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 2011. 10. 9. 12:41

그는 올해로 21살이 된 청년이다.
그의 청소년기는 사막의 모래만큼이나 거칠었다고 추정된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3개월간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고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4살짜리 자식이 어딘가에서 무럭무럭 꿈을 키우고 있으며 손에는 잦은 주먹질로 인한 흉터가 군데군데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과거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사고는 '여러모로' 개방적이라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포용하며, 타인을 잘 배려하고 배포도 꽤 큰 편이다.
쉽게 화를 내는 성격도 아니고 짜증을 내는 것도 아니며 귀찮은 일도 알아서 잘 처리한다.
가끔 아주 유치한 질문을 연달아서 물을 때가 있지만 그 질문은 순수한 치기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절반 정도는 진심이 담긴 궁금증도 포함된 것이기에 크게 신경을 건드리진 않는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항상 재미거리를 찾고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 나와는 죽이 잘 맞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소 맹목적으로 두둔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꼭 그런 점을 떠나서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감형으로 생각할 그런 재기 넘치는 쿨한 젊은이다.
게다가 외모도 훤칠한 편.

몇몇 여자들에겐 아쉬운 소식이겠지만 그는 배우자가 있다.
지금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의 아내는 그와 동갑내기로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과거에 문신사의 보조로 일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의 이야기인 만큼 그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와 그녀 사이에 생후 3개월된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된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ㅡ 물론 그는 공식적으로 17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되긴 했지만 자기의 자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그 성별조차 모른다. ㅡ 그는 대부분의 어린 아버지들이 그러듯 꽤 이상한 느낌이라는 대답을 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 그 현장에 있었다는 그는 처음에 아이의 머리통이 너무 커서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조그마한 생명체, 절반이 그의 유전자로 구성된 그 염색체의 표현형을 바라 보며 아주 야릇한 느낌에 잠겼다고 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경험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도 언젠가 찾아올 그 순간을 떠올려 보면, 그보다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몹시 숭고하고 신비한 그 개체가, 그 작은 덩어리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압도되어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가 지구의 대기와 처음으로 직접 접촉한 그 날로부터 1달 뒤에 그의 곁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멀리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연락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현재 직업이 없는 아내를 대신해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아내와 아들에게 필요한 생활비를 꼬박꼬박 부쳐주었다.
약 한 달 뒤에는 아내도 그 곳의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 그가 머무는 곳으로 아들과 함께 올 예정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잡생각은 많지만 정작 실속은 하나도 없는 속 빈 강정인 나는 그가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이 부러웠다.
모든 것이 훌륭하고 빛나지는 않지만 그는 하나하나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구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어머니의 배에서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빈 손일 뿐이었다.
비록 머리통은 그 때보다 좀 더 커지긴 했지만, 그조차도 항상 좋은 결과라는 보장은 없다.


오늘따라 그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사정을 물어 보니 아내와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핸드폰은 받질 않고 집 전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그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남긴 것이 없었다.
약간 의문이 드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손자를 보러가도 되냐고 연락했을 때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사촌 집에 갈 예정이라 오늘은 안 될 것 같다는 답을 했다는데 막상 그에게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그녀의 집과 핸드폰이 둘 다 연락을 안 받는다는 사실에서 ㅡ 직업상 근무 시간이 들쭉날쭉한 그는 거의 아무 때나 그녀에게 전화를 하는 악취미가 있는데, 그에 따르면 여지껏 단 한 번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ㅡ 확실히 그녀가 집에는 없다고 확신했다.
또한 아이가 울면 어느 때고 아내가 잠에서 깨곤 했고 아이가 밤에도 상당히 보채는 일이 잦다는 점에서 그녀가 아이와 같이 있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수상스러운 잠적에 대해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단 하나의 조건만 지켜진다면, 그녀가 아이와 함께 지베 있다는 거짓말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는 '여러모로'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그 자신도 어느 정도의 사생활은 즐기고 있었기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중요한 것은 신의의 문제였다.

마침내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상 생활은 극적인 것을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항상 뻔한 결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녀가 말했던 것은 그가 듣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듣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바로 그 것 그대로였다.
그는 잠시 그녀를 추궁했으나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한듯 잠잠히 있다가, 바로 내일 이혼 서류를 보내겠다고 했다.
전화기 건너편으로 항변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으나 그는 무심하게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곧장 그의 핸드폰이 적적한 공기를 울리며 진동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한 부부이 이혼을 지켜보게 되었다.

타인의 이혼을 이렇게도 가까이서, 실시간으로 겪었으니 적잖이 찝찝한 기분이 되어야 하겠지만 피로 탓인지 저녁으로 먹은 피자의 포만감 때문인지 절절히 와닿는 느낌은 없다.
다만 이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졸지에 이혼의 목격자가 된 것처럼 졸지에 이혼의 당사자가 된 그는 모든 것이 다 괜찮으나 그의 아들이 다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고 다닐 거라는 생각은 썩 유쾌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지금 막 이혼한 사람 치고 훌륭한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워드 이병(21세)은 한국 시각으로 2011년 10월 8일 오후 10시 30분경 비공식적으로 싱글남이 되었다.
오늘은 그를 만난지 8일째가 되는 날이며 앞으로 일주일이 지나면 평생동안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유난히 공기에서 서늘한 냄새가 나는 가을 밤이다.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동두천 답사기 2  (0) 2011.11.09
나의 동두천 답사기 1  (1) 2011.11.08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2) 2011.11.07
번역의 한계  (0) 2011.11.04
Red Faction : Armageddon  (0) 2011.10.15
가을의 문턱에 선 나의 근황  (2) 2011.10.08
사랑 경험의 중요성  (0) 2011.09.28
한강 난지 캠핑장 2차 원정기  (0) 2011.09.06
September와 다이어리와 나의 비극  (0) 2011.09.03
발레의 대중화  (0) 2011.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