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가을의 일이다.
나는 당시에 휴학 첫 학기째를 맞고 있었고, 대전에서 자취를 하며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쓰고 허송세월이라고 읽는다.)을 보내고 있었다.
숙명과도 같이 휴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내가 끝끝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엔 자취방 보증금 정도만 대준다면 모든 생활비를 알아서 벌어서 쓰겠다고 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마침 때 맞춰 나는 대학교 동문이 막 새로 만든 동네 학원의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다 합치면 총 6개월 동안 일했던 그 학원에서 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영어, 수학, 과학을 가르쳤다.
이렇게 말하면 돈을 상당히 벌었을 것으로 들리긴 하지만 당시 그 학원의 방침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수에 비례한 수당을 주는 식이었고, 강의 시간은 많았지만 한 수업의 학생 수가 평균 2명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벌진 못했다.
학구열이 조금은 높은 지역에 학원이 위치하긴 했지만 어차피 학원 중심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네 학원에 불과했고, 나 역시 정말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했다기보다 삶에서 약간의 '허송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라 어느 정도 저축을 하고 남은 돈으로 건강하게 먹고 살 만큼의 돈을 벌었을 뿐이다.
내가 가장 오랜 기간 가르쳤던 반은 중학교 2학년 수학반이었다.
둘러보는 식으로 학원에 놀러간 것이 갑작스레 첫 출근으로 돌변했고 그 때 처음 가르치게 된 반이 바로 중2 수학반이었다.
텅 빈 교실로 들어섰을 때 뭔가 뻘쭘한 자세로 내게 인사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자신의 지난 날을 신나게 반성하고 있을 김현구는 내가 학원 일을 그만 둘 때까지 꿋꿋하게 나의 알맹이 없는 수업을 들어주었다.
참 무덤덤했지만 속은 착한 친구였다.
어느 날이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수학은 기하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삼각형의 오심과 닮음 따위의, 여태까지 접해온 도형과는 차별화된 난이도를 가진 각종 보조선의 놀음에 내 수업에 있던 꼬마 친구들이 대부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김현구(당시 15세)도 마찬가지였다.
대수에는 어느 정도 감이 있던 그는 도형에는 영 젬병이었고, 눈 대중으로 길이와 각도를 가늠하는 초등학생 수준의 풀이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상황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나를 가장 헷갈리게 했던 것은 그 친구가 보여주는 심한 기복이었다.
어느 날에는 그럭저럭 문제를 잘 풀었고, 다른 날에는 분명히 지난 번에 잘 풀었던 문제에도 오답을 내놓곤 했다.
뫼비우스의 띠였다.
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바로 그 어느 날 고심 끝에 그에게 질문을 던졌고,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후로 대화는 아마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내 엉뚱한 질문에 그는 다소 당황했다.
더 이상 질문을 해봤자 뭔가 건질 만한 답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나는 대화를 끊고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그 날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학교로 가서 합주를 했건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랑 노가리를 깠건 나는 앎과 이해의 차이를 주장한 그의 이야기를 우스개 소리 삼아 전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우매함에 한 마디씩 던지며 같이 웃었다.
나 역시 그의 말으르 단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어린 아이들의 전형적인 치기 어린 궤변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나는 그 뒤로 몇 달 뒤 학원을 그만 두었고 그와 함께 그 날의 기억도 어딘가 한 켠에 조용히 묻히게 되었다.
그 날의 기억이 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은 바로 어제 새벽의 일이다.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적잖이 당황하면서 무언가 번쩍 해탈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밤부터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뒤로 갈 수록 잠에 취한 티가 역력하게 나는 글이긴 하지만 말이다.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는 지적 활동이다.
당시에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내가 매우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저 두 개념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아주 간단한 3형식 문장 두 개를 대비시키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그 간단한 차이를 대체 왜 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냈던 걸까.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드는 인상은 두 단어에서 어떤 정도(degree)의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그를 아는 것이나 그를 이해하는 것이나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앎과는 다른 어떤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도 확실하다.
