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두천 답사기 7

| 2011. 11. 24. 04:30

차도남 컨셉을 위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입구가 훤히 보이는 1층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약속 시각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는데 천천히, 입 천장을 데지 않을 만한 속도로 아메리카노를 반 잔쯤 마시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가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내 맞은 편에 비어 있던 의자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원래 약속한 시각보다 약 5분 가량 늦었다.
의례적인 여성들의 약속 등장 시각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약속한 것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반어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최악을 보면서 현재의 악을 위안하는 것은 나와 상대방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내 입에서 처음 튀어나온 말은 '5분 늦었네요?' 비슷한 말이었다.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한 잔 시키라고 했고 까페 라떼인지 뭔지 한 잔 시키면서 자기 지갑을 꺼내길래 그 정도 돈은 있다고 하며 내가 돈을 냈다.

약 1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도중에 한 번 화장실에 다녀왔고, 그녀는 한 번 통화를 하러 ㅡ 나중에 들은 바로 통화도 하긴 했지만 카페 안이 너무 답답해서 바람도 쐴 겸 ㅡ 자리를 잠깐 비웠다.
전반적인 대화의 주제는 개개인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동두천의 생활상 같은 것이었다.
전편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그 17세 소녀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질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내 신분과 상황을 알고 있는 그녀의 입장에서 보는 나도 별 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나의 관심사를 솔직히 말하면, 일반적인 요즘 청소년의 놀이 문화와 동두천이라는 지역의 고유한 특성 정도였고, 그녀의 관심사를 추측해 보면 그냥 '오빠들' ㅡ 이라기에 나와 나의 일행의 나이는 너무 많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보다 연상의 남자를 의미한다고 치면 ㅡ 의 돈에 기대 한 번 놀아보는 것에 있었다.
서로의 관심사에 이처럼 격한 차이가 존재했기에 우리의 대화는 필연적으로 겉도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조금 이야기가 통했던 부분은 우연치 않게 겹친 그 작은 교집합에 불과했다.
그 이야기를 두서없이 정리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우선 동두천은 매우 좁은 동네였다.
특히나 유년기의 대한민국 국민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의 수가 수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의 네트워크는 특히나 더 좁은 편이었다.
베이지 체크 무늬 교복 치마를 입고 왔던 ㅡ 내가 다리를 훔쳐봤다는 뜻이 아니고 상의는 자켓으로 꽁꽁 싸매서 교복을 구분하는 수단이 치마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ㅡ 그녀에게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학생들, 카페 밖으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농담 삼아 친구들이냐고 물어봤는데, 그네들의 교복이 같은 것이든 다른 것이든 누군지 알고 있거나 최소한 몇 학년인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은, 내가 그 날 택시를 타기 전에 2만원을 뽑았던, 원래는 그녀가 일하고 있어야 할 그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던 남자가 그녀의 오빠였으며 방금 내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내려준 남자는 그의 친구라는 것이었다.
전혀 꺼림칙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는 느끼지 않았었는데 주변의 눈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뭐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 시선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그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 이야기도 나왔다.
그녀의 오빠가 몇 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두천이라는 도시에는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의 남녀가 어떤 식으로든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오븐에 빠진 닭을 먹으러 지행역 근처 신 시가지로 나갔을 때도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10대 소년 소녀를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들의 목적은 직업적인 성취 따위가 아닌 돈이다.
그들이 학업에 매진하는 대신 돈을, 그것도 대학생이면서 나름의 사회 경험을 해본 내가 보기에 포기하는 학업의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양의 돈을 벌고자 하는 이유는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오는 용돈이 없거나 적기 때문, 또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청소년에게 상업성으로 무장한 누군가가 무자비하게 쏟아내는 온갖 허영 조장 광고들 때문이리라.
그녀의 가족 사정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경우는 이 두 가지가 혼합된 것 같았다.
스스로를 짠순이라고 평했지만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신형 스마트폰이 주는 아이러니를, 그녀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중 5일,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 그녀는 당연히 모범생일리가 없었다.
중학교 시절까지 육상 선수를 하다가 최근에는 '이미지 관리' 때문에 운동을 그만 두었다는 그녀는 한 눈에 봐도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다.
길이도 통도 짧게 바싹 줄인 교복 치마하며 ㅡ 그녀는 이를 동두천에서 유행하는 교복 수선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ㅡ 내가 아는 그 어떤 여자보다 자연스러운 화장하며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런 디테일함이 종합적으로 양아치의 인상을 풍겼다.
나는 그녀에게 양아치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동두천에 교복 입고 다니는 여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대면 대부분이 알 거라는 말을 꽤나 자신감 넘치게 덧붙였다.
육상 선수 출신이라니 직접 치고 박는 주먹질에도 능해 보였다.
선배 언니들의 이야기, 재수 없는 동갑내기들, 인사 제대로 안 하는 후배들 이야기를 들으며 '반항하지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http://comicsreview.tistory.com/30


22세의 영길이라면 이런 소녀들을 좀 더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보통 중학교 3학년이면 술집에 드나들고, 담배는 기본이라는 동두천 10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술에 취해 길에서 넘어져 머리에 이만한 혹이 났다는 이야기, 봉사를 하러 간 꽃동네에서 시비가 붙은 학교와 큰 싸움이 벌어져 그 당시에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찍고 그 뒤 그 학교와 네이버 연관 검색어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 내게 주량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 등을 거리낌없이 하던 그녀를 보며 이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앞으로 필연적으로 걷게 될 길을 상상했다.
내가 동두천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좀 더 명망 높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의 일부는 그녀였다.
지금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절대 자부할 수 없지만 조금씩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되어 가면서 나의 힘으로, 조금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비록 그들이 지금 나아가고 있는 길은 바람직하지 않은 길이지만 그 온갖 방해를 뚫으며 자신의 길을 고집할 수 있는 그 에너지의 방향만 조금 틀어준다면 그들의 포텐셜은 음의 무한대에서 순식간에 양의 무한대로 발산하는 궤도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아저씨들이 흔히 보이는 단순한 오지랖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결국 동두천의 그녀에게 내가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 외에는.
보영여자고등학교 1학년.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함.
서울은 잘 모름.
취미는 요리.
직업적 희망은 딱히 없으나 파티쉐가 좀 끌림.
키는 167cm인데 계속 크는 중이라 집에서는 모델을 권함.
남자친구는 있으나 헤어질까 고민 중임.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더러 있었으나 모두에게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고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임.
방금까지 신 시가지에서 친구들과 놀고 왔고 곧 누군가와의 갈등 관계를 풀기 위해 출동해야 함.
버스만 타면 ㅡ 버스 계단을 오를 때라는 건지 의자에 앉을 때라는 건지는 나도 모름 ㅡ 교복 치마가 잘 튿어져서 교복 수선집 단골임.
내가 보기에 그녀는 허세기가 조금 있으나 악의적으로 말을 지어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 어휘력이나 문장 구사력이 또래에 비해 평균 이상이었으며 미래에 남자를 여럿 홀릴 눈 웃음을 가진 17세의 편의점 알바생이었다.

카페에서 나와 버스를 타는 그녀의 뒷모습에 치마 조심하라는 인사를 한 나는 출출함을 느껴 롯데리아(!)에 들어갈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기본료가 나온 택시에서 내려 숙소로돌아가 잔뜩 흥분의 도가니가 된 일행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고는 샤워기 물로 몸을 말끔히 씻고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고 내가 기억해야 할 것과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을 구분해 전자만을 취한 뒤 머리에서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하며 그 생각을 조금씩 굳고 단단한 것으로 만들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