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두천 답사기 3

| 2011. 11. 11. 11:12

밖으로 나온 우리가 나오자마자 한 일은 깔깔거리면서 웃는 것이었다.
많은 것이 담긴 웃음이었다.
특히나 나는 그 때 있던 다른 둘 보다는 더 많은 의미가 담긴 웃음을 터뜨렸을텐데, 그 이유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던 극초반에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즉 여기의 주 소득원이 음식값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정말로 그 곳에서 닭똥집이라도 먹고 가면 괜찮겠다고 생각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머지 둘을 설득해 그 곳에 머물렀더라면, 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아주머니가 자신의 첫 인상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면 앉아서 맥주라도 한 잔 먹고 가라고 권했더라면?
지금 생각해도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상상이다.
주인 아주머니가 젊은 친구들이 취향이 독특한 건지, 돈이 없는 건지 궁금해하며 어떤 물밑 작업을 벌였을지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무시무시한 곳에서 일단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 때가 대충 저녁 7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절한' 아주머니의 말대로 택시를 타고 신 시가지로 가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시각이었다.
우리는 근처에서 조금 더 서성이다가 괜찮은 곳을 찾지 못할 경우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날씨도 슬슬 추워지고 있어서 우리는 평소보다는 조금 빠르게 걸었다.
확실히 그 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약 600m 전방에 번화한 것처럼 보이는 거리가 있었다.
그 곳까지의 길 중간쯤이 어두컴컴하기는 했으나 시골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려니 생각하고 계속 걸었다.

거리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50m 정도 되는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문득 주위가 깜깜해진 것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거리를 중심으로 양 옆에 더 작은 골목길들이 나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의 입구엔 꼭 모텔 앞 주차장에 쳐져 있는 고무로 된 발이 우리의 시야로부터 골목 안의 풍경을 가리고 있었다.
발의 뒤로부터 정육점 진열대 색의 불빛이 회절되고 있었…….
앗차, we just activated their trap card!


낌새를 알아챈 나와 휘하의 일행은 더욱 더 빠른 속력으로 걸었다.
순식간에 '어두운 거리'에서 벗어난 우리는 원래 목적지의 입구에 있던 거대한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양키 시장'.
외국어와 한자어의 오묘한 조합이 줬던 그 강렬한 인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는 서둘러 그 근방을 벗어났다.
술은 한 잔도 먹지 않았지만 왠지 몽롱한 기분이었다.
쥬시 걸들과 데리헤루와 양키 시장의 거대한 카오스가 나의 숨을 가쁘게 조였기 때문일까.

양키시장
주소 경기 동두천시 생연동
설명
상세보기

적당한 장소 ㅡ 아마 양키 시장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ㅡ 에서 숙소 방향으로 유턴했다.
왔던 길을 다시 지나가려던 게 아니고,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다.
그 날의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 때 눈에 아주 익은 반가운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나의 제2의 고향 대전의 '이한결 생가'와도 같았던 그 곳, 투다리였다.
우리는 동두천은 투다리까지 간판만 붙여놓고 속에서는 다른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하며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지극히고 평범한 그냥 투다리였다.
투다리 세트를 시키고 담소를 나눴다.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와 미역국이 기똥차게 맛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우리가 있는 곳은 구 시가지이고, 보통 젊은 사람들은 신 시가지에서 논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 받았다.
장소를 잘못 찾아와도 이렇게 잘못 올 수가 없다며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가까스로 찾은 편안함이 참 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8시가 조금 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건너편의 슈퍼에서 돌아가는 길에 마실 것들을 좀 샀다.
돌아가는 길을 따져 보니 동두천을 관통하는 개천 ㅡ 이름은 지금도 모른다 ㅡ 을 따라가는 것이 헤매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루트였다.
초코우유와 생수를 장전하고, 산과 천에서 불어오는 초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출발했다.

천변에는 도로가 나름 잘 닦여 있어 차들이 아주 쌩쌩 달렸다.
방음벽 밑의 인도는 폭이 겨우 1m를 넘을까 한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은행 나무가 거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우리의 행군은 상당히 불편했다.
바닥에 난무하는, 은행들의 혈흔 낭자한 시체가 똥비린내를 풍겼다.
각종 고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순간이 되자 길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와 수지 출신의 빠른 91 남아는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왼편으로 개천을 건너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뎅 대구의 87년생 사나이는 이 길을 쭉 따라가다가 오른편으로 걲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갈린 의견을 절충하지 못한 우리는 결국 내기를 걸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나와 수지보이가 졌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났다.
사실 대구 사나이는 1호선 전철이 다니는 길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 위치를 토대로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
조금 좌절스러웠지만 내기는 내기.
나와 수지 청년은 치킨을 사기로 했다.
날짜는 바로 그 다음 날로.
장소는 우리가 아~까 오던 길에 본 호수식당 건너편의 매우 허름한 치킨 집으로.
언제 이런 자유로운 시간이 없어질지 모르는 우리에겐 당장 하루하루가 급했던 것이다.

거의 30분을 쉬지 않고 걸어서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가 투다리에 도착하기까지 방황했던 거리가 상당했다는 뜻이리라.
일찌감치 방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은 그 때까지 자지 않고 있었다.
하긴 우리가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녀봤자 숙소에는 밤 9시 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씻고 오후에 산 트럼프를 뜯었다.
원래 나의 계획은 즐겁게 하이로우를 치는 것이었는데 카드 놀이를 하려는 사람이 1명밖에 없었다.
6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9월 난지도의 바둑이 팀전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을 테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시간을 함부로 통제할 수는 없는 법.
결국 둘이서 원카드로 건곤일척을 겨루기로 했다.
처음에는 승자가 패자의 뺨따구를 한 대 후려치는 룰을 적용했으나 나의 상대 수지 맨이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거부해서 그 다음 날에 있을 치킨의 밤 행사의 비용을 독박 쓰는 것으로 규칙을 바꿨다.
결과적으로 2 대 2, 치열한 4합을 겨루고 끝났는데 중간에 약간의 착오가 생겨 ㅡ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ㅡ 그냥 내가 돈을 모조리 내기로 결정되었다.

상당히 길게 느껴진 하루였다.
중국집 '라이라이'부터 출발해 중앙 시장을 거쳐 양키 시장을 찍고 온 것도 하루를 길게 만들긴 했지만 그 사이에 있었던 웃지 못할 해프닝 때문에 더욱 피곤했다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한 판단이다.
자기 전에 동두천 답사대끼리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잠시 잊혀져 있던 편의점의 귀엽장한 알바생.
나는 평소 여자 사람과의 접촉이 많지 않은 꽃다운 나이의 수지 남자에게 연애로의 교두보를 확보해주고 싶어졌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일단 다음 날의 모든 계획에 앞서 알바생을 다시 보러가자는 합의를 봤다.
물론 여기에 나의 개인적인 흥미가 일절 개입되지 않았다고는 말한 적 없다.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동두천 답사기 8  (1) 2011.11.25
나의 동두천 답사기 7  (1) 2011.11.24
나의 동두천 답사기 6  (2) 2011.11.19
나의 동두천 답사기 5  (1) 2011.11.16
나의 동두천 답사기 4  (0) 2011.11.13
나의 동두천 답사기 2  (0) 2011.11.09
나의 동두천 답사기 1  (1) 2011.11.08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2) 2011.11.07
번역의 한계  (0) 2011.11.04
Red Faction : Armageddon  (0) 2011.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