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날씨가 추워지고 있던 10월 말에 향후 3주 무렵을 동두천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두천.
세 글자가 지나치게 안정되어 보였다.
그 안정감이 육중한 두려움이 되어 나를 엄습했다.
다행히도 머나먼 북국으로 떠난다는 설렘이 금방 그 두려움을 상쇄했다.
극적인 순간에 대개 방해물로만 작용하던 나의 역마살이 오랜만에 순기능을 발휘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연말 전의 권태감도 해소하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살면서 한 번도 가지 않을 곳을 다녀 온다는, 스킬 트리를 찍는 쾌감을 느낀다는 명분으로 24세의 게으른 마음을 달래도 동두천행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 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오후였다.
버스에서는 약 1시간 동안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잠에서 깬 뒤 점차 한산해져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 보며 약 40분간 시간을 보내자 어느 새 동두천에 도착해 있었다.
'Do Dream', '꿈의 도시'라는 동두천시의 공식 모토와는 달리 고요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한 도시였다.
그 음산함이 동두천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었다.
첫 날의 일정은 숙소에 짐을 푸는 것이 끝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3주간 머물게 될 방은 예상보다 훨씬 깔끔한 6인실이었다.
조그마한 샤워실이 딸린 화장실도 방에 내장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수확.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서 치열한 생존 다툼을 벌였던 지인에게 간단하게 동두천이라는 도시에 대해 문의했다.
그는 현재 내가 있는 곳 근처에는 간단하게 끼니나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장소만 있을 뿐이고 그나마 번화한 곳을 찾고 싶다면 지행역이라는 곳을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도착한 첫 날이니 만큼 멀리 나가기보다 우선 간단하게 주위나 둘러 보기로 했다.
그에게 추천할 만한 밥집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제시한 식당은 총 3개.
백반집 '깜밥집'과 중국집 '라이라이', 부대찌개 전문점 '호수식당'.
여론 조사 끝에 숙소에서 가장 가깝다는 깜밥집을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옷을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
깜밥집은 뼈 속까지 철저한 '밥집'이다.
요새 많이 볼 수 없는 김밥말이 발을 헤치고 들어가면 우측으로 대여섯개의 단촐한 식탁을, 그 반대편으로는 주방을 볼 수 있다.
메뉴판 같은 것은 쿨하게 없다.
무조건 같이 간 일행의 머리 수대로 백반 하나씩이 배정된다.
반찬은 한 세트에 여섯 개 정도가 있고 ㅡ 대충 두 사람에 한 세트를 주는 식이다 ㅡ 기초 반찬을 제외한 나머지 2개 정도는 적당한 주기를 기준으로 바뀌는 듯 했다.
그 날의 메인 메뉴 역시 정확한 규칙성은 없지만 매일 매일 다른 메뉴를 내놓는 것 같았다.
우리가 처음 깜밥집을 간 날엔 부대 찌개와 계란 말이가 나왔고, 그 이후엔 오삼 불고기, 닭 볶음탕, 그리고 다시 부대 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다소 의외라고 느꼈던 것은 참 맛있었던 계란 말이를 첫 날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손님을 유도하는 상술인지, 단지 우리가 처음 간 날이 운이 좋았던 건지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전자로 의견을 모았으나 나는 심적으로 후자를 지지하는 편이다.
밥은 셀프로 무한 리필이다.
반찬 역시 셀프로 계속 퍼다 먹을 수 있다.
종이 컵과 커피 믹스가 비치되어 있어 원한다면 달달한 커피를 후식으로 먹을 수도 있다.
술도 먹을 수 있다.
맛은 대부분 준수하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백반집에 불과한 깜밥집.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개인 당 단돈 5,000원에 제공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색다르게 보인다.
이 장소를 추천해 준 지인의 말 ㅡ 전국에서 가성비 최고의 식당이라는 ㅡ 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울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곳이다.
참 대단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사적인 진행에 치중하다가 동두천시의 개괄적인 상황 정리를 잊었다.
동두천시라는 행정 구역 안에는 내가 알기로 크게 세 군데 '나갈만한 곳'이 있다.
하나는 보산역 근처고, 다른 하나는 구 시내, 구 시가지라고 불리는 구 버스터미널 근처, 남은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한 지행역으로 신 시가지 ㅡ 발음의 문제 때문인지 신 시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만나본 적 없다 ㅡ 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나의 숙소는 보산역에서 직선 거리로 400~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깜밥집은 내 숙소보다는 보산역 쪽으로 가까이, 약 200m 거리쯤에 있을 것이다.
구 시내와 신 시가지 이야기는 차후에 등장한다.
밥을 다 먹고 나와 바로 건너편의 마트에 들어갔다.
가격이 동네 마트 치고 싸다는 것에 일단 놀라긴 했지만 날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그런 동네 마트에서 산 미구엘(San Miguel)과 레드 호스(Red Horse)를 판다는 것이었다.
15평쯤 되는 마트를 둘러 보니 우리 나라에서는 손쉽게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식품이 계속 눈에 띄었다.
