 그들의 권리 행사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과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의무'라고 표현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특수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내가 의무라는 개념이라도 끌어와 가족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것은 나에게나 나의 가족에게나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변화였다.
어려운 대화를 통해 나 자신 그리고 그들도 이런 변화 ㅡ 그 목적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수단만이라도 변화해야 한다는 ㅡ 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 변화가 궁극적으로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으니, 나는 의무감에 대한 거창한 이론만 제시했지 구체적인 방법론은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심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나는 이 방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라는, 꼭 스티븐 코비의 책에나 나올 법한 애매하면서 뼈 있어 보이는, 그러나 실제로는 별 의미 없는 구절로 부르고 싶다.
나는 이 사람의 얼굴에서 희대의 사기꾼 또는 렉터 박사를 떠올린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가족이라는 관계의 의미를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파악하지 말고 그 밖으로 한 발짝 물러나와서 보자는 것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잘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그 관계의 의미를 그 관계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비이성적인 일이고 절대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여태까지 내가 가족과 가져온 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 합당하게 대응이 될 경우, 내가 그 다른 사람들에게 지고 있는 의무를 가족과의 관계로 끌어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라고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누군가는 다른 방법론을 찾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나와 타인과의 관계만을 고려에 넣었으나 타인과 타인과의 관계 또는 나와 사물과의 관계, 나와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관점을 취할 수도 있겠고 아예 내가 생각해내지 못한 다른 방법론을 택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가족과의 관계와 적절히 매치할 수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찾는 것이 다음 단계다.
나는 우선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 다음에 여자친구나 또는 애인이라고 하는 사람 ㅡ '했던' 사람도 대상에 포함된다 ㅡ 과의 관계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지인이라는 큰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나와 오랜 시간을 같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ㅡ 이 경우에는 꼭 실존 인물만을 생각하지 않고 가상의 인물 X를 정하여 생각해보기도 했다 ㅡ 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의무를 지고 있으며 그런 의무를 어떤 식으로 지켜야 할지 생각했다.
이런 식의 고찰이 가능한 이유는 나의 가족은 어떤 면에서 나의 친구이면서 애인이고, 나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것과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할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관계에 대한, 보잘 것 없는 구체적인 내용은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기에 생략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방법을 사용해 가족이라는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나조차 의무감을 느껴 생각하게 된 방법이기 때문에 아직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이 몸에 배지 않았고, 막상 관계의 재정립이 끝났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변화를 가져오기까지엔 일정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실 나의 가족들은 관계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는 꾸준히 노력할 것이고 언젠가는 그 노력이 우리들에게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보일 만한 변화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외적인 변화가 언젠가는, 내가 바람직하다고 느끼는 진정한 나와 가족의 관계, 아니 나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로, 그런 내부로의 변화로 이어지리라고 꼭 믿고 있다.
가족이란 단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사람들로 '가족'이라는, 혈연 관계에만 기대는 이름표를 제외하고는 다른 60억명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족을 가족 그 자체의 특별함으로 받아들이게 될 날이 꼭 올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소시오패스로 비춰지게 만드는 글이었으나 급격하게 붕괴하는 대한민국의 '가족'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무슨무슨 패스 같이 아주 특이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리라는 생각에서 좁은 소견을 적어보았다.
제목 그대로 그냥 한 가지 조언 정도로 받아들이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
PS :
어쩌면 가족에게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못해서 생각한 방법이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하나의 근거라니, 상당히 역설적이나 고무적이고 희망찬 일이 아닌가.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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