나는 이해한다는 행위는 앎의 더욱 심화된 행위라고 본다.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그것을 안다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이해한다는 것은 그 개념 또는 대상을 아는 것을 넘어 그것이 다른 대상과 ㅡ 이 때의 다른 대상은 원래 대상에 종속되는 것일 수도, 그 대상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ㅡ 맺는 관계성을 파악함으로써 좀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접근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앎은 이해를 포함하는 전체 집합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앎이라고 할 때 그것은 대상의 표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해라고 하는 것은 그 껍데기를 뚫고 들어간 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내가 김현구를 안다고 했을 때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보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김현구의 눈이 작은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컴퓨터 게임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펜보다 연필을 선호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운동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실제로 이와 같은 그에 대한 당시의 단편적 사실들을 알고 있다.
'당시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혹시 현재의 그가 그 때와는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다.
내 생각에 여전히 그는 이와 비슷한 모습일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제기해야 할 의문은 당연히 '나는 김현구를 이해하는가?'이다.
내가 예전에 판단한 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는 것과 같은 의미라면 나는 이 질문에 '네.' 또는 '응.' 또는 'Yes.', 'Ja.', 'Si.', 'Da.' 같은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해란 무엇일까?
내가 김현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산더미처럼 많다.
나는 그의 눈이 작은 것을 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작은 것이 그의 눈꺼풀 근육이 발달하지 못해서인지, 예전에 무언가에 눈을 찔린 뒤로 생긴 습관인지, 그것이 스스로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안구의 노출 면적을 넓힌 채로 유지하는 것이 귀찮아서인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그가 컴퓨터를 좋아하게 된 것이 형의 영향인지, 친구들의 영향인지, 부몬미의 영향인지, 스스로 길러낸 특성인지 모른다.
영어보다 수학을 좋아하는 것은 수학 선생님이 영어 선생님보다 예쁘게 생겨서이고, 펜보다 연필을 좋아하는 것은 가끔 가다 손에 묻는 잉크가 싫기 때문이고, 운동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 운동을 좋아하지만 수상 스키나 스노우 보드처럼 학교 운동장에서 하지 않는 운동만 좋아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는 것이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여기서 설령 내가 이것들을 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 한다는 가능성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앎과 이해의 차이는 정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둘 사이의 경계가 어디쯤에 있는지 정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나와 그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나는 저 정도의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모님이라면 아마 저 보다는 더 많고 깊은 것을 알아야 그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내가 그의 부모님을 위해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전적으로 그들의 취향과 관련된 것이다.
앎과 이해의 차이에 대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이제 내가 다루고 싶은 것은 어떻게 앎의 단계에서 이해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냐는 것이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앎과 이해의 차이가 그 앎의 정도 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앎을 더욱 깊고 견고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대상마다 다양하다.
앞에서부터 계속 써먹은 김현구를 다시 끌어오자.
김현구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확실한 김현구와 직접 부대끼는 것이다.
그와 합숙을 시작해 하루 종일 그를 따라다니며 ㅡ 그는 굉장히 귀찮아 하겠지만 ㅡ 같이 생활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에 대한 나의 앎의 정도는 쑥쑥 커질 것이다.
이런 구속에 대해 본인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의 주변 인물에게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고, 그의 일기장을 읽어 보거나 ㅡ 그가 실제로 일기를 쓸 리는 만무하나 ㅡ 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할 수 있다.
러셀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 ㅡ 직접 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를 통한 지식 ㅡ 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둘 중 필요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취사선택하면 된다.
사람이라는 구체적 대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대상으로 논의를 확장하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나는 소주의 맛을 알고, 그 맛을 이해한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이 소주가 참이슬인지 처음처럼인지 구분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는 소주를 먹으면서 그 청명한 액체가 가지는 쓴 맛 너머의 진미를 맛볼 줄 안다.
