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색다른 사람의 색다른 책을 읽고 싶던 차에 최근 나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과 알랭 드 보통에 대한 호감을 더해 읽기로 결정한 책.
전혀 무슨 내용의 책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 요상한 제목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엔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짧은 단어로 줄이자면 그냥 경제학 논문이다.
하지만 논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철옹성 같은 딱딱함과 불가침성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갱제라고는 진짜 쥐뿔만큼도 모르는 나도 이 책이 전하려는 핵심적인 내용들을 캐치하는데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 러스킨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 다르게 말하면 다른 여러가지 이야기들의 기저에 깐 의견을 나의 입장에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러스킨은 근대적인 기계적 사고관에 입각한 고전주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벗어난,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 현대적 개념의 경제 관념을 주창하며 인간 ㅡ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닌, 인본주의, 휴머니즘, 존엄성 따위와 비슷한 느낌의 용법이다 ㅡ 과 생명을 중시하는 경제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짧은 인용구를 언급하는 것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시되는 수단은 ㅡ 어떤 의미에서 이 수단이 하나의 목적으로서 서술되었을 수도 있다 ㅡ 전인적인 인간이라는 다소 이상적인 개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바른 경제 윤리와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사고 방식을 가르쳐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생겨난 경제학이라는 학문 연구와 그로 인해 생기는 각종 문제의 해결책을 그 뿌리인 사람에서 찾는 자세는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에서 역설하던 바람직한 학문의 연계다.
러스킨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분히 싸움꾼적인 기질을 보이며 우리가 여태까지 걸어온 길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나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가장 심한 편인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애덤 스미스와 데이빗 리카도가 이끄는 고전주의 경제학을 무참히 공격한다.
이미 위에서 주장한 대로 그의 관심사가 경제적 정의 구현에 있는 것이라면, 러스킨의 경제학은 사람을 무작정 부자로 만드는 학문이 아니다.
개인의 선보다 공공의 선을 중시하되 결과론적인 면과 방법론적인 면 둘 다 그가 주장하는 "정의"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러스킨의 인간의 경제학이요, 생명의 경제학이다.
이런 논지의 흐름은 자연히 경제학에 결과보다 과정을, 목적보다는 수단을 강조하는 성질을 부여하게 한다.
묘하게, 그러면서도 격하게 감정 이입이 되는 부분이다.
대충 정리해서 이 정도다.
책 크기도 다른 책에 비해서 작거니와 분량도 얼마 되지 않은 책이라 탈탈 털어 요점을 정리하면 이 정도 분량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순전한 구라고, 솔직히 이 "경제학 논문"은 내게 좀 버거운 읽을 거리였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경제에 대해 아는 건 중고등학생이라도 알 만한 수준의 것들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원래 이 사람의 글이 조금 만연체를 띠고 있는지 번역한 사람의 능력이 조금 후달린 건지 글 자체가 조밀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앞의 두 이유와는 조금 다르고 꼭 언급하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고 느끼기에 조금 길게 떠드려고 한다.
내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읽으며 가장 거슬려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양의 성경 인용이었다.
상대적인 비율을 봤을 때 직접 인용도 많았지만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감도 잡을 수 없는 간접 인용도 판을 치고 있었다.
번역자가 신약 석사와 목회학 석사 학위의 배경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단테의 '신곡' 이야기까지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이 책을 차지게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까지는 문제도 아니다.
성경을 인용하다고 후진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인용한 이 세상의 모든 작품은 다 후지다!"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이 존 러스킨이라는 작자가 간접적으로 독자들을 종교적인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나의 입장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평의 어투가 비아냥조로 ㅡ 대충 "논지는 대체로 훌륭하나 이 고리타분한 예술광은 결국 어두운 등잔 밑을, 그것도 진짜 칠흑 같이 어두운 그 곳을 보지 못했다." 비슷한 주제. 결정되었던 것은 다 이 세 번째 이유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정말 바보 천치 같은 일을 저지를 뻔했던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읽은 러스킨 연보에서 엄청난 단어를 발견하고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다.
