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의 대중화

| 2011. 8. 31. 20:00

나는 발레에 대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못 알아보는 일자무식 문외한이지만 오늘은 발레의 대중화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우선 그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발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인지 밝히는 것이 순서겠다.
그래야 이 무모한 시도에 대해 최소한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음은 내가 발레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꼬리를 물고 딸려 나오는 키워드와 그에 대해 간단한 부연 설명을 붙인 것이다.

1. 손연재 - 알고 보니 손연재는 발레와는 별로 관련이 없고, 그저 한 명의 어린 리듬체조 선수일 뿐이었다.

2. 신수지 - '아, 그렇다면 신수지가 발레리나구나.'하는 생각이 바로 그 뒤를 따랐으나 그녀 역시 리듬체조 선수.

3. 호두까기 인형 - 저 유명한 ㅡ 그리고 이름을 생각해내는 데에 한참 시간을 보냈다. '발레'라는 단어의 이미지에 '왈츠'가 자꾸 오버랩되어 요한 슈트라우스의 이름이 끊임 없이 떠올랐다. 머리 속 그에게 몇 번 '나가!'라고 외치자 왈츠의 왕이 슬그머니 나가고 그제서야 차이코프스키가 우아하게 등장했다. ㅡ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공연을 본 것은 거의 내 나이가 한 자리대 숫자에 불과했던 시절이라 아무런 기억도, 어렴풋한 느낌도 없다.

4. 빌리 엘리어트 - 본 적 없다.

5. 블랙 스완 - 재밌게 봤다.

6. 하나와 앨리스 - 인상 깊게 남아있는 마지막 신이 내가 발레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

7. 아담한 가슴 - ?

처자의 이름은 제니퍼 엘리슨. 영국 왕립발레학교까지 입학한 발레 영재였지만 무려 큰 가슴 때문에 학교를 떠나달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발레계를 떠나 모델, 배우, 가수로 열심히 활동 중이라고.


그렇다.
나는 발레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차라리 벌레라면 모를까.

발레가 대중화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얼마 전에 한국에서 발레 붐이 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국립 발레단의 공연이 50년만에 매진되고, 발레를 소재로 삼는 광고와 개그가 유행하며, 발레 소품을 딴 각종 패션 아이템이 인기를 끄는 현실은 분명히 발레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우리 생활 속에 가까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이 글의 제목 '발레의 대중화'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발레의 대중화는 이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대해 생각하던 중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는, 그러니까 공상에 가까운 그 아이디어는 정말 발레가 우리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어와 도저히 그것 없이는 우리의 일상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중화가 되었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만약 발레가 오늘 날 현대인이 '헬스'에 대해 갖는 수준의 관심을 받는다면 어떨까?
전 세계 어디에 가든 수도 없이 많이 보이는 헬스 센터가 모두 발레 교습소라면?
헬스를 통한 건강에 대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만큼 발레가 대변하는 우아함이 주목을 받는다면?
초등학교 교과 과정 중에 체육 시간이 발레 시간으로 대체된다면?
지덕체를 갖춘 사람이 아니고 지덕발, 즉 지육과 덕육과 발육…?

우선 사람들의 전반적인 움직임이 우아하고 유연해지리라.
발레리노와 발레니나들이 가득한 출근 시간의 지하철 역을 떠올려보자.
음악만 깔면 바로 현대 발레 공연이 연출되는, 그런 멋드러진 풍경이 아닐까.
수많은 사람이 발레 걸음으로 정처없이 걷는 광경, 누군가와 부딪칠 것 같은 상황에서 서로 신호라도 주고 받은듯 유연하게 몸을 피하고 기품 있게 인사를 주고 받는 광경,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손잡이를 잡았다가 놨다가 T 머니를 충전하고 개찰기를 통과하는 그 일련의 몸짓이란.
우리가 정말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면 느끼지 못할 아름다움.

평일 저녁 서울 시내 한복판 고층 빌딩에 자리 잡은 헬스장, 런닝 머신 위에서 멋지게 땀을 흘리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 따위는 더 이상 없다.
평일 저녁 서울 시내 한복판 고층 빌딩에 자리 잡은 헬스장, 봉 위에서 다리를 풀며 멋지게 땀을 흘리는 커리어 우먼과 그를 보조하는 발레 강사가 있을 뿐이다.
보디 빌딩도 없다.
발레 공연이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다소 따분해 보이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발레가 왠지 고요함이 가득할 것만 같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조용조용한 세상은 나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또는 몸치인 내가 춤이 주도하는 분위기를 불편하게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보나마나 이게 나의 미래.


그 중요한 문제란 내 블로그 멋쟁이들 폴더의 이름이 '안멋쟁이들'로 바뀌게 될 거라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가정된 세상에서 안멋쟁이들인 사진을 내가 구태여 모을 일도 없겠지만, 어쨌든 나의 수많은 여자 멋쟁이들은 발레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실패자들에 불과하다.
거대한 흉부가 바람직한 인간상에서 어긋나게 되고 작은 바스트, 민자 가슴이 가장 아름다운 몸매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킬리 하젤이나 켈리 브룩은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장나라와 정려원이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부상하리라.

아아, 그 출렁임의 미학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아, 그 모성애의 상징이 부덕함이 되는 것이라면!
아아! 그 포근함과 안락함이 내 살에 와닿지 않게 된다면!

정말 끔찍한 세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발레의 대중화에 반대하는 바[각주:1]이다.
  1. 결과적으로 장난조로 쓰인 이 글에서 나의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솔직하게 요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발레 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 글의 입장과 비슷하다. 결국 나 역시 발레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너그러이 용서하고 넘어가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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