맥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막걸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술과 나의 감정, 술과 술자리의 분위기, 술과 그 술을 같이 먹는 상대 등의 미묘한 관계가 빚어내는 인과적인 복합체를 알기 때문에 술맛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스키나 와인 같은 술의 맛은 잘 모른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위스키나 와인을 먹어봤으므로 그것들의 맛은 알지만 그 맛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선천적으로 미각이 둔한 내가 위스키와 와인의 맛에 대해 김현구의 예만큼 구체적으로 내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서술하기란 쉽지 않다.
혀에 닿는 느낌, 코로 올라오는 냄새, 목 넘김 따위의 항목을 억지로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이 경우 역시 내가 위스키와 와인의 맛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맛과 같이 감각적인 정보를 더 잘 알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은 그 감각을 계속해서 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줄창 부어라 마셔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ㅡ 그리고 이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다소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관계성 속에서 ㅡ 위스키는 심심할 때 먹어야 맛있다든지 와인은 의외로 못 생긴 여자와 먹어야 맛있다든지 하는 ㅡ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다.
샤갈의 그림 같은 경우엔 조금 다른 방법론을 취할 수 있다.
무작정 그림만 뚫어지게 쳐다 보면서 1차적인 느낌으로 그의 그림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좋지만 샤갈의 인생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세계관의 형성 과정을 공부함으로써, 또는 당시 미술 사조의 분위기를 파악함으로써 그의 그림의 상징성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커피의 예로부터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을 도출한 나의 글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이해에의 수단으로 '일단 겪어보기'라는, 경험을 강조한 글에 불과하다.
사랑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라고 까불었던 글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무엇이든 아는 것을 넘어서 이해하는 것을 바라는 호학(好學)적인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여태까지의 논의를 보면 우리는 암묵적으로 앎과 이해를 정도의 차이 이외에 선후 관계로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이해라는 것은 앎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이미 이해를 심화된 앎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를 이해해.' 같은 문장으로 이 선후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헛수고다.
처음에 이 논의를 시작할 때 '앎'에 대해 특별한 제한을 걸지 않았으므로 이 글의 앎은 직접 대면에 의한 것과 기술 구에 의한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나는 그를 모르지만'의 '모르지만'은 앎의 전자의 의미만을 고려한 발언이고 어떻게든 '그'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은 그를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또는 '그를 이해해'의 '그'는 그 앞에서 나오는 실재적 '그'와는 다른, '나'의 머리 속에서 관념적으로 형성된 객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진짜 '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라고 생각하는 가상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두 가지 용어 치환법을 거친다면 처음의 문장은 '나는 그를 알고 그를 이해해.' 또는 '나는 그를 모르고 그를 몰라.'라는 자명한 문장이 된다.
이것으로 헛수고 증명 끝.
비록 내가 김현구의 학원 강사이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가 나의 철학 서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나의 조소를 샀어야 할 대상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나는 그가 말하던 앎과 이해의 차이를 인지하기는 커녕, 그에게 무언가를 ㅡ 보조선을 그리는 미묘함의 미학을 ㅡ 이해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지고 있었음에도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무심하게 내게 가르침을 내렸던 것이고 우매했던 나는 그 가르침의 참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물안의 개구리로 살아왔다.
죽을 때까지 나와 나를 둘러싼 우주의 의해를 위해 살고 싶은 내게 앎과 이해의 중요한 관계를 깨우쳐 준 위대한 멘토 김현구.
멘토의 희생 정신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꾸준히 정진해야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이해의 단계로 넘기고, 알지 못하는 것은 열심히 알아내어 이해의 초석으로 삼아야겠다.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으므로 평생 나는 이해에의 갈증에 시달리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이미 이런 피곤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을!
나는 당시에 휴학 첫 학기째를 맞고 있었고, 대전에서 자취를 하며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쓰고 허송세월이라고 읽는다.)을 보내고 있었다.