그가 청혼한 집안으로부터 무신론적인 태도 때문에 거절을 당했다는 문장을 봤던 것이다.
두루두루 검색을 한 결과, 존 러스킨은 원래는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집필하기 직전의 여행에서 자신의 종교를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집필 시점이 비록 무신론적인 신념을 갖기로 마음을 먹은 후일지라도 오랜 기간 내려온 관성적인 종교적 신념이 그의 서술 방향을 내가 느꼈던 그 칙칙함으로 이끌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신론자로 삶을 마감했으나 원래는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띤 사람이었고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그 과도기에 절묘하게 낀 작품이라 찝찝한 면이 찌꺼기처럼 존재한다는 말.
경제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읽으면 더 좋을 책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생명으로의 환원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냥 읽어도 좋은 책이다.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그 찝찝한 면만 살짝 덮어두고 읽을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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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무슨 내용의 책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 요상한 제목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엔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본 논문들에서 다루어질 주요 논제들을 정리하자면 바로 '부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라 하겠다.
그러니까 짧은 단어로 줄이자면 그냥 경제학 논문이다.
하지만 논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철옹성 같은 딱딱함과 불가침성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갱제라고는 진짜 쥐뿔만큼도 모르는 나도 이 책이 전하려는 핵심적인 내용들을 캐치하는데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 러스킨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 다르게 말하면 다른 여러가지 이야기들의 기저에 깐 의견을 나의 입장에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러스킨은 근대적인 기계적 사고관에 입각한 고전주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벗어난,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 현대적 개념의 경제 관념을 주창하며 인간 ㅡ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닌, 인본주의, 휴머니즘, 존엄성 따위와 비슷한 느낌의 용법이다 ㅡ 과 생명을 중시하는 경제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짧은 인용구를 언급하는 것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생명이 곧 부富다" 이 생명은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다.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 내는 국가이고, 가장 부유한 이는 그의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1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시되는 수단은 ㅡ 어떤 의미에서 이 수단이 하나의 목적으로서 서술되었을 수도 있다 ㅡ 전인적인 인간이라는 다소 이상적인 개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바른 경제 윤리와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사고 방식을 가르쳐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생겨난 경제학이라는 학문 연구와 그로 인해 생기는 각종 문제의 해결책을 그 뿌리인 사람에서 찾는 자세는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에서 역설하던 바람직한 학문의 연계다.
건달의 역사를 조사해 본 사람은 그들이 공장에서 출고된 제조품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역으로 그런 계층의 생산을 부추기는 경제학의 시스템이 갖는 오류를 고발하는 증거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사회 부적응자들을 쉬쉬하며 억제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기보다는,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학교를 개혁하자, 그러면 감옥을 개혁할 필요는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전도유망한 사업이 아닐까?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금 말하는데, 독자들의 깊은 사려에 맡겨두려고 한다. 아니, 나는 감히 영국이 마침내 존재가 아닌 소유로서의 부에 대한 모든 사상들을 그 발상지인 미개한 족속들에게 되돌려 주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올 먼 장래의 그날을 꿈꾸어 본다.
러스킨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분히 싸움꾼적인 기질을 보이며 우리가 여태까지 걸어온 길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나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가장 심한 편인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애덤 스미스와 데이빗 리카도가 이끄는 고전주의 경제학을 무참히 공격한다.
이미 위에서 주장한 대로 그의 관심사가 경제적 정의 구현에 있는 것이라면, 러스킨의 경제학은 사람을 무작정 부자로 만드는 학문이 아니다.
개인의 선보다 공공의 선을 중시하되 결과론적인 면과 방법론적인 면 둘 다 그가 주장하는 "정의"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러스킨의 인간의 경제학이요, 생명의 경제학이다.
이런 논지의 흐름은 자연히 경제학에 결과보다 과정을, 목적보다는 수단을 강조하는 성질을 부여하게 한다.
