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전쟁'을 읽은 뒤 레퍼런스로 읽을 책 목록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 중 처음으로 읽게 된 책.
리처드 도킨스의 책이야 이미 여럿 읽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읽게 되었다.
책을 쓰윽 쓱 읽어보면 ㅡ 사실 쓰윽 쓱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ㅡ 왜 이 책이 인간과 종교를 다루는 책에서 그렇게 많이 언급이 되었는지 바싹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각 교수들의 의견이 어떤 맥락이었는지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통섭' 정도의 책이라면 차세대 고전의 자리를 꿰차는 것도 머지 않은 듯.
최재천 교수의 옮긴이 서문이 책의 시작부라는 기가 막힌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consilience라는 영어 단어를 통섭(統攝)으로 옮기기까지의 짧지만 고뇌에 찬 과정을 시작으로, 통섭의 개념을 간략하게 밝힌 뒤 그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여태까지 읽어본 서문 중 가장 뛰어난 문장을 썼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통섭'이라는 책이 훌륭할 수 있는 이유는 최재천 교수와 장대익 교수의 눈부신 번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원전이 영어라는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끔 자연스러운 단어와 문장을 구사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 대한 흥미를 물씬 느끼며 윌슨의 한국어판 서문을 잽싸게 읽으면 드디어 통섭의 경지에의 거대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
다른 모든 논의에 앞서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의 지혜가 대두되어야 할 이유를 말한다.
그리고는 우선 과학사적 견지에서 통섭 사상의 근본을 살핀다.
윌슨은 통섭의 근본을 계몽사상에서 찾고 있다.
마르키드 콩도르세의 인생 전반으로 서두를 떼면서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 등의 이야기로 계몽사상의 전개 과정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여러 사상가들과 그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논리에 따라 계몽사상이 어떻게 부침을 겪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윌슨에 따르면 결국 이 계몽사상은 그것의 전개 과정에서 낭만주의라는 거대한 반작용을 만들었고, 각 학문의 극단적 분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낭만주의는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졌고 그 포스트모더니즘은 최근에 들어 합리적 사고를 여러 방면에서 위협하고 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존재의 필요성이 없다거나 그것이 필요악이라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지만 윌슨은 냉철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맞서는 자연과학의 역할을 강조하며 주제를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으로 옮긴다.
4장 자연과학부터 윌슨은 자신이 주장하는 통섭에서 자연과학이 맡아야 할 주체적인 역할을 대놓고 강조하기 시작한다.
전 장에서 이어진 계몽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과학과 결부지어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과 그런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 같지만 윌슨은 결국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통해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영역을 극적으로 넓힌 자연과학을 숙원적인 질문에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로서 제시한다.
비록 객관적 진리에의 맹목적인 추구는 절대주의로 이어지게 되리라는 경계는 늦추지 않고 있으나 바로 이 대목부터 자연과학자인 윌슨의 어쩔 수 없는 과학 중심주의적 사고가 드러난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라고 이름 붙여진 5장까지를 대충 이 책의 전반부라고 볼 수 있다.
저자 윌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리아드네 실타래의 비유로 여태까지 등장한 통섭의 개념을 한 번 정리한다.
몽사(夢蛇)로 이야기를 꺼내 꿈으로 화제를 전환하여 생물학과 심리학, 사회과학 등의 이야기를 한 번에 묶어낸다.
복잡성 원리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소개하며 아직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은 멀었지만 언젠가 그 끝에 도달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계몽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인간 이성의 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이다.
그 날은 언젠가 온다.
6장부터 11장까지, 거의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 본론은 사실 통섭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파악했다면 꼭 읽을 필요까지는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생물학자들의 서적이 그렇듯 그가 주장하는 내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우리가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 그리고 예술, 윤리, 종교 등은 자연과학적인 고찰이 부재했기 때문에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각각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학문들 ㅡ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과학이라는 탄탄한 기반을 뿌리치는 다른 분야의 학문들이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의 지혜를 갖춰야 한다는 것.
거기에 이와 같은 과정은 가까운 장래에는 어렵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회의론이 아닌 긍정론을 제시하는 것 정도다.
이런 식으로 그의 의견에 썩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달래는 수단을 만들어둔 것은 다소 논지를 흐리거나 만연하다는 인상을 줄 때가 가끔 있다.
미련하게 책 읽기로 유명한 나는 이 방대한 지식의 파이를 꾸역꾸역 먹었는데, 게 중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그 단편들을 나열하고 넘어가련다.
책의 마지막 장인 12장은 결론이다.
통섭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아우르고 실질적으로 이런 학문의 통섭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하는 장이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생명의 편지'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맨 위에서 처음으로 인용한 부분에서 제기되었던 인간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의 형식을 띠고 있다.
자연 선택이 아닌 사회적 선택의 진화 과정에 이르게 된, 아니 바로 그 경지를 목전에 둔 우리 인간이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그 심오한 주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내리기 위해 우리는 통섭의 지혜를 반드시 깨우쳐야 하겠다.
이 책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섭의 개념을 무시한 과학 중심주의자의 오만한 글 쓰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설사 그런 비판이 대중적인 타당성을 얻는 한이 있더라도 책 '통섭'이 지니는 가치는 절대 떨어질 일이 없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이야 이미 여럿 읽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읽게 되었다.
책을 쓰윽 쓱 읽어보면 ㅡ 사실 쓰윽 쓱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ㅡ 왜 이 책이 인간과 종교를 다루는 책에서 그렇게 많이 언급이 되었는지 바싹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각 교수들의 의견이 어떤 맥락이었는지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통섭' 정도의 책이라면 차세대 고전의 자리를 꿰차는 것도 머지 않은 듯.
