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한계

| 2011. 11. 4. 11:38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온 대하 역사 소설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가 지금과 같이 분화한 것은 거대한 탑의 공사 도중 갑자기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장자에 나오는 고사, 한단지보(邯鄲之步)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한단지보란, 조나라의 수도 한단 특유의 걸음걸이를 배우러 간 한 연나라 젊은이가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는 도중에 갑자기 혼란에 빠졌고 원래 걷는 법마저 잊어버려서 결국 고향까지 기어갔다는 이야기다.
순식간에 원래 사용하던 언어를 잊어버린다는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한 이야기다.
게슈탈트 붕괴와 같이 일시적인 혼란이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언어 체계 자체를 순식간에 전부 상실한다는 것은 나의 이성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이다.
게다가 그런 찰나의 순간 뒤에 사람들이 기존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를 각각 구사하게 된다는 뒷이야기까지 튀어나오면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하기사 소설에 나온 이야기의 진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시도였을지도.

개인적으로 언어의 분화에 대해선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주장했던 바에 동의하는 편이다.
언어의 분화는 결국 지역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 지역의 환경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에 종속되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번역과의 관계를 짧게 언급하자면, 보통 서구권 국가의 역서에서보다 일본, 중국 서적의 역서에서 더 훌륭한 번역이 이루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어의 발생과 전파가 책의 주제는 아니지만 그에 대한 간단한 개념을 얻고 싶다면 '총, 균, 쇠'를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그 외에도 대단히 흥미로운 논의가 넘치는 책이다.

도입부는 이 정도에서 마치자.
러셀의 명저 'The Problems Of Philosophy'와 '철학의 문제들'을 읽으며 서로 다른 언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우리가 흔히 번역[각주:1]이라고 하는 과정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
초, 중, 고등학교 교육 과정의 수동적인 언어 교육을 받을 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이 한계는 능동적인 언어 학습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점이리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변환, 즉 번역이 갖는 한계의 시작점은 두 언어의 그 어떤 단어도 정확한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갖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일대일 대응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중의적 사용의 경우를 제외하고, 하나의 단어는 문맥 속에서 그 단어가 가진 여러가지 뜻 중 하나를 의미한다.
'어떤 언어'의 단어 A가 a1, a2, a3라는 세 가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가 a1, a2, a3와 정확히 어울리는 '다른 언어'의 단어 B1, B2, B3를 찾아냈다.
따라서 우리는 A가 a1의 문맥으로 사용될 때 A라는 단어 대신 B1을, a2의 문맥에서는 A 대신 B2를, a3의 문맥에서는 B3를 대신 사용하면 된다.
이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평범한 사람이 A 대신에 사용된 B1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다는 가정을 하자.
'어떤 언어'의 사용자가 A를 보는 보며 드는 생각과 '다른 언어'의 사용자가 B1을 볼 때 갖는 생각은 두 사람이 도플갱어일지라도 절대 같을 수가 없는 법이다.
단어의 발음이 갖는 미묘한 운율감이나 개개 언어 속에서 그 단어가 나타내는 고유의 가치관,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복합적인 의미 등 복잡하디 복잡한 언어의 세계로 빠져들면 두 언어 사이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대일로 대응하는 두 단어는 존재할 수 없다.


두 언어의 그 거대한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단어의 음가를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다.
이는 예술 작품의 평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나마 이 방법이 가장 충실하게 원래 단어의 뜻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방법도 한계는 존재한다.
비슷한 문화권의 비슷한 뿌리를 가진 두 언어 사이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게 이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비록 스와힐리어와 대만 중국어, 영어와 한국어 ㅡ 그토록 종로와 강남으로 토익 공부를 하러 다니는 수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ㅡ 의 괴리는 상당히 크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postmodernism'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적는 것이 번역인가?
마틴 루터 킹의 저 유명한 연설의 첫 문장을 '아이 해브 어 드림'이라고 옮기는 게 훌륭한 번역인가?
대항해시대 2에서 이슬람 권의 NPC가 '앗살람 알레이쿰'이라고 인사하는 것이 번역이기는 할까?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이 정말 우스꽝스러워지리라고 생각되는 이 작업은 독음(讀音)이지 번역이 아니다.
사실상 이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없다.
원래 우리의 언어라는 녀석들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여기에 개인마다 같은 단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마저 고려에 넣는다면 도대체가 번역이라는 작업이 가능이나 한 것인지, 좋고 나쁜 번역이 있는지 옳고 그른 번역이 있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며 정신이 혼란스러워진다.
'I love you'라는 문장을 '피카피카츄'라고 번역하면 이것을 두고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아,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하는 가슴 절절한 감정을 일으키는 훌륭한 사랑 고백이 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선 회의주의적인 관점에서 번역이라는 활동을 살펴 보면 제기되는 문제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번역서는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토록 줄기차게 읽었던 외국 작가들의 명저에 대해 과연 나는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바의 몇 %나 온전히 받아들인 것일까.
작가의 의도를 담은 수많은 자잘한 장치와 그들이 풍기는 고유한 분위기를 번역가는 얼마나 잘 번역해냈을까.
여기에 언어 활동(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가 갖는 태생적 한계 ㅡ 소싯적에 이를 이명증에 빗대어 글을 쓴 적이 있다 ㅡ 와 조지 오웰, 노암 촘스키가 말하는 신어, 뉴스픽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언어의 의의에 드는 염세적이기까지 한 좌절감이 더해지면, 지금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머리엔 무슨 생각이 드는지에 대해 깊이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생기리라.
하지만 이 글은 그렇게 심층적인 글이 될 수 없다.
별로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다룰 생각도 없었고, 내게 그럴 만한 지적 역량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면 차선책이라도 찾는 것이 인지상정.
훌륭한 번역은 최대한 작가의 원문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면서 공리주의적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ㅡ 원문의 느낌을 살린다는 말에 작가의 예상 독자층을 예상하는 과정도 포함한다 ㅡ 그 느낌이 전파 되도록 하는 번역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번역을 시작하면 부딪히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보통 전자를 중시하는 번역법을 직역으로, 후자에 초점을 두는 번역법을 의역이라고 하는데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방법론 사이에서 최선의 중용을 찾는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직역과 의역 사이의 균형을 찾는다는 작업은 마치 시소와도 같아서 하나가 올라가면 다른 하나가 떨어지게 마련이고 균형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공!이라기보다 타협에 가까운 중간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급급하게 된다.

번역의 한계는 이토록 거대한 것이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성립하는 말이고, 번역서를 볼 때 역자가 누구인지 꼼꼼하게 따지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충분히 중요한 일이다.
고행을 감수하며 세계에 산재한 지식을 우리에게 친숙한 언어로 소개하는 모든 번역자에게 그 노고에 대한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바.
  1. 같은 의미로 번역 대신 해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번역과 해석이라는 두 단어를 놓고 그 차이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언어에 대해 해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의 대부분은 사실 번역이라고 해야 더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동두천 답사기 4  (0) 2011.11.13
나의 동두천 답사기 3  (0) 2011.11.11
나의 동두천 답사기 2  (0) 2011.11.09
나의 동두천 답사기 1  (1) 2011.11.08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2) 2011.11.07
Red Faction : Armageddon  (0) 2011.10.15
어느 날 밤  (0) 2011.10.09
가을의 문턱에 선 나의 근황  (2) 2011.10.08
사랑 경험의 중요성  (0) 2011.09.28
한강 난지 캠핑장 2차 원정기  (0) 2011.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