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호빵을 건네준다.
뒤돌아선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모두가 우물쭈물한다.
다시 한 발자국 내딛는다.
여기서 그녀에게 다른 한 발자국을 더 허용하면 호빵맨이 내려준 모든 기회가 무산된다.
내가 입을 연다.
그녀가 뒤돌아본다.
일단은 됐다.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이제 와선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쪽에서 했던 말 중에 우리가 그녀의 팬이고 서울에서 와서 잠시 머물다 가는 객(客)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녀로부터 들은 말 중에 그녀가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이고 95년생이며 2002년 월드컵이 조금 기억나고 어제 트럼프를 사러 왔던 우리를 기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다.
주거니 받거니 대충 열 마디씩 이야기를 나눴다.
실내복 차림이었던 그녀가 슬슬 추위를 느끼는 게 보였다.
추위는 차치하더라도 다시 카운터로 돌아갈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위기였다.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갈 그 찰나, 달구벌의 무법자가 연락처를 물었다.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연락처를 주었다.
그가 이름을 물었다.
저 멀리 서울의 녹색 지하철을 생각나게 하는 푸르고 몽환적인 이름이었다.
우리는 고맙다고 했고 그녀는 아니라면서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하루의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더 이상 추위를 감당할 의지가 없었기에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을 이렇게 장황하게 쓰고 나니 얼핏 자정 무렵쯤이나 됐으리라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이는 나의 만연체가 본색을 완연하게 드러낸 결과물로 실제는 숙소에 돌아간 것이 저녁 9시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날의 원정대 말고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던 다른 일행들에게는 일단 그 날의 일을 완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어떤 포텐셜을 갖고 있는지 모르는 원석(原石)에 여러 명이 달려들어 사태가 주체할 수 없이 진행되어 버리는 것 ㅡ 마치 영화 ‘알파 독’에서처럼 ㅡ 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어렵게(?) 따낸 연락처였으므로 바로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마냥 보였다.
정중하게 자신을 밝히고 연락했다.
생각보다 적극성을 띤 반응이 돌아왔다.
몇 차례 더 그 적극성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그 덫과도 같은 재미에 빠져 너무 많은 소통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빼앗기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이 사람과의 관계에 무언가를 거창하게 투자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연락을 어떤 식으로 살려 나갈까 고민하던 차에 기회를 잘 살리면 아까 오빠닭에서 있던 2만원의 굴욕을 만회하고도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래 만남 약속을 잡은 다음에 모태 솔로의 그 남자 1호를 만남의 당사자로 떠밀어 버리는 것.
잘 모르는 여자와의 만남이라는 무기라면 2만원은 가볍게 상쇄할 수 있으리라 믿고 스케줄을 물었다.
불확실한 주말을 제외하면 바로 다음 날밖에 시간이 없었다.
나는 우리가 어차피 곧 떠나는 사람들임을 강조하며 다음 날 밤에 만나자고 했고 그녀는 연락처를 줄 때와 마찬가지로 순순히 승낙했다.
말투에서 아무런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당황시켰다.
연락을 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녀가 낯을 안 가리는 성격이든 남자를 원래 좋아하는 타입이든 모든 것을 떠나서 고등학교 1학년 생이 아닌가!
무려 17살이란 말이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져야 할 그 나이 대에 어울리는 행동이라고는 믿겨지지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그 날의 연락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운 나의 머리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원래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긍정적인 가정을 배제하는 편인 나는 그 때도 최악의 시나리오들만 생각해봤다.
그러나 상대방이 제 아무리 나쁜 의도를 가지고 못 되게 군다고 쳐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모든 위험의 싹을 제거해 신중하게 행동하면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나쁜 사람들도 아니고, 무슨 선량하지 못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들도 아니었다.
조금 비겁하게 말하면 사실 그녀를 만나게 될 사람도 어차피 내가 아니지 않나!
다음 날, 이 모든 계획을 듣고 기뻐할 남자 1호의 모습을 흐뭇하게 상상하며 잠에 들었다.
2011년 10월 27일 아침, 나는 믿었던 남자 1호의 거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여러 번 그를 설득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는 돌부처처럼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다.
그 침착함에 당황한 나.
그래도 당장 다가오는 저녁 약속에 어떻게든 대비를 해야 했다.
선택은 세 가지, 내가 만나든가, 다른 사람을 내세우든가, 안 만나든가.
결과적으로 보면 나머지 선택을 했더라도 지금 와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저 중의 하나가 여러 의미에서 최선이었고, 나는 그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날 만나기 전까지 아무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나는 아침부터 그녀와 연락했다.
아침부터의 그 연락을 통해 그녀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잘은 몰라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불량 학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그녀의 그런 비행적인 면에 힘입어 다시 가능성을 얻으며 앞다투어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더 우세했다.
일단 정해진 약속은 저녁 무렵에 보산역에서 보는 것이었다.
