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안산을 다녀오다

| 2011. 6. 9. 14:16

최근 집에 있는 기간 중에 자발적으로 건강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2~3주전부터 구상해오던 뻘 프로젝트를 오늘에서야 시행했다.

사실 오늘 원래 하려던 뻘 프로젝트는 혼자서 조조 영화를 보러갔다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핸드폰 시스템을 바꾼 것을 깜빡하고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 다소 늦게[각주:1] 일어난 것도 있고, 날씨가 해도 안 뜬 것이 선선해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를 보러 가기보다 산에 올라가자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파워 블로거를 꿈꾸는 이한결(24세)은 이 과정을 사진으로 남겨서 블로그에 올려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몇 달만에 방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카메라에 건전지를 넣고 현재 시각 설정을 했다.

어떤 상황에도 대처해야 하는 산악인의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나는 아침을 먹었다.

비장미가 느껴지는 산악인의 조촐한 아침상. 두부 부침과 같이 먹으려고 그 모든 귀찮음과 중력을 거슬러 양념장까지 꺼낸 것을 보면 오늘 아침 나의 마음가짐은 평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산악인이고 자시고 설거지는 하고 나가야지.


고작 이런 사진이나 찍으려고 카메라에 건전지를 넣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옷을 입었다.
남자 아웃도어 아웃핏의 종결자는 블루 진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만 안 했더라도 이번 산행이 그렇게 찝찝하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어쨌든 나는 청바지에 적당한 운동화, 회색 PK티를 입고 달랑 카메라 하나 든 백팩을 메고 나갔다.
왠지 카메라만 들고 나가기엔 이 카메라 자체가 주머니에 들어갈만한 크기도 아니요, 그렇다고 요새 사진 좀 찍는답시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들고다니는 SLR이나 DSLR도 아니요, 그리고 그냥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 게 쑥스러워서 가방에 넣어간 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생각한 건데 앞으로는 이따구로 할 거면 그냥 당당하게 카메라만 들고 나오거나, 가방을 들었으면 최소한 수건이나 물통, 상황에 따라서 군것질 거리라도 챙겨나오겠다고 다짐했다.
다짐.

오늘 오르기로 한 산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주 오르곤 했던 안산.
인터넷을 찾아보니 해발 295.9m의 산으로 오늘의 등반 목표는 정상에 있는 봉수대까지 오르는 것으로 정했다.
앞으로 찍은 사진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것이므로 일반 사람들이 찍는 사진을 감상하고 싶으면 루리웹의 이 글이나 이런 글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비록 나의 등산 루트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무악산동봉수대
주소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산1
설명 무악 동봉수대지는 조선시대 봉수체제가 확립되었던 세종 24년(1438)에 무악산 동·서에 만든 봉수대 가운데 동쪽 봉수대
상세보기

결과적으로 미완이었던 준비를 완료하고 밖으로 나온 나를 반긴 것은 때아닌 소독차의 연기 어택이었다.

앵글을 잡지 못해서 연기가 많이 가신 뒤에 찍은 사진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앞이 안 보일만큼 심했다.


기왕 여름도 다가오고 하니 내 몸을 정화하자는 차원에서 기꺼이 연기를 쏘인 나는 안산 초입으로 접어들었다.

곳곳에 저렇게 유명한 시를 갖다가 붙여놨더라. 나름 도금 보살 옆에는 조지훈의 '승무'를 적어두는 치밀함도 엿볼 수 있었다.


만남의 광장에서 곧바로 올라가면 중간보스격인 팔각정까지 빠르게 오를 수 있었으나 왠지 사람들의 왕래가 너무 많아보여서 인적이 드문 길을 택했다.
오른쪽으로 빙 돌아가는 길을 골라서 차분히 걸었다.
MP3를 듣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나 혼자서는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국카스텐의 앨범을 골랐다.

어렸을 때는 '누가 산에까지 올라와서 이런 운동 기구를 사용하려고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요새는 '이거 만드려고 여기까지 쇳덩어리랑 나무 덩어리 들고오려면 엄청 힘들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느낌의 길을 좋아한다.


