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와 스티비 원더

| 2011. 7. 2. 19:18

나른한 토요일 오후에 갑자기 출출함이 느껴져 저녁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집에 있는 나를 위해 저녁을 차리고 나가셨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확실히 들었기 때문에 대충 데워서 먹을 수 있는 국거리와 고기 반찬 하나 정도쯤은 있을 줄 알았다.
예상대로 가스 레인지 위에는 전골용 냄비가 하나 올라가 있었다.
쭈꾸미 전골이나 뭐 기타 해물 전골 같은 것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뚜껑을 열었는데 아니 이건!


불고기였다.
국물 음식이 없다니.
충격에 빠진 나는 라면을 찾았으나 점심에 이미 컵라면을 먹기도 했고, 집에 라면 자체가 없어서 라면의 꿈은 포기해야 했다.
밥을 안 먹어버리기엔 배가 고팠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무 국물이나 만들어 먹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끓여먹을 수 있는 국 또는 찌개는 그 이름에 있는 재료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계란국이면 계란이, 된장국이면 된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한 나의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집에 대체 무슨 주재료가 있는지 모르겠어서 뒤지던 나의 눈에 첫 번째로 띈 것이 김치였기 때문이다.
아래로는 본격 요리 블로그의 시작.
기본적인 요리 법은 네이버에서 쳐서 나온 포스팅 중 랜덤하게 고른 것을 참고했다.

사진을 보기 전에 사족을 하나 달아두자.
나는 여지껏 태어나서 무슨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관할 하에 하는 요리 아닌 요리를 만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본 적이 아예 없다.
혼자서 만들어 먹은 요리는 라면 1인분[각주:1], 참치계란후라이[각주:2] 정도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그런 사람이 만든 요리라서 엉성하기 짝이 없을테지만 그래도 요리를 하는 과정에 있어서 꾸밈 없이 정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만 적었다.

맛있게 익은 김치가 되시겠다. 사진에 보이는 양을 전부 요리에 사용했다.


냉장고에서 바로 양파가 보이길래 '그래, 김치만으로는 김치찌개를 끓일 수 없겠지'싶어서 전체 양파의 반 토막을 사용했다. 양파를 써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참고한 요리 법에 참치 국물을 넣고 볶으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충실하게 따르는 중. 참치 기름이 졸졸 흘러나오는 순간을 포착하느라 조금 힘이 들었다.


김치를 볶기 시작. 김치를 볶을 때 계속해서 숟가락으로 휘저었는데 불이 강하면 손이 뜨거워서 견디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또 불을 약하게 하니까 잘 볶아지지를 않더라. 김치를 볶을 때는 중불로!


김치가 어느 정도 볶아졌다고 생각되어 물을 넣었다. 나는 라면을 끓일 때도 스프를 넣고 푼 후 바로 간을 보는 습관이 있다. 내가 혼자서 처음으로 라면을 끓였을 때 몹시 싱거워서 버리고, 두 번째로 끓였을 때 몹시 짜서 버린 적이 있어서 간에 대해 강력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찌개를 끓일 때도 그 습관은 여전히 작동했는데 따뜻한 김치+김치국물+참치기름+물은 참 맛이 없었다.


간이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됐을 때 양파를 넣었다. 처음에는 양파의 양이 상당히 많아보였으나 끝까지 끓이고 나니 그렇게 많지는 않더라.


아까 간을 봤을 때 하도 맛대가리가 없어서 대체 무엇이 부족한가 고민하다가 참치와 고춧가루, 그리고 다진 마늘을 조금 넣었다. 그랬더니 조금 짜진 것 같아서 물도 조금 더 넣었다. 팔팔 끓이고 다시 간을 보니 그제서야 좀 김치찌개다운 맛이 났다.


기존에 있던 불고기를 데우고 내가 참 좋아하는 열무김치를 꺼내서 밥상을 차렸다. 역시 국물 음식이 있어야 밥상이 좀 갖춰진 느낌이 난다.


오늘의 주인공!


김치찌개라는 메뉴를 맛없게 만드는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다고 본다.
나 같이 요리에 문외한인 사람이 순서만 흘끗 참고하고 눈대중으로 대강대강 만든 김치찌개조차 꽤 먹어줄만했기 때문이리라.
불고기와 함께 밥 한 공기를 후딱 먹어치웠다.
만족스러운 수준의 저녁 식사.

근데 대체 왜 제목은 '스티비 원더와 김치찌개'일까?[각주:3]
별 이유 없다.
그냥 내가 만든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서 스티비 원더와 김치찌개, 또는 스티비 원더와 김치가 연관된 게 있는지 인터넷을 검색해봤지만 아무래도 스티비 원더와 김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나보다.
스티비 원더는 김치를 먹어 봤을까?
그가 김치찌개라는 음식을 먹게 된다면 만족할까?
'My Kimchi amour'나 'Isn't Kimchi delicious', 또는 'Lately (I've been having some Kimchi)' 같은 노래를 만들게 되지는 않을까?


푹푹 찌는 여름 오후에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듣는 스티비 원더의 'Never dreamed you'd leave this summer'는 은근히 괜찮은 분위기를 가져다주었다.
가사 중 'You said then you'd be the life in autumn'에 나오는 바로 그 '어덤~'은 아마 역대 팝송 가사에서 나온 autumn 중에 가장 아름다운 발음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바깥에서 들리는 잔디 제거기 소리가 나의 청신경을 조금 자극한다는 점을 빼면, 매우 평온한 오후다.
아, 방금 그 소리가 멈췄다.
2011년 7월 2일 토요일 오후는 매우 평온한 오후.
  1. 2인분부터는 물의 양을 몰라서 그냥 다른 사람한테 맡긴다. 심지어 내가 먹을 1인분의 라면을 끓일 때도 손가락을 넣어서 물의 깊이를 측정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2. 자취 시절에 개발한 요리로 그냥 계란 후라이에 기름을 뺀 참치 통조림을 넣어서 부치는 요리다. 굉장히 고단백으로 잦은 술자리에 상한 나의 몸을 회복해주는 보양식으로 먹었다. [본문으로]
  3. 앗차 싶어서 위로 올라가서 확인해보니 원래 제목은 '김치찌개와 스티비 원더'였다. [본문으로]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이 지겹다  (0) 2011.08.14
비 정말 근성 가지고 꾸준히 온다  (0) 2011.07.16
시간차 블로깅  (0) 2011.07.16
사랑이 시드는 과정  (0) 2011.07.08
난지 캠핑장 정복기  (0) 2011.07.05
담배의 유래  (0) 2011.06.19
발목을 접질리다  (0) 2011.06.16
기억 종결자의 여행  (4) 2011.06.13
혼자서 안산을 다녀오다  (5) 2011.06.09
영웅이 되다  (1) 201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