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와 다이어리와 나의 비극

| 2011. 9. 3. 10:40

라틴어 'septem'은 7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September는 9월일까?
줄리어스 시저를 연상시키는 7월 July와 아우구스투스를 연상시키는 8월 August가 이 거대한 음모의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이름이라는 밈을 우리의 달력 체계에 박아버린 것은 아닐까?
원래 7월이던 September 전에 자신들의 이름을 딴 두 달을 집어넣음으로써 당시의 7월은 현재의 9월로 밀려난 것이 아닐까?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줄리어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가 July와 August의 어원이 된 것은 맞다.
7월과 8월은 각각 시저와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달로 둘 다 자신이 로마를 집권하던 시기에 자기가 태어난 달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8월에 30일만 있었던 것이 왠지 억울하기라도 했다는 듯 2월에서 하루를 빼 8월을 31일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7월이어야 할 것만 같은 September가 9월이 된 것은 지도자의 만행과는 무관하다.
로마의 달력은 원래 3월부터 시작했다.
3월이 한 해의 첫 시작이면 9월은 7번째 달이다.
1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잡으면서 7월이던 September는 9월이 되고 말았다.
이름 값을 못 하게 된 September.
이것은 September의 비극.

작년 8월 무렵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다소 지지부진하던 내 삶의 그래프를 다시 한 번 꾸준한 상승세로 만드려는 의지가 충만했던 시기에 우연히 쓸만한 다이어리를 얻었고 왠지 모르게 그 손바닥만한 물체에서 희망을 보았다.
취미 삼아 다이어리를 쓴 것이 벌써 1년이 넘었다.
전 세계에서 다이어리를 썼던 모든 사람 중에 한 다이어리를 1년 이상 쓴 사람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인터넷에서 관련된 정보가 없을까 찾아봤는데 정보가 없다.
다이어리를 만드는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얼마 동안 한 다이어리를 쓰는지 조사하여 속지의 양을 더 효율적으로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다이어리 유목민들을 위해 기본 속지를 1~2달로 대폭 줄인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전자의 의문은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반면 후자의 의문은 실패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다이어리를 구매하는 사람 중 다수는 방대한 양의 빈 속지를 통해 앞으로의 빛날 것만 같은 미래와 그 미래를 위해 성실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허황된 상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대감에 이끌려 별로 쓰지도 않을 다이어리를 구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이어리는 필요하지도 않은 옆구리 살을 넘치도록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다이어리의 비극.

하지만 다이어리라고 해서 모두 비계 가득한 옆구리를 가지라는 법은 없다.
나의 다이어리엔 앞쪽에 월별 속지가 있고 그 다음에 주별 속지가 있고 그 뒤에 메모용 속지와 연락처용 속지가 있다.
나는 한 주가 끝날 때마다 주별 속지 한 장을 뜯어 버리고, 한 달이 끝날 때마다 월별 속지 한 장을 뜯어 버린다.
필요가 없어진 메모용 속지도 뜯어 버리고 활용도가 없어진 연락처용 속지도 뜯어 버린다.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을 땐 다이어리를 펴는 느낌이 조금 빡빡했는데 이제는 아주 훌렁훌렁 잘도 넘어간다.
나의 날짜 속지들은 내년 3월을 기점으로 끝이 난다.
처음부터 내년 3월 27일을 위해 존재했던 나의 다이어리.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그 간절한 심정을 '뜯어' '버리는' 행위에 담았왔건만 도무지 이 놈의 속지는 끝이 없다.
시간이 안 간다.
어쩌면 나쁜 속지들이 서로 새끼를 치면서 야금야금 자신들의 일족을 늘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3월 27일이라는 날과, 시간의 방향성은 종이들의 농간과 수작에 불과하고 나는 그 장난에 넘어가버린 것인가.
이 더러운 근친상간의 현실.
은 개뿔.
이것은 나의 비극.

이것은 대한민국 예비 아빠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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