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두천 답사기 5

| 2011. 11. 16. 19:06

“손님, 잔액 부족입니다.”

이건 어머니의 명백한 배신이었다.
나는 분명히 일찌감치 어머니께 카드에 돈을 넣어달라고 부탁했고, 그 정도 시각이라면 찌링찌링, 부~웅하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카드 명세서가 나왔어야 했다.
바로 연락을 드렸다.
올해 말, 대한민국 정치계의 가장 뜨거운 화제거리인 서울 시장 재보궐 선거에 신경을 쓰느라 깜빡 했다며 이제 돈을 부쳐주겠다고 하셨다.
이 비참한 사태를 참지 못한 수지의 돈 치들이 ‘호텔 르완다’에서처럼 선뜻 현금 20,000원을 내놓았고 나는 일단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나는 그 날 내로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나중에 다른 자리를 마련해 달라며 정중히 사양했다.

http://franktalker5.blogspot.com/2011/06/hotel-rwanda-2004.html


밖으로 나가자 어느 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 배가 완전히 부르지 않았던 우리는 무언가를 더 먹기로 했다.
오징어 회집에 들어갔으나 메뉴, 가격, 분위기 어느 것 하나 신통한 면이 없는 곳이라 그냥 나왔다.
마친 바로 근처의 이자카야가 눈에 띄어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곳으로 들어갔다.
막 중국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하던 이자카야 운영진이 급히 우리 무리를 맞았다.
저녁 식사를 하는 그들의 옆에 자리를 잡긴 좀 뭐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조용했다.
우리는 창가에 자리를 틀었고 아주머니가 근처 히터의 전원을 올린 뒤에 메뉴판을 갖다 주었다.

14,000원짜리 오꼬노미야끼를 시켰다.
음식은 조금 뒤에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알바생이 갖다 주었는데 몹시 양아치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사람을 겉보기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만 오후에 봤던 꼴뚜기 왕자들의 예도 있고 해서 왠지 그가 안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친절한 그의 서비스를 보며 나의 옹졸함을 자책했다.
어쩌면 그 때의 꼴뚜기 왕자들도 반에서 성적으로 1, 2등을 다투는 모범생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상념은 여기까지.
나에겐 당장 눈 앞의 오꼬노미야끼가 있었고 동시에 2명의 경쟁자가 있었다.
맛은 썩 좋지 않앗던, 그러니까 그냥 평범했던 수준의 오꼬노미야끼를 뜯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음식은 양도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동두천의 인심이란 보산역과 구 시내에만 한정되는 미덕인가 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자리에서 일어날 시각이 되었더라.
우리가 다시 되돌아 갈 시간도 고려해야 했지만 그보다 편의점에 들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2차는 길 내기에서 승리한 대구메이트(25세)가 사기로 했다.
시원하게 카드가 긁혔고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전 날과 마찬가지로 매우 쌀쌀한 편이었다.
큰 길로 나가서 택시를 잡기로 했다.
바로 눈 앞에 신한 은행이 보였다.
나는 아까의 수치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일행을 잠시 대기시키고 ATM 앞에 섰다.
어머니가 돈을 넣어주셨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액 조회부터 했다.
그러나 돈은 여전히 입금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왔고 우리는 다시 걸었다.

처음에 택시에서 내렸던 그 큰 길까지 나왔다.
아까 이 곳으로 올 때는 보지 못했던 지행역이 떡하니 삼거리 저편에 있었다.
지인이 얘기했던 '지행역'과 우리가 따로 알아낸 '신 시가지'가 같은 장소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참고적으로 얘기하면 ㅡ 이는 나중에 현지인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나의 추측에 의해 일반화한 것으로 신빙성이 썩 높은 것은 아니다 ㅡ 보통 동두천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이 곳을 '지행역'으로, 동두천 사람들은 '신 시가지'라고 부르는 편이다.
외부인이 이 곳을 '신 시가지'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ㅡ 최소한 나의 예에서, 현지인들은 거의 절대 이 곳을 '지행역 근처'라고 부르지 않는 것 같았다.

지행역 1호선
주소 경기 동두천시 지행동 481-2
설명
상세보기

택시를 타고 동두천의 밤거리를 달렸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 전혀 막히지 않아 보산역 근처에 빠르게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약간의 설렘을 안고 가게에 들어갔다.

그녀가 카운터에 있었다.
드디어 만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아 막상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뭐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일시적 공황감에 동요할 여유는 없었다.
일단 시간도 벌 겸 실제로도 먹고 싶었던 호빵을 시킨 뒤 마실 것을 사서 바깥 테이블에서 대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말을 거느냐는 것이었다.
카운터에 서있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그 방법은 동시에 위험부담도 크다.
아무래도 밝은 형광등 밑이라면 외모의 불리한 점이 부각되고, 다른 손님이 들어올 경우 신경이 분산되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뜨이기 대문에 그녀가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거나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다면 마찬가지로 대화에 잘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밖으로 불러낼 수 있다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녀를 어떻게 불러낼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는 알바생을, 고용 상황도 썩 안정적이지 못한 알바생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부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초장부터 오해를 잔뜩 살 가능성이 크고 자칫 범법자 비슷한 것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 때 정의의 호빵맨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나의 호빵 주문에, 아직 찜기를 가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호빵들이 제대로 익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한 그녀는 우리가 그 말에 채 반응하기 전에 알아서 지금 최대한 빨리 익혀 볼테니 바깥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곧 갖다주겠노라고 했다.
우리는 ㅡ 나 혼자만이었을 수도 ㅡ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순순히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매우 추웠지만 뭔가 기다리는 대상이 있었기에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바깥에서는 찜기가 있는 쪽이 들여다 보였는데 그녀가 수시로 호빵이 익었나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호빵맨이 우리 모두를 살렸다.
원래도 호빵을 좋아하지만 그 때는 더 좋았던 것 같다.

http://blog.naver.com/hidakaryo/50022210902


우리는 잽싸게 작전 회의를 했다.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은 일단 연락처를 받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제시되지 않았다.
당시 날씨도 춥긴 했지만 뭔가에 쫓기는 듯한 다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단 혼란 상태에 빠진 우리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단팥 호빵 두 개를 들고 가게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작전 회의는 없었다.
바로 실전에 돌입해야 했다.
암묵적으로, 리드를 잡는 역할은 내가 맡게 되었다.
거기에 팔공산 돌부처가 어시스트를 던져주고, 수지의 초식남은 돌아가는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그녀가 호빵을 들고 우리에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