최재천 교수의 옮긴이 서문이 책의 시작부라는 기가 막힌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consilience라는 영어 단어를 통섭(統攝)으로 옮기기까지의 짧지만 고뇌에 찬 과정을 시작으로, 통섭의 개념을 간략하게 밝힌 뒤 그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여태까지 읽어본 서문 중 가장 뛰어난 문장을 썼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통섭'이라는 책이 훌륭할 수 있는 이유는 최재천 교수와 장대익 교수의 눈부신 번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원전이 영어라는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끔 자연스러운 단어와 문장을 구사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 대한 흥미를 물씬 느끼며 윌슨의 한국어판 서문을 잽싸게 읽으면 드디어 통섭의 경지에의 거대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
거대한 여정에 오르고 싶다. http://magazinej.tistory.com/550
다른 모든 논의에 앞서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의 지혜가 대두되어야 할 이유를 말한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간 복지에 어떻게 중요한가?
모든 대중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의회에 계류중인 법률의 절반 정도는 중요한 과학 기술적 요소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매일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이 쟁점들 중 대부분, 예컨대 인존 갈등, 무기 경쟁, 인구 과잉, 낙태, 환경, 가난 등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이 통합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이 실재 세계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는 우선 과학사적 견지에서 통섭 사상의 근본을 살핀다.
윌슨은 통섭의 근본을 계몽사상에서 찾고 있다.
마르키드 콩도르세의 인생 전반으로 서두를 떼면서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 등의 이야기로 계몽사상의 전개 과정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여러 사상가들과 그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논리에 따라 계몽사상이 어떻게 부침을 겪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윌슨에 따르면 결국 이 계몽사상은 그것의 전개 과정에서 낭만주의라는 거대한 반작용을 만들었고, 각 학문의 극단적 분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이 계몽사상의 꿈은 낭만주의의 유혹 앞에서 시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제까지 과학이 인간 마음의 물리적 기초를 탐구하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계몽사상의 약속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계몽사상이 낭만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 가지 형편없는 이유가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낭만주의자라서 신화와 도그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를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말이다.
낭만주의는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졌고 그 포스트모더니즘은 최근에 들어 합리적 사고를 여러 방면에서 위협하고 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존재의 필요성이 없다거나 그것이 필요악이라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지만 윌슨은 냉철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맞서는 자연과학의 역할을 강조하며 주제를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으로 옮긴다.
4장 자연과학부터 윌슨은 자신이 주장하는 통섭에서 자연과학이 맡아야 할 주체적인 역할을 대놓고 강조하기 시작한다.
전 장에서 이어진 계몽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과학과 결부지어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과 그런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 같지만 윌슨은 결국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통해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영역을 극적으로 넓힌 자연과학을 숙원적인 질문에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로서 제시한다.
비록 객관적 진리에의 맹목적인 추구는 절대주의로 이어지게 되리라는 경계는 늦추지 않고 있으나 바로 이 대목부터 자연과학자인 윌슨의 어쩔 수 없는 과학 중심주의적 사고가 드러난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라고 이름 붙여진 5장까지를 대충 이 책의 전반부라고 볼 수 있다.
저자 윌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리아드네 실타래의 비유로 여태까지 등장한 통섭의 개념을 한 번 정리한다.
몽사(夢蛇)로 이야기를 꺼내 꿈으로 화제를 전환하여 생물학과 심리학, 사회과학 등의 이야기를 한 번에 묶어낸다.
복잡성 원리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소개하며 아직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은 멀었지만 언젠가 그 끝에 도달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계몽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인간 이성의 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이다.
그 날은 언젠가 온다.
그저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릴 뿐. http://blog.naver.com/caramelholic/90077861385
6장부터 11장까지, 거의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 본론은 사실 통섭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파악했다면 꼭 읽을 필요까지는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생물학자들의 서적이 그렇듯 그가 주장하는 내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우리가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 그리고 예술, 윤리, 종교 등은 자연과학적인 고찰이 부재했기 때문에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각각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학문들 ㅡ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과학이라는 탄탄한 기반을 뿌리치는 다른 분야의 학문들이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의 지혜를 갖춰야 한다는 것.
거기에 이와 같은 과정은 가까운 장래에는 어렵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회의론이 아닌 긍정론을 제시하는 것 정도다.
이런 식으로 그의 의견에 썩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달래는 수단을 만들어둔 것은 다소 논지를 흐리거나 만연하다는 인상을 줄 때가 가끔 있다.
미련하게 책 읽기로 유명한 나는 이 방대한 지식의 파이를 꾸역꾸역 먹었는데, 게 중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그 단편들을 나열하고 넘어가련다.
책의 마지막 장인 12장은 결론이다.
통섭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아우르고 실질적으로 이런 학문의 통섭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하는 장이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생명의 편지'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맨 위에서 처음으로 인용한 부분에서 제기되었던 인간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의 형식을 띠고 있다.
자연 선택이 아닌 사회적 선택의 진화 과정에 이르게 된, 아니 바로 그 경지를 목전에 둔 우리 인간이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그 심오한 주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내리기 위해 우리는 통섭의 지혜를 반드시 깨우쳐야 하겠다.
이 책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섭의 개념을 무시한 과학 중심주의자의 오만한 글 쓰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설사 그런 비판이 대중적인 타당성을 얻는 한이 있더라도 책 '통섭'이 지니는 가치는 절대 떨어질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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