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시 윌리엄스전(傳)

| 2011. 8. 20. 10:19

퀸시 윌리엄스(Quincy Williams)를 처음 본 것은 작년 9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키가 180cm는 족히 넘고 몸무게는 120kg쯤 될 것 같은 거구의 흑인을 처음 봤을 때, 비록 내가 상상하던 뮤직비디오 속 흑인의 탄탄한 근육은 없었지만, 나는 그가 듬직한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당시 그와 나는 사는 곳이 달라 일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이였다.
같은 건물의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거대한 등빨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괴력은 힘이 많이 드는 일, 예를 들어 짐을 옮길 때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그 뿐이었다.
나는 그가 몇 살인지도, 어디에서 왔으며 가족 관계는 어떤지, 응원하는 야구팀이 어디고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여자 연예인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특유의 과묵한 성격 때문에 섣불리 먼저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흑인 특유의 영어 액센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한 이야기조차 나누기가 힘들었다.

퀸시 윌리엄스에게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겨울이 찾아왔다.
특별한 사정이 생겨 소수의 사람만이 모여 하루 종일 몸을 쓰는 작업에 동원이 된 적이 있었다.
오전 내내 일을 하고 점심 무렵에야 겨우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총책임자가 점심으로 사준 피자를 먹으며 그와 처음으로 제대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1990년생이며 가족으로는 부모님과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그가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반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물었다.
그는 결혼 반지라고 했다.
그렇다.
그는 우리 나이로 21살에 유부남이 된 위대한 사내였던 것이다.
부인에 대해 물었다.
그와 동갑인 그녀는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고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유난히 커다란 눈동자가 우수로 가득차 보였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신혼 부부의 이야기는 내 동정을 사기에 충분했고 나는 그 날부터 되도록이면 그의 친한 친구가 되고자 노력했다.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미국인, 그것도 흑인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두말할 것 없이 포함된 감정이었다.

퀸시 윌리엄스와 내가 살던 2010년이 저물고 2011년이 되었다.
겨울의 찬 공기에 몸이 적응해 가듯 슬슬 서로에게 익숙해져 갈 그 무렵, 그와 나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그와 내가 방을 같이 쓰게 된 것이 바로 그 혁명.
흑인 룸메이트라.
내 기대만큼 뛰어난 외모를 가진 친구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경머해 보고 싶었던 흑인 룸메이트와의 생활을 하게 되다니.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그의 이사를 도와주었다.
나는 방의 안쪽,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고 그는 방의 바깥쪽인 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2011년 1월 말, 우리는 그렇게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 말고 진짜 룸메이트.


 퀸시 윌리엄스가 나와 같이 방을 쓴 시간 동안 얻은 경험으로부터, 나라는 사람의 모습으로부터 한국인 룸메이트와 방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일반적인 한국인의 생활 양식이 어떤지 추론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비록 그는 그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만 말이다.
반면 어리석지 않는 대한민국의 남아인 나는 그라는 존재의 의미를 그가 속해 있는 더 큰 범주로, 즉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나 혹은 그냥 아메리칸으로, 또는 스페셜리스트[각주:1]나 유에스 알미(Army)로 확장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퀸시 윌리엄스'라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거뭇거뭇한 호모 사피엔스 종의 개체로 보았던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이 '나의 첫 미국인 친구'라거나 '흑인 룸메이트와의 생활에 관하여', '미국 군인과 7개월간의 동거 경험'이 아닌 '퀸시 윌리엄스전(傳)'인 것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퀸시 윌리엄스의 사생활을 이 글에서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
그는 때로 범죄에 가깝거나 실제의 범죄를 저지르면서 살아왔고 여기서 그런 점을 파헤친다면 이 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傳)이 아니라 수준 낮은 뒷담화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그를 추억하는 헌정의 글을 쓰려고 하는 나의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 ㅡ 그 중에서 노골적으로 무언가를 까발리려는 것만 제외하고 ㅡ 그 진실한 우정이 이 글의 전부다.