이게 무슨 연유인고 하니, 바로 근처에 있는 미군 부대의 미군들을 상대하는 필리핀 여자들이 근처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나는 보산역 근처에서 필리핀 여자들 ㅡ 또는 최소한 동남아계 여자들 ㅡ 을 굉장히 많이 목격했다.
대한민국에서 단위 면적당 필리핀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을 조사하면 거의 100% 동두천이 꼽히리라고 생각할 정도다.
이들은 관능적인 몸매로 성숙하지 못한 미 합중국의 젊음을 유혹하는 이른바 쥬시 걸(juicy girl)들이다.
말로만 들어 오던 그들의 존재를 실제로 봤을 때 내게 밀려온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혹감이었다.
과연 저들에게 있어 삶이 의미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미군이라는 더더욱 낯선 상대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흔적은 길가에 엎질러진 맥주보다도 못한 무언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존재 의의(?)는 조금 다르지만 몇 달 전 상당히 이슈가 되었던 데리헤루 서비스도 떠올랐다.
개인이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삶이라면 선택에 따른 모든 책임과 자유는 선택자의 것이고, 나 같은 타자가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작다.
그러나 내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선택으로 떠밀린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 때문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간식 거리를 몇 개 사고 나는 컴퓨터를 쓸 일이 생겨 근처 PC방을 찾았다.
회원 가입을 하면 시간에 1,200원, 그냥 사용하면 시간에 1,400원으로 서울의 평균 시세와 비교하면 다소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쾌적한 시설과 나쁘지 않은 본체 성능, 누군가에게는 인기가 있을 외모의 알바생 등을 고려하면 동두천의 PC방, 좀 더 정확히 말해 보산역의 PC방이 그 정도 가격인 것은 충분히 정상참작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내가 갔던 PC방의 간판에 'since 1992'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인터넷을 처음 접한 것은 1994년이나 1995년쯤 당시 윈도우 3.1에 포함되어있던 터미널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대체 그 이전에 지어진 PC방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PC방 계의 호프브로이 하우스다.
1시간 정도 필요한 인터넷 서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 날의 일정은 이 것으로 끝이었다.
서울에서 동두천까지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여로가 느껴졌고 아무래도 낯선 곳이다 보니 밤 늦게 다니는 것은 자제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첫 인상이었던 음산함과는 달리, 동두천에서의 첫 날은 꽤나 느낌이 좋았다.
나는 앞으로 내게 닥칠 운명의 소용돌이를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쯤 잠에 빠져들었다.
여건이 안 되어 이 답사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 다소 아쉽지만 글만 있는 기행문도 나름 특색이 있지 않겠냐는 한심한 창의력에 기대어 꿋꿋하게 써나가련다.
1편은 여기서 마친다.
동두천.
세 글자가 지나치게 안정되어 보였다.
그 안정감이 육중한 두려움이 되어 나를 엄습했다.
다행히도 머나먼 북국으로 떠난다는 설렘이 금방 그 두려움을 상쇄했다.
극적인 순간에 대개 방해물로만 작용하던 나의 역마살이 오랜만에 순기능을 발휘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연말 전의 권태감도 해소하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살면서 한 번도 가지 않을 곳을 다녀 온다는, 스킬 트리를 찍는 쾌감을 느낀다는 명분으로 24세의 게으른 마음을 달래도 동두천행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 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오후였다.
버스에서는 약 1시간 동안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잠에서 깬 뒤 점차 한산해져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 보며 약 40분간 시간을 보내자 어느 새 동두천에 도착해 있었다.
'Do Dream', '꿈의 도시'라는 동두천시의 공식 모토와는 달리 고요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한 도시였다.
그 음산함이 동두천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었다.
첫 날의 일정은 숙소에 짐을 푸는 것이 끝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3주간 머물게 될 방은 예상보다 훨씬 깔끔한 6인실이었다.
조그마한 샤워실이 딸린 화장실도 방에 내장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수확.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서 치열한 생존 다툼을 벌였던 지인에게 간단하게 동두천이라는 도시에 대해 문의했다.
그는 현재 내가 있는 곳 근처에는 간단하게 끼니나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장소만 있을 뿐이고 그나마 번화한 곳을 찾고 싶다면 지행역이라는 곳을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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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첫 날이니 만큼 멀리 나가기보다 우선 간단하게 주위나 둘러 보기로 했다.
그에게 추천할 만한 밥집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제시한 식당은 총 3개.
백반집 '깜밥집'과 중국집 '라이라이', 부대찌개 전문점 '호수식당'.
여론 조사 끝에 숙소에서 가장 가깝다는 깜밥집을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옷을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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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밥집은 뼈 속까지 철저한 '밥집'이다.
요새 많이 볼 수 없는 김밥말이 발을 헤치고 들어가면 우측으로 대여섯개의 단촐한 식탁을, 그 반대편으로는 주방을 볼 수 있다.
메뉴판 같은 것은 쿨하게 없다.
무조건 같이 간 일행의 머리 수대로 백반 하나씩이 배정된다.
반찬은 한 세트에 여섯 개 정도가 있고 ㅡ 대충 두 사람에 한 세트를 주는 식이다 ㅡ 기초 반찬을 제외한 나머지 2개 정도는 적당한 주기를 기준으로 바뀌는 듯 했다.
