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종결자의 여행

| 2011. 6. 13. 07:36

제목은 훼이크고 여행이라고 하기엔 소소했던 2박 3일간의 인맥 다지기 더하기 개드립 경연 더하기 자아 성찰 정도.
신기하게도 이틀 동안이나 술을 먹었는데 기억을 온전하게 가지고 있어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제목을 패러디했다.[각주:1]
본 적은 없는 영화다.
레이첼 맥아담스가 나온다니 언제 기억이 나면 봐야겠다.

시간여행자의 아내 상세보기

금요일 느즈막한 시간에 대치역 주변에서 대전에 같이 내려가기로 한 지인을 만났다.
당시 상당히 복잡했던 교통 상황과 나의 전무한 대치역 주변 지리 감각이 짬뽕되어 서로 만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자기를 왜 못 보냐며 툴툴거리던 그의 모습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그래도 나는 파트너로서 나의 위치를 상기하고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바로 술자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예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멤버 구성에 다소 불안했지만, 결과적으로 금요일 밤의 술자리는 동아리 술자리 사상 가장 재미있는 술자리 중 하나였음이 밝혀졌다.
언젠가는 썩 유쾌하지만은 아닐 소식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즐거운 소식이 있었다.
우리는 그 즐거운 소식을 놀리는 부류와, 그 즐거운 소식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부류로 양분되어 주옥 같은 드립을 제조했다.
그 중 몇 개는 정말 두고두고 기억해도 웃음이 나올만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요리를 배우게 된다면 왕새우덮밥의 레시피는 꼭 알아두리라.

마땅히 잘 곳이 없었던 나는[각주:2] 난생 처음으로 찜질방에 갔다.

동방삭레포츠
주소 대전 서구 만년동 330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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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물이 모두 찜질방으로 운영되고 있던 그 거대한 구조체 안에서 나는 한국식 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단연컨대 꼭 찜질이라는 소재가 아니더라도, 거대 포털 사이트를 방불케하는 어마어마한 하이브리드 풍의 집합체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외에서 절대 자연 발생할 수가 없는 존재일 것이다.
목욕재계하고, 내가 느꼈던 문화적 충격만큼이나 딱딱했던 바닥에서 널부러져 잠을 청했다.
신기하게도 전날의 피로함과 숙취감은 전혀 해소되지 않더라.
지인의 말을 들으니 그런 무의미한 수면이야말로 찜질방의 묘미라고 하더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해장국을 먹었다.
서울로 올라간다는 지인을 바래다주고[각주:3] 나는 모자란 잠을 채우기 위해 동방으로 향했다.

위(Wii)와 플스가 어지럽게 널려있던 옛날의 동방과 비교하면 훨씬 더 밴드 동방다워졌다.


소파에서 잠을 자다가, 기타 좀 쳤다가, 새로 생긴 키보드도 만지작거리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동아리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전(前) 밴드 인맥들을 만났다.[각주:4]

오른쪽으로 4차원 포털이 보인다. 창문 뒤에서 찍은 사진이라 생긴 것 같다.


1년 반 정도되는 기간 동안 빌려주었던 나의 기타를 돌려 받기 위해 자리를 떴다.
사실 이번 대전행의 주 목적은 바로 이 기타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의 조그마한 카메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노을.


기타를 안전한 곳에 모셔두고 술 시동을 걸었다.
허세가 가득한 GQ체 드립을 치다가 자리를 옮겼다.
밤 10시가 넘어서 오리지널 멤버가 모두 모였고 적당히 즐거운 분위기에서 시국을 논했다.
주요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나의 드립이 너무 음란해졌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로 자리잡았다.
나는 현재 나의 일상을 핑계로 대며 비판의 화살을 돌리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
당시에 내가 부끄럽기까지했다는 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앞으로 하는 말에 주의하자고 마음 먹었다.

지난 날의 피로를 깨끗하게 씻어내지 못했던 탓일까.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취기를 느꼈고, 기억 종결자의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일찍 술 자리에서 이탈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기타를 메고 동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아직 정확한 일정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예상되는 다음 대전행은 8월 초, 동아리 홈커밍이 있을 때이다.
  1. 막상 써놓고보니 뭘 패러디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음절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정도인가. [본문으로]
  2. 물론 내가 잘 곳이 당시에 마땅히 없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새벽 4시에 사람을 깨울 정도의 뻔뻔함이 있었더라면 내 작은 몸 하나 뉘일만한 자리는 찾을 수 있었지만 툴툴거리는 모습을 잊을 수 없는 그 지인이 마땅히 잘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배신할 수 없었다. [본문으로]
  3. 사실은 반대다. [본문으로]
  4. 동아리 인맥과 밴드 인맥에는 교집합도 1명 존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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