통금은 12시까지라고 했고 ㅡ 어차피 내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집은 보산역 근처라고 했다.
제대로 된 까페 하나 없는 보산역 근처에서는 할 일이 정말 없을 것이라고 판단, 일단 만나서 지행역 근처로 진출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얌전히 저녁까지 기다리는 것.
그 날의 일과가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모두에게 계획을 공개하고 자문을 구했다.
정황을 들은 사람들의 주류 의견은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도 과도하게 조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대비를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알아서 필터링했다.
돌이켜 봤을 때 나 스스로 하던 걱정이 굉장히 지나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내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들은 영화나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것들이었지 일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기엔 무리가 있는 것들이었나 보다.
그러고 놀던 중 그녀에게 약속을 조금 바꾸어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미리부터 신 시가지에서 나가서 놀게 된 듯 원래보다 조금 늦은 시각에 ‘구 버스터미널’이라는 곳으로 와달라고 했다.
‘구’라는 단어가 주는 요상한 구린내 ㅡ 이는 ‘구’ 시내에서 우리가 겪은 일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ㅡ 에 이것이 바로 호구(虎口)에 스스로 빠지는 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의가 제갈량과의 지긋지긋한 전투를 통해 제갈량의 전략의 핵심 ㅡ 점점 사마의 자신이 전투에 불리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 반대로 제갈량이 사마의 자신을 호구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 ㅡ 을 깨달았던 그 상황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억측이 아닐 수 없지만 당시에는 정말 별별 생각을 다 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기서 약속을 깨버린다면 사나이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게 되고 만다.
약속 시각에 맞춰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일하지 않는 그 편의점에서 현금 2만원을 장전하고 택시를 불렀다.
버스를 탔더라면 매우 간단했을 테지만 그 때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구 버스터미널로 가달라 하면서 그 주위에 뭐 있을 만한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이상하게 망설이다가 뭐 그럭저럭 있을 것이라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낌새가 수상했으나 별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창 밖의 풍경이 낯이 익었다.
핫차, 알고 보니 구 버스터미널은 구 시내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기사 아저씨의 망설임은 양키 시장 근처의 ‘그 곳’의 존재에서 기인한 것이렷다.
익숙한 곳, 최소한 한 번은 와 본 곳에 있다는 마음에 불안감이 많이 해소됐다.
택시는 기본료였다.
내린 자리에 카페 베네(!)가 있길래 그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때는 2011년 10월 27일 저녁이었다.
뒤돌아선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모두가 우물쭈물한다.
다시 한 발자국 내딛는다.
여기서 그녀에게 다른 한 발자국을 더 허용하면 호빵맨이 내려준 모든 기회가 무산된다.
내가 입을 연다.
그녀가 뒤돌아본다.
일단은 됐다.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이제 와선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쪽에서 했던 말 중에 우리가 그녀의 팬이고 서울에서 와서 잠시 머물다 가는 객(客)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녀로부터 들은 말 중에 그녀가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이고 95년생이며 2002년 월드컵이 조금 기억나고 어제 트럼프를 사러 왔던 우리를 기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다.
주거니 받거니 대충 열 마디씩 이야기를 나눴다.
실내복 차림이었던 그녀가 슬슬 추위를 느끼는 게 보였다.
추위는 차치하더라도 다시 카운터로 돌아갈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위기였다.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갈 그 찰나, 달구벌의 무법자가 연락처를 물었다.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연락처를 주었다.
그가 이름을 물었다.
저 멀리 서울의 녹색 지하철을 생각나게 하는 푸르고 몽환적인 이름이었다.
우리는 고맙다고 했고 그녀는 아니라면서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하루의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더 이상 추위를 감당할 의지가 없었기에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을 이렇게 장황하게 쓰고 나니 얼핏 자정 무렵쯤이나 됐으리라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이는 나의 만연체가 본색을 완연하게 드러낸 결과물로 실제는 숙소에 돌아간 것이 저녁 9시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날의 원정대 말고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던 다른 일행들에게는 일단 그 날의 일을 완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어떤 포텐셜을 갖고 있는지 모르는 원석(原石)에 여러 명이 달려들어 사태가 주체할 수 없이 진행되어 버리는 것 ㅡ 마치 영화 ‘알파 독’에서처럼 ㅡ 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어렵게(?) 따낸 연락처였으므로 바로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마냥 보였다.
정중하게 자신을 밝히고 연락했다.
생각보다 적극성을 띤 반응이 돌아왔다.
몇 차례 더 그 적극성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그 덫과도 같은 재미에 빠져 너무 많은 소통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빼앗기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이 사람과의 관계에 무언가를 거창하게 투자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연락을 어떤 식으로 살려 나갈까 고민하던 차에 기회를 잘 살리면 아까 오빠닭에서 있던 2만원의 굴욕을 만회하고도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래 만남 약속을 잡은 다음에 모태 솔로의 그 남자 1호를 만남의 당사자로 떠밀어 버리는 것.