숙명과도 같이 휴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내가 끝끝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엔 자취방 보증금 정도만 대준다면 모든 생활비를 알아서 벌어서 쓰겠다고 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마침 때 맞춰 나는 대학교 동문이 막 새로 만든 동네 학원의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다 합치면 총 6개월 동안 일했던 그 학원에서 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영어, 수학, 과학을 가르쳤다.
이렇게 말하면 돈을 상당히 벌었을 것으로 들리긴 하지만 당시 그 학원의 방침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수에 비례한 수당을 주는 식이었고, 강의 시간은 많았지만 한 수업의 학생 수가 평균 2명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벌진 못했다.
학구열이 조금은 높은 지역에 학원이 위치하긴 했지만 어차피 학원 중심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네 학원에 불과했고, 나 역시 정말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했다기보다 삶에서 약간의 '허송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라 어느 정도 저축을 하고 남은 돈으로 건강하게 먹고 살 만큼의 돈을 벌었을 뿐이다.
내가 가장 오랜 기간 가르쳤던 반은 중학교 2학년 수학반이었다.
둘러보는 식으로 학원에 놀러간 것이 갑작스레 첫 출근으로 돌변했고 그 때 처음 가르치게 된 반이 바로 중2 수학반이었다.
텅 빈 교실로 들어섰을 때 뭔가 뻘쭘한 자세로 내게 인사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자신의 지난 날을 신나게 반성하고 있을 김현구는 내가 학원 일을 그만 둘 때까지 꿋꿋하게 나의 알맹이 없는 수업을 들어주었다.
참 무덤덤했지만 속은 착한 친구였다.
어느 날이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수학은 기하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삼각형의 오심과 닮음 따위의, 여태까지 접해온 도형과는 차별화된 난이도를 가진 각종 보조선의 놀음에 내 수업에 있던 꼬마 친구들이 대부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김현구(당시 15세)도 마찬가지였다.
대수에는 어느 정도 감이 있던 그는 도형에는 영 젬병이었고, 눈 대중으로 길이와 각도를 가늠하는 초등학생 수준의 풀이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상황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나를 가장 헷갈리게 했던 것은 그 친구가 보여주는 심한 기복이었다.
어느 날에는 그럭저럭 문제를 잘 풀었고, 다른 날에는 분명히 지난 번에 잘 풀었던 문제에도 오답을 내놓곤 했다.
뫼비우스의 띠였다.
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바로 그 어느 날 고심 끝에 그에게 질문을 던졌고,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후로 대화는 아마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너 이거 알아?"
"네." ㅡ 그는 단답형 대답을 굉장히 즐기는 다무라 카프카 형의 사람이었다.
"진짜 마음 속에 거리낌 하나 없이 안다고 생각해?"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네."
"왜 시간 끌어. 솔직히 잘 모르지?"
"사실 알기는 아는데 이해를 못하겠어요."
"응?"
"알기는 알겠는데 이해가 잘 안 돼요."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뭐야?"
"네?"
"너한테는 안다는 거랑 이해한다는 게 달라?"
"네?"
내 엉뚱한 질문에 그는 다소 당황했다.
더 이상 질문을 해봤자 뭔가 건질 만한 답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나는 대화를 끊고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그 날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학교로 가서 합주를 했건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랑 노가리를 깠건 나는 앎과 이해의 차이를 주장한 그의 이야기를 우스개 소리 삼아 전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우매함에 한 마디씩 던지며 같이 웃었다.
나 역시 그의 말으르 단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어린 아이들의 전형적인 치기 어린 궤변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나는 그 뒤로 몇 달 뒤 학원을 그만 두었고 그와 함께 그 날의 기억도 어딘가 한 켠에 조용히 묻히게 되었다.
그 날의 기억이 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은 바로 어제 새벽의 일이다.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적잖이 당황하면서 무언가 번쩍 해탈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밤부터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뒤로 갈 수록 잠에 취한 티가 역력하게 나는 글이긴 하지만 말이다.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는 지적 활동이다.