묘하게, 그러면서도 격하게 감정 이입이 되는 부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렇기에 경제학에서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각 개인이 '절대적으로' 돈을 최대한 많이 버는 기술도 필요할 뿐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돈을 적게 벌도록 조장하는 기술도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즉, 부자가 되는 기술을 집약하면 이렇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서 불평등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라."
모든 학문과 기술은 그들의 적인 무지와 아둔함을 타파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거늘, 오직 이 학문만은 예외다. 이 학문만은 유독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여 무찔러야 할 그 적인 무지를 오히려 널리 전파하고 그 생명을 연장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학문만은 별스럽게도 암흑의 학문이요, 그렇기에 남의 집 자식이나 다름없다. 신성한 아버지에게 나온 학문이 아니요 암흑의 아버지에게 나온 학문으로 ,이 아버지에 대해 말하자면 그 자녀들에게 돌을 떡으로 바꾸라고 종용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떡을 돌로 바꾸는 일에 종사하고 있고, 그 자녀가 생선을 달라고 요구해도 그의 영지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않기에 뱀을 줄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대충 정리해서 이 정도다.
책 크기도 다른 책에 비해서 작거니와 분량도 얼마 되지 않은 책이라 탈탈 털어 요점을 정리하면 이 정도 분량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순전한 구라고, 솔직히 이 "경제학 논문"은 내게 좀 버거운 읽을 거리였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경제에 대해 아는 건 중고등학생이라도 알 만한 수준의 것들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원래 이 사람의 글이 조금 만연체를 띠고 있는지 번역한 사람의 능력이 조금 후달린 건지 글 자체가 조밀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나 : 경제학 = 조선일보 : 요리
세 번째 이유는 앞의 두 이유와는 조금 다르고 꼭 언급하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고 느끼기에 조금 길게 떠드려고 한다.
내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읽으며 가장 거슬려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양의 성경 인용이었다.
상대적인 비율을 봤을 때 직접 인용도 많았지만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감도 잡을 수 없는 간접 인용도 판을 치고 있었다.
번역자가 신약 석사와 목회학 석사 학위의 배경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단테의 '신곡' 이야기까지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이 책을 차지게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까지는 문제도 아니다.
성경을 인용하다고 후진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인용한 이 세상의 모든 작품은 다 후지다!"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이 존 러스킨이라는 작자가 간접적으로 독자들을 종교적인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나의 입장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평의 어투가 비아냥조로 ㅡ 대충 "논지는 대체로 훌륭하나 이 고리타분한 예술광은 결국 어두운 등잔 밑을, 그것도 진짜 칠흑 같이 어두운 그 곳을 보지 못했다." 비슷한 주제. 결정되었던 것은 다 이 세 번째 이유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정말 바보 천치 같은 일을 저지를 뻔했던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읽은 러스킨 연보에서 엄청난 단어를 발견하고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다.
그가 청혼한 집안으로부터 무신론적인 태도 때문에 거절을 당했다는 문장을 봤던 것이다.
두루두루 검색을 한 결과, 존 러스킨은 원래는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집필하기 직전의 여행에서 자신의 종교를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집필 시점이 비록 무신론적인 신념을 갖기로 마음을 먹은 후일지라도 오랜 기간 내려온 관성적인 종교적 신념이 그의 서술 방향을 내가 느꼈던 그 칙칙함으로 이끌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신론자로 삶을 마감했으나 원래는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띤 사람이었고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그 과도기에 절묘하게 낀 작품이라 찝찝한 면이 찌꺼기처럼 존재한다는 말.
경제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읽으면 더 좋을 책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생명으로의 환원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냥 읽어도 좋은 책이다.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그 찝찝한 면만 살짝 덮어두고 읽을 수 있다면 말이다.
-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Life, including all its powers of love, of joy, and of admiration. That country is the richest which nourishes the greatest number of noble and happy human beings; that man is richest who, having perfected the function of his own life to the utmost, has always the widest helpful influence, both personal, and by means of his possessions, over the lives of others." 원문으로 읽었을 때의 느낌이 훨씬 더 역동적이라 위키피디어에서 인용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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