잘 모르는 여자와의 만남이라는 무기라면 2만원은 가볍게 상쇄할 수 있으리라 믿고 스케줄을 물었다.
불확실한 주말을 제외하면 바로 다음 날밖에 시간이 없었다.
나는 우리가 어차피 곧 떠나는 사람들임을 강조하며 다음 날 밤에 만나자고 했고 그녀는 연락처를 줄 때와 마찬가지로 순순히 승낙했다.
말투에서 아무런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당황시켰다.
연락을 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녀가 낯을 안 가리는 성격이든 남자를 원래 좋아하는 타입이든 모든 것을 떠나서 고등학교 1학년 생이 아닌가!
무려 17살이란 말이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져야 할 그 나이 대에 어울리는 행동이라고는 믿겨지지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그 날의 연락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운 나의 머리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원래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긍정적인 가정을 배제하는 편인 나는 그 때도 최악의 시나리오들만 생각해봤다.
그러나 상대방이 제 아무리 나쁜 의도를 가지고 못 되게 군다고 쳐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모든 위험의 싹을 제거해 신중하게 행동하면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나쁜 사람들도 아니고, 무슨 선량하지 못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들도 아니었다.
조금 비겁하게 말하면 사실 그녀를 만나게 될 사람도 어차피 내가 아니지 않나!
다음 날, 이 모든 계획을 듣고 기뻐할 남자 1호의 모습을 흐뭇하게 상상하며 잠에 들었다.
2011년 10월 27일 아침, 나는 믿었던 남자 1호의 거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여러 번 그를 설득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는 돌부처처럼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다.
그 침착함에 당황한 나.
그래도 당장 다가오는 저녁 약속에 어떻게든 대비를 해야 했다.
선택은 세 가지, 내가 만나든가, 다른 사람을 내세우든가, 안 만나든가.
결과적으로 보면 나머지 선택을 했더라도 지금 와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저 중의 하나가 여러 의미에서 최선이었고, 나는 그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날 만나기 전까지 아무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나는 아침부터 그녀와 연락했다.
아침부터의 그 연락을 통해 그녀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잘은 몰라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불량 학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그녀의 그런 비행적인 면에 힘입어 다시 가능성을 얻으며 앞다투어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더 우세했다.
일단 정해진 약속은 저녁 무렵에 보산역에서 보는 것이었다.
통금은 12시까지라고 했고 ㅡ 어차피 내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집은 보산역 근처라고 했다.
제대로 된 까페 하나 없는 보산역 근처에서는 할 일이 정말 없을 것이라고 판단, 일단 만나서 지행역 근처로 진출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얌전히 저녁까지 기다리는 것.
그 날의 일과가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모두에게 계획을 공개하고 자문을 구했다.
정황을 들은 사람들의 주류 의견은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도 과도하게 조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대비를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알아서 필터링했다.
돌이켜 봤을 때 나 스스로 하던 걱정이 굉장히 지나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내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들은 영화나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것들이었지 일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기엔 무리가 있는 것들이었나 보다.
그러고 놀던 중 그녀에게 약속을 조금 바꾸어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미리부터 신 시가지에서 나가서 놀게 된 듯 원래보다 조금 늦은 시각에 ‘구 버스터미널’이라는 곳으로 와달라고 했다.
‘구’라는 단어가 주는 요상한 구린내 ㅡ 이는 ‘구’ 시내에서 우리가 겪은 일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ㅡ 에 이것이 바로 호구(虎口)에 스스로 빠지는 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의가 제갈량과의 지긋지긋한 전투를 통해 제갈량의 전략의 핵심 ㅡ 점점 사마의 자신이 전투에 불리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 반대로 제갈량이 사마의 자신을 호구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 ㅡ 을 깨달았던 그 상황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억측이 아닐 수 없지만 당시에는 정말 별별 생각을 다 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기서 약속을 깨버린다면 사나이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게 되고 만다.
약속 시각에 맞춰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일하지 않는 그 편의점에서 현금 2만원을 장전하고 택시를 불렀다.
버스를 탔더라면 매우 간단했을 테지만 그 때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구 버스터미널로 가달라 하면서 그 주위에 뭐 있을 만한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이상하게 망설이다가 뭐 그럭저럭 있을 것이라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낌새가 수상했으나 별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창 밖의 풍경이 낯이 익었다.
핫차, 알고 보니 구 버스터미널은 구 시내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기사 아저씨의 망설임은 양키 시장 근처의 ‘그 곳’의 존재에서 기인한 것이렷다.
익숙한 곳, 최소한 한 번은 와 본 곳에 있다는 마음에 불안감이 많이 해소됐다.
택시는 기본료였다.
내린 자리에 카페 베네(!)가 있길래 그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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