당시에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내가 매우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저 두 개념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아주 간단한 3형식 문장 두 개를 대비시키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그 간단한 차이를 대체 왜 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냈던 걸까.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를 안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
첫 번째로 드는 인상은 두 단어에서 어떤 정도(degree)의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그를 아는 것이나 그를 이해하는 것이나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앎과는 다른 어떤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도 확실하다.
나는 이해한다는 행위는 앎의 더욱 심화된 행위라고 본다.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그것을 안다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이해한다는 것은 그 개념 또는 대상을 아는 것을 넘어 그것이 다른 대상과 ㅡ 이 때의 다른 대상은 원래 대상에 종속되는 것일 수도, 그 대상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ㅡ 맺는 관계성을 파악함으로써 좀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접근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앎은 이해를 포함하는 전체 집합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앎이라고 할 때 그것은 대상의 표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해라고 하는 것은 그 껍데기를 뚫고 들어간 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내가 김현구를 안다고 했을 때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보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김현구의 눈이 작은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컴퓨터 게임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펜보다 연필을 선호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김현구가 운동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실제로 이와 같은 그에 대한 당시의 단편적 사실들을 알고 있다.
'당시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혹시 현재의 그가 그 때와는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다.
내 생각에 여전히 그는 이와 비슷한 모습일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제기해야 할 의문은 당연히 '나는 김현구를 이해하는가?'이다.
내가 예전에 판단한 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는 것과 같은 의미라면 나는 이 질문에 '네.' 또는 '응.' 또는 'Yes.', 'Ja.', 'Si.', 'Da.' 같은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해란 무엇일까?
내가 김현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산더미처럼 많다.
나는 그의 눈이 작은 것을 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작은 것이 그의 눈꺼풀 근육이 발달하지 못해서인지, 예전에 무언가에 눈을 찔린 뒤로 생긴 습관인지, 그것이 스스로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안구의 노출 면적을 넓힌 채로 유지하는 것이 귀찮아서인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그가 컴퓨터를 좋아하게 된 것이 형의 영향인지, 친구들의 영향인지, 부몬미의 영향인지, 스스로 길러낸 특성인지 모른다.
영어보다 수학을 좋아하는 것은 수학 선생님이 영어 선생님보다 예쁘게 생겨서이고, 펜보다 연필을 좋아하는 것은 가끔 가다 손에 묻는 잉크가 싫기 때문이고, 운동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 운동을 좋아하지만 수상 스키나 스노우 보드처럼 학교 운동장에서 하지 않는 운동만 좋아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는 것이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여기서 설령 내가 이것들을 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 한다는 가능성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앎과 이해의 차이는 정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둘 사이의 경계가 어디쯤에 있는지 정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나와 그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나는 저 정도의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모님이라면 아마 저 보다는 더 많고 깊은 것을 알아야 그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내가 그의 부모님을 위해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전적으로 그들의 취향과 관련된 것이다.
깊은 이해에서 우러나온 남자와 여자에 대한 고찰.
앎과 이해의 차이에 대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이제 내가 다루고 싶은 것은 어떻게 앎의 단계에서 이해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냐는 것이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앎과 이해의 차이가 그 앎의 정도 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앎을 더욱 깊고 견고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대상마다 다양하다.
앞에서부터 계속 써먹은 김현구를 다시 끌어오자.
김현구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확실한 김현구와 직접 부대끼는 것이다.
그와 합숙을 시작해 하루 종일 그를 따라다니며 ㅡ 그는 굉장히 귀찮아 하겠지만 ㅡ 같이 생활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에 대한 나의 앎의 정도는 쑥쑥 커질 것이다.
이런 구속에 대해 본인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의 주변 인물에게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고, 그의 일기장을 읽어 보거나 ㅡ 그가 실제로 일기를 쓸 리는 만무하나 ㅡ 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할 수 있다.
러셀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 ㅡ 직접 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를 통한 지식 ㅡ 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둘 중 필요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취사선택하면 된다.