퀸시 윌리엄스는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우리는 꽤 자주 같이 맥주를 먹었다.
그가 떠날 때까지 내가 축낸 그의 맥주만 해도 최소한 100병 이상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각주:2]
그는 리쿼(liquor)라고 부르는 도수가 높은 술은 거의 먹지 않았다.
미국에 있었을 때는 소주도 가끔 먹었다고 했는데 한국에서 그가 소주를 생으로 먹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소주는 그냥 먹으면 쓰기 때문에 섞을만한 펀치(punch)가 있을 때만 먹는다고 했다.
별로 맛이 없다는 이유를 제외하면 그가 리쿼를 먹지 않는 이유는 취하는 게 두려워서라고 생각한다.
맛으로 따지면 맥주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소맥을 먹지 않는 모습에서, 언젠가 팔꿈치 부근을 심하게 까져 왔을 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던 모습에서 그는 취했을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든 편이며 스스로 그런 모습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가장 많이 먹는 술은 맥주이고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 사실상 유일하게 먹는 브랜드는 버드 라이트다.
매주 목요일만 되면 버드 라이트 식스팩이 4개가 포함된 박스를 들고 와서 통채로 냉장실에 넣어두고 24시간을 냉장 보관한 후 금요일 저녁부터 병을 쭙쭙 빨기 시작했다.
내가 본 그의 맥주 1일 최대 섭취량은 병맥주 단위로 15병 근처인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같이 술을 먹는다'는 개념이 한국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것과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다.
보통 한국 사람들끼리 술을 같이 먹는다고 함은 같은 자리에서 서로 대화를 하면서 중간중간 술을 먹는 그런 만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나중에 방에서 술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에게는 어차피 공짜 술이므로 당연히 승락했다.
그런데 막상 방에서 벌어진 풍경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맥주를 가져다가 자기 옆에 두고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했고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다른 일, 아마 책을 읽는다거나 기타를 쳤다.
'술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술을 같은 시간대에 먹으면서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그와 같이 술을 먹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메일 아이디 = 윤모양


퀸시 윌리엄스는 '니거'(이하 '그 단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절대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닌 나는 특히나 흑인들을 지칭할 때 굉장히 단어에 신경을 쓰곤 했다.
단 한 번도 그를 그 단어를 사용해서 불러본 적은 없다.
가끔 장난 삼아 그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자는 모두 처절한 응징을 당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했다.
주말을 맞아 춤 추러 간 이태원의 클럽에서 한 한국인 여자가 술에 취했는지 어쨌는지 그를 그 단어로 불렀다.
그는 그 단어를 듣고 싶지 않다며 입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여자는 2번이나 더 그 단어를 말했고 너무도 화가 난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 후로 다시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만난 모든 한국인들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퍽퍽 밀쳤다고.
언젠가 그에게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흑인들은 서로 그 단어로 거리낌 없이 부르는데 그건 서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는 대답 거리를 찾다가 결국 나를 침대로 내동댕이쳤다.

퀸시 윌리엄스는 무한리필 고기집을 좋아한다.
올해 2월 회식 때문에 일터 근처 무한리필[각주:3] 고기집을 찾았다.
물론 그도 동행했다.
그는 그 날 이후로 무한리필 고기집의 팬이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손짓과 발짓을 사용하며 주인과 소통하고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후 주인에게 20달러를 건네 나에게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
가끔은 주중에 식당을 찾은 적도 있고, 자신의 친구들을 데려가기도 했으며 그가 떠나기 전에는 무려 한 주에 3번이나 무한리필 고기를 뜯었다.
무한리필 고기는 그가 한국의 문화 중 가장 맘에 들어한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5월 어느 날의 점심엔 내가 '서래'에 그를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는 고기의 질은 마음에 들어 했지만 배가 찰 만큼 먹으려면 너무 돈이 많이 든다는 평을 남겼다.