별로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땀이 정말 말도 못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햇살은 없었으나 습도가 높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웃도어의 종결자라고 생각한 청바지는 다리에 쩍쩍 달라붙었고 카메라 외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배낭은 상당히 거추장스럽게 되어버렸다.[각주:2]
초보 산꾼의 뼈저린 후회.
하지만 300m도 안 되는 산조차 오르지 못한다면 사내 대장부가 무슨 큰 일을 이루겠냐는 바보 같은 근성으로 꾸준히 걸었다.
하현우 씨의 유려한 목소리가 어느 정도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팔각정에 도착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넓어보였던 팔각정은 사실은 굉장히 조그마한 정자였다.


힘에 엄청나게 부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땀이라도 식혀야 할 것 같아서 잠시 앉아서 바람을 쐬었다.

땀 인증....


노래를 드는 것도 잠시 쉬고 바람의 윈드를 느끼면서 앉아있으려니까 평소에는 잘 하지 않게 되는 생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도시에 살면서 산에 오를 수 있다는 것, 흙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하는 부류의 것도 있었고, '나는 저 수 많은 나무와 풀과 꽃의 이름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구나'하는 자아 반성의 성격을 가진 것도, 기타 어린 시절의 생각이나 추억들,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한 상념 등 시공간을 초월한 잡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으나, 더 이상의 잡념은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때 자리를 떴다.

그러니까 나는 성원아파트에서 나와 만남의 장소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불상, 석천 약수터, 무악정으로 올라간 셈이었다. 이후의 무악정에서 봉수대를 왕복했다가 옥천 약수터로 거쳐 만남의 장소로 다시 내려오는 길을 걸었다.


팔각정에서 봉수대로 가는 길은 계단의 연속이다.

다시 삐질삐질 피부를 뚫고 나오는 땀을 잘 닦아가며 계단을 올랐다.
약 10분 가량 쉬지않고 걸으니 어느 새 봉수대가 있는 정상에 다다랐다.

예상대로 날씨는 흐릿흐릿.


날씨가 맑은 날엔 정말 서대문구와 은평구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지만 날씨 덕에 그렇게 많은 곳이 보이지는 않았다.

좌측으로 보이는 것이 서대문 형무소이고 그 뒤의 운동장은 뭔지 모르겠다.


한성과학고등학교. 저 천문대가 있는 옥상에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몰래 술을 먹고 담배를 폈을까.


안산과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


홍제역 부근.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참 아파트 많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들었던 생각은 저기서 내가 술을 먹으면서 쓴 돈이 얼마일지에 관한 것이었다.


봉원사의 모습.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검거된 곳이 봉원사 근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상에서 약 5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바로 내려왔다.
우선 팔각정까지 온 길을 그대로 내려간 뒤, 처음에 올라오려고 했던 길을 따라 내려갔다.
확실히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수월했다.
괜시리 기초 유격 훈련을 받던 때가 생각났다.
훈련소에 있던 시절,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게 되면 토를 할 때까지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는 것도 문득 떠올랐다.

'만남의 장소'라는 말이 왠지 나를 설레게 만들어서 사진을 찍어버렸다.


만남의 장소까지 내려가니 꽤 큼직하고 깔끔한 화장실이 보여서 땀이라도 닦을 겸 들어갔다.
남자 화장실 정면에 마련된 거대한 거울이 내 모습을 비춰주는데 정말 거지 꼴이 따로 없었다.

잽싸게 하산해 집으로 돌아오니 집을 떠난 지 약 1시간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러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남자답게 옷을 벗어 제끼고 터프하게 샤워를 했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산행이었다.
비록 땀을 많이 흘리기는 했으나 요새 뒤룩뒤룩 살이 쪄가는 나의 모습을 고려하면 오히려 흘린 땀이 부족할 정도.
평소에는 잘 하지 않을 생각에 빠지기 위해 일부러라도 꼭 다시 올라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잘 다져서 나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런 것이야말로 사내의 호연지기가 아니겠는가.

다시 올라갈 그 때엔 시원한 캔맥주라도 챙겨가야지.
  1. 신촌에서 아침 10시 30분에 시작하는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일어나보니 아침 9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서둘러 준비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각이긴 했다. [본문으로]
  2. 그나마 그 카메라마저 아예 가방에서 꺼내 손에 들고다니고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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