그 날의 메인 메뉴 역시 정확한 규칙성은 없지만 매일 매일 다른 메뉴를 내놓는 것 같았다.
우리가 처음 깜밥집을 간 날엔 부대 찌개와 계란 말이가 나왔고, 그 이후엔 오삼 불고기, 닭 볶음탕, 그리고 다시 부대 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다소 의외라고 느꼈던 것은 참 맛있었던 계란 말이를 첫 날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손님을 유도하는 상술인지, 단지 우리가 처음 간 날이 운이 좋았던 건지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전자로 의견을 모았으나 나는 심적으로 후자를 지지하는 편이다.
밥은 셀프로 무한 리필이다.
반찬 역시 셀프로 계속 퍼다 먹을 수 있다.
종이 컵과 커피 믹스가 비치되어 있어 원한다면 달달한 커피를 후식으로 먹을 수도 있다.
술도 먹을 수 있다.
맛은 대부분 준수하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백반집에 불과한 깜밥집.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개인 당 단돈 5,000원에 제공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색다르게 보인다.
이 장소를 추천해 준 지인의 말 ㅡ 전국에서 가성비 최고의 식당이라는 ㅡ 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울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곳이다.
참 대단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사적인 진행에 치중하다가 동두천시의 개괄적인 상황 정리를 잊었다.
동두천시라는 행정 구역 안에는 내가 알기로 크게 세 군데 '나갈만한 곳'이 있다.
하나는 보산역 근처고, 다른 하나는 구 시내, 구 시가지라고 불리는 구 버스터미널 근처, 남은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한 지행역으로 신 시가지 ㅡ 발음의 문제 때문인지 신 시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만나본 적 없다 ㅡ 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나의 숙소는 보산역에서 직선 거리로 400~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깜밥집은 내 숙소보다는 보산역 쪽으로 가까이, 약 200m 거리쯤에 있을 것이다.
구 시내와 신 시가지 이야기는 차후에 등장한다.
밥을 다 먹고 나와 바로 건너편의 마트에 들어갔다.
가격이 동네 마트 치고 싸다는 것에 일단 놀라긴 했지만 날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그런 동네 마트에서 산 미구엘(San Miguel)과 레드 호스(Red Horse)를 판다는 것이었다.
15평쯤 되는 마트를 둘러 보니 우리 나라에서는 손쉽게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식품이 계속 눈에 띄었다.
이게 무슨 연유인고 하니, 바로 근처에 있는 미군 부대의 미군들을 상대하는 필리핀 여자들이 근처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나는 보산역 근처에서 필리핀 여자들 ㅡ 또는 최소한 동남아계 여자들 ㅡ 을 굉장히 많이 목격했다.
대한민국에서 단위 면적당 필리핀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을 조사하면 거의 100% 동두천이 꼽히리라고 생각할 정도다.
이들은 관능적인 몸매로 성숙하지 못한 미 합중국의 젊음을 유혹하는 이른바 쥬시 걸(juicy girl)들이다.
말로만 들어 오던 그들의 존재를 실제로 봤을 때 내게 밀려온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혹감이었다.
과연 저들에게 있어 삶이 의미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미군이라는 더더욱 낯선 상대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흔적은 길가에 엎질러진 맥주보다도 못한 무언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존재 의의(?)는 조금 다르지만 몇 달 전 상당히 이슈가 되었던 데리헤루 서비스도 떠올랐다.
개인이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삶이라면 선택에 따른 모든 책임과 자유는 선택자의 것이고, 나 같은 타자가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작다.
그러나 내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선택으로 떠밀린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 때문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간식 거리를 몇 개 사고 나는 컴퓨터를 쓸 일이 생겨 근처 PC방을 찾았다.
회원 가입을 하면 시간에 1,200원, 그냥 사용하면 시간에 1,400원으로 서울의 평균 시세와 비교하면 다소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쾌적한 시설과 나쁘지 않은 본체 성능, 누군가에게는 인기가 있을 외모의 알바생 등을 고려하면 동두천의 PC방, 좀 더 정확히 말해 보산역의 PC방이 그 정도 가격인 것은 충분히 정상참작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내가 갔던 PC방의 간판에 'since 1992'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인터넷을 처음 접한 것은 1994년이나 1995년쯤 당시 윈도우 3.1에 포함되어있던 터미널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대체 그 이전에 지어진 PC방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PC방 계의 호프브로이 하우스다.
1시간 정도 필요한 인터넷 서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 날의 일정은 이 것으로 끝이었다.
서울에서 동두천까지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여로가 느껴졌고 아무래도 낯선 곳이다 보니 밤 늦게 다니는 것은 자제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첫 인상이었던 음산함과는 달리, 동두천에서의 첫 날은 꽤나 느낌이 좋았다.
나는 앞으로 내게 닥칠 운명의 소용돌이를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쯤 잠에 빠져들었다.
여건이 안 되어 이 답사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 다소 아쉽지만 글만 있는 기행문도 나름 특색이 있지 않겠냐는 한심한 창의력에 기대어 꿋꿋하게 써나가련다.
1편은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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