사람이라는 구체적 대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대상으로 논의를 확장하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나는 소주의 맛을 알고, 그 맛을 이해한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이 소주가 참이슬인지 처음처럼인지 구분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는 소주를 먹으면서 그 청명한 액체가 가지는 쓴 맛 너머의 진미를 맛볼 줄 안다.
맥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막걸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술과 나의 감정, 술과 술자리의 분위기, 술과 그 술을 같이 먹는 상대 등의 미묘한 관계가 빚어내는 인과적인 복합체를 알기 때문에 술맛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스키나 와인 같은 술의 맛은 잘 모른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위스키나 와인을 먹어봤으므로 그것들의 맛은 알지만 그 맛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선천적으로 미각이 둔한 내가 위스키와 와인의 맛에 대해 김현구의 예만큼 구체적으로 내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서술하기란 쉽지 않다.
혀에 닿는 느낌, 코로 올라오는 냄새, 목 넘김 따위의 항목을 억지로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이 경우 역시 내가 위스키와 와인의 맛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맛과 같이 감각적인 정보를 더 잘 알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은 그 감각을 계속해서 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줄창 부어라 마셔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ㅡ 그리고 이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다소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관계성 속에서 ㅡ 위스키는 심심할 때 먹어야 맛있다든지 와인은 의외로 못 생긴 여자와 먹어야 맛있다든지 하는 ㅡ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다.
샤갈의 그림 같은 경우엔 조금 다른 방법론을 취할 수 있다.
무작정 그림만 뚫어지게 쳐다 보면서 1차적인 느낌으로 그의 그림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좋지만 샤갈의 인생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세계관의 형성 과정을 공부함으로써, 또는 당시 미술 사조의 분위기를 파악함으로써 그의 그림의 상징성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커피의 예로부터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을 도출한 나의 글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이해에의 수단으로 '일단 겪어보기'라는, 경험을 강조한 글에 불과하다.
사랑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라고 까불었던 글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무엇이든 아는 것을 넘어서 이해하는 것을 바라는 호학(好學)적인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여태까지의 논의를 보면 우리는 암묵적으로 앎과 이해를 정도의 차이 이외에 선후 관계로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이해라는 것은 앎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이미 이해를 심화된 앎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를 이해해.' 같은 문장으로 이 선후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헛수고다.
처음에 이 논의를 시작할 때 '앎'에 대해 특별한 제한을 걸지 않았으므로 이 글의 앎은 직접 대면에 의한 것과 기술 구에 의한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나는 그를 모르지만'의 '모르지만'은 앎의 전자의 의미만을 고려한 발언이고 어떻게든 '그'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은 그를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또는 '그를 이해해'의 '그'는 그 앞에서 나오는 실재적 '그'와는 다른, '나'의 머리 속에서 관념적으로 형성된 객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진짜 '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라고 생각하는 가상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두 가지 용어 치환법을 거친다면 처음의 문장은 '나는 그를 알고 그를 이해해.' 또는 '나는 그를 모르고 그를 몰라.'라는 자명한 문장이 된다.
이것으로 헛수고 증명 끝.
비록 내가 김현구의 학원 강사이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가 나의 철학 서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나의 조소를 샀어야 할 대상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나는 그가 말하던 앎과 이해의 차이를 인지하기는 커녕, 그에게 무언가를 ㅡ 보조선을 그리는 미묘함의 미학을 ㅡ 이해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지고 있었음에도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무심하게 내게 가르침을 내렸던 것이고 우매했던 나는 그 가르침의 참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물안의 개구리로 살아왔다.
죽을 때까지 나와 나를 둘러싼 우주의 의해를 위해 살고 싶은 내게 앎과 이해의 중요한 관계를 깨우쳐 준 위대한 멘토 김현구.
멘토의 희생 정신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꾸준히 정진해야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이해의 단계로 넘기고, 알지 못하는 것은 열심히 알아내어 이해의 초석으로 삼아야겠다.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으므로 평생 나는 이해에의 갈증에 시달리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이미 이런 피곤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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