퀸시 윌리엄스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깁슨이라는 작은 시골 도시 출신이다.
깁슨은 총 면적이 1평방 마일에 총 인구가 고작 200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거의 읍이나 리 수준의, 도시라고 하기엔 마을에 가까운 곳이다.
그는 gibsosnboy22라는 아이디를 즐겨 쓰고 이두 안쪽에 'Gibson'과 'Boy'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나눈 적이 없다.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퀸시 윌리엄스는 한국의 물가가 비싸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그 대표적인 예는 술값에 대한 불만이다.
어느 날 밤, 조그만 양주 한 병을 바에서 먹을 때 왜 자기가 100달러도 넘게 써야 하냐며 한국은 후지다는 이야기를 털어 놓은 적이 있다.
합리성이라고는 찾기 힘든 그의 사고 방식에 아주 적절한 일반화의 오류이긴 하지만 내가 미국의 술값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아마 서울이라는 도시가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얼마나 특이한 도시인지 몰랐을 곳이고 이태원이라는 동네가 그 서울에서도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곳인지 몰랐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술값에 비하면 이태원의 술값이 다소 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평생을 깡시골에서 살아온 청년에게 그런 점을 역설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구글 위성 지도에서 찾은 깁슨의 모습. 내가 손수 붓을 잡아도 저 지도랑 비슷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퀸시 윌리엄스는 유치하다는 평을 굉장히 싫어한다.
1990년생 1월생인 그는 그 나이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듯 부분적으로 성숙함의 정도가 굉장히 다른 사람이다.
보통의 한국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직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일에 임할 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농익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외엔 대체 그 조그만 머리통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유치하게 구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특히나 소심함과 섞인 유치함이 발휘될 때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는 항상 한국인들이 모이면 자기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같이 하는 일에서 따돌리려고 노력하며 그 모든 것이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당연히 장난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7개월간 룸메이트로 지낸 내가 보기에 그의 말은 8할이 진심이었다.
어쨌든 그가 유치한 짓을 할 때마다 나는 그 방면의 연장자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런 생각은 너무 유치하며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런 내게 돌아오는 것은 강력한 조이기, 침대에 내동댕이, 몇 분간의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 등이었다.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그는 그가 생각하는 어른이 되기에 아직 멀었다.

퀸시 윌리엄스와 나 사이에 일어났거나,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정말 굉장히 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그런 자잘한 이야기를 공개된 자리에서 꺼내고 싶지가 않다.
공교롭게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린 격이라서 더더욱 그의 품위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라면, 돌이켜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젊은 날의 패기 넘치는 일 같은 것은 모두 잊게 되더라도 그가 전반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는 것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2011년 8월 16일자로 대한민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지금쯤 부인과의 결혼식 준비[각주:4]에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그는 조만간 아이를 가질 계획이라고 했다.
언젠가 또 다른 기회로 그가 1년간 머물렀던 한국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 시점에는 꼭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했다.

퀸시 윌리엄스와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를 평생 기억할 것 같다.
그 기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이 글을 썼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자 했던 목적과 달리 글이 끝을 향하면서 계속 분위기가 감정적으로 바뀌려고 한다.
이제 그만 줄여야겠다.

퀸시 윌리엄스전을 마친다.

총 200만명이 다녀갔다는 여의도 벚꽃 축제에 간 것이 그와 내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서울 나들이였다. 한국 여자들과 사진을 찍고 싶어하던 그의 요청을 못 이겨 행인들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우리는 이 사진을 찍은 이후 바로 여의도를 벗어나서 그가 좋아하던 무한리필 고기집으로 가서 고기를 먹었고 약간의 맥주를 마셨다.

  1. 우리나라의 상병에 해당되는 미육군의 계급인데 딱 1:1로 대응되는 관계는 아니다. 미군의 계급 체계는 다음 링크 참고. [본문으로]
  2. 그가 가진 특권으로 할인된 가격을 따져보면 약 한화로 1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겠다. [본문으로]
  3. 미국인들은 이를 두고 all-you-can-eat이라고 표현하더라. [본문으로]
  4. 결혼식은 올리지 못하고 한국에 왔다고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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