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나 하

| 2012. 2. 2. 14:23

술술 읽히는 듯 하면서도 마냥 빨리 읽지만은 못했던 묘한 표정의 하권이었다.

http://blog.naver.com/swimchj/50093172723


하권의 초반은 여전히 기억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 얌보의 기억 여행의 연장선이다.
양상도 비슷하다.
진행 자체가 전 권의 키워드였던 안개에 쌓인 듯하여 이야기가 어떤 끝을 향해 가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안개도 보통 안개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면 지난 번에 제기했던 "'로아나'가 단순히 흘러간 과거와 그 과거에 살던 에코 자신의 유년기에 대한 연민과 노스탤지어를 담은 송가일 수도 있"냐?는 질문에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움베르토 에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 외에 다른 문학적 장치를 구상해 독자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주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솔라라는 아직까지 진정으로 나에게만 속한 어떤 것을 되돌려 주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무엇을 읽었는지 알아냈다. 하지만 그건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숱하게 읽은 것들이었다. <깨지지 않는 유리잔> 이야기와 할아버지의 멋진 일화(하지만 나와 무관한 사건)를 제외하면, 나의 고고학적 탐사는 고작 그것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 한 세대의 어린 시절을 다시 경험한 것이었다.

하지만 책이 마지막 장으로 접어들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에코는 영영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릴 것 같았던 이야기의 물 줄기를 단숨에 틀어 소설이 궁극적으로 카타르시스로 나아가게끔 만든다.
미완으로 끝난 기억의 단편들의 양이 방대했던 만큼 얌보의 기억이 드디어 거대한 퍼즐로 맞춰질 때 독자가 받는 카타르시스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헬름 협곡에서 간달프가 이끄는 에오메르의 기마 군대가 우르크하이의 옆구리를 치는 그런 파죽지세로 기억의 안개를 걷어버린다.
이 느낌을 영화 '디 아더스'의 엔딩 장면에 비유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진짜 명장면이다. http://icecraft.tistory.com/251


여기서 재고할 것이 있다.
과연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어린 날이 투영된 과거에의 향수만을 전하기 위해 '로아나'를 쓴 것일까?
소설이 이 대목에 다다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는 현재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이탈리아의 과거사를 전하고, 그라놀랴라는 인물의 입을 빌어 기존의 역사, 이데올로기, 가치관에 대하여 뼈가 담긴 이야기를 가차없이 내뱉는다.
역시나 종교에 대한 언급이 여기서 빠질 수 없는데 하느님을 파시스트로 일컫고, 십계명을 그 파시즘의 구현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은 뻥이 아니라 진짜 재밌다.
그라놀랴 또는 에코가 하는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존 러스킨의 주장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ㅡ 해석하는 사람 맘에 따라 ㅡ 십계명에 반(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그렇다면 비록 지난 번에는 꽤 강하게 부정했으나, 결국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그가 무신론으로의 전향이 완벽히 끝난 상태에서 썼다는 것이 진짜 사실이라는 뜻이 되겠다.

자아 이쯤 되었으니,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계명조차 보기와 달리 악의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야. 그래, 맞아. 이 계명에도 저의가 있어. 남의 것을 훔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의 사유 재산에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마지막 십계명은 바로 그 시새움을 금지하고 있어. 네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탐내지 말라. 사유 재산의 질서를 존중해라 하고 말이야. 이 세상에는 단지 상속을 받았다는 이유로 넓은 밀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서 그 밭을 가는 사람도 있어. 밭을 가는 사람은 주인의 밭을 탐내면 안 돼. 그렇게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가진 사람 것을 탐내면,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고 혁명이 일어나거든. 열 번째 계명은 바로 그 혁명을 금지하고 있는 셈이지.


아래와 같은 이야기도 흥미롭다.
기성의 발상을 완전히 전복시켜 인물 ㅡ 인물? 신도 인물(人物)인가? 뭐 일단 편의상 그렇다고 치자 ㅡ 의 성격을 재정립하고, 관계 설정을 새롭게 함으로써 결과는 같지만 그 과정의 역사를 아예 뒤바꿔 버리는 것.
이러니 움베르토 에코가 교황청과 신자들로부터는 미움을,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사랑을 받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예수는 하느님의 악함을 벌충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어. 하느님이 악하다면, 우리라도 선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자,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말자, 병자를 돌보자,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밀자,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니 우리끼리라도 서로 도우며 살자, 그렇게 가르친 거야. 예수의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겠니? 그 생각이 하느님을 얼마나 화나게 했을지 상상해봐. 하느님의 진정한 적은 악마가 아니야. 하느님과 진정으로 맞섰던 존재는 예수뿐이었어. 예수는 우리 불쌍한 중생들의 유일한 친구야.

이렇게 후반부에 서술되는 어린 시절 얌보의 이야기는 그가 다른 소설들, 특히나 '푸코의 진자'에서 벨보의 이야기와 이전에 발표한 이런 저런 수필들을 고려했을 때 에코가 어린 시절 직접 겪은 경험의 각색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진다.
나 같은 범인이 몇 안 되는 표본들로부터 이런 결론을 감히 도출할 수 있었던 것 장인 정신이라 칭해도 될 이세욱의 번역 덕이다.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세세한 면까지 독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적은 그에 대한 글을 찾다가 그의 번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만한 인터뷰를 찾았다.
인터뷰를 한 번 쓰윽 훑고 나면 이세욱을 번역가가 아닌 하나의 훌륭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되리라.

결말에 대해선 뭐라 할 말이 없다.
자신의 의식이 어떤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자신이 혹시 수조 속 뇌 가설의 피험체는 아닌지, 장자의 호접몽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 꿈 속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려하다가 느닷없이 기억 여행을 총정리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난잡하고도 질서정연한 축제의 장이 열린다.
이탈리아든 이탈리아인이든 1940, 1950년대든 각각이 갖는 고유한 정서는 단 하나도 함양하지 못한 내가 이해하기에 '로아나'의 아웃트로는 난해하다.
그가 머리로 쓴 소설들에 나오는 모르는 내용들이야 그 때 그 때 머리에 집어넣었다가 잊으면 그만이지만, 그의 가슴에 든 내용으로 쓴 소설들은 애초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공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뜨거울 것 같은 그의 가슴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엔 소설이 아닌 그의 수필을 읽어볼 참이다.

책에 직접 자신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더랬다. 와! 이 사람도 이렇게 귀여운 꼬마일 때가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