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

| 2012. 8. 13. 15:24

결혼 소식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을까 말까 하던 10년이 넘는 전지현 빠 생활에, 수명 연장의 꿈이 이루어졌다.
무리수임을 충분히 자각하면서도 감히 이 영화를 전지현의, 전지현을 위한, 전지현에 의한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질 정도이니 말이다.

부제랍시고 어디선가 흘러가면서 봤던 "전지현 라이즈"는, 영화 《도둑들》의 단면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가 분명했다.
특히나 영화의 그 어떤 다른 면보다 전지현에 포커스를 맞추고 봤던 내겐 어쩌면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두 어절이 아닐까 하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전지현의 연기 커리어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전지현이 말 그대로 "떠오를" 날만 기다리고 있던 나 같은 올드 팬에겐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 선택도 없었다고 본다.

물론 많은 비판적인 평에서 찾아볼 수 있듯, 대중들에게 지루할 만큼 익숙하고 본인의 필모그래피를 따져봐도 고루할 만큼 반복된, 철딱서니 없고 방방 뜨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진부함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정당성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비판으로서의 실효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ㅡ 누나, 힘내요! ㅡ 딱히 매력이 통통 튀지 않는 캐릭터를 소화하면서 이 정도의 인력을 발휘하는 연기를 해낸 것은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그 어떤 무게감이나 부담감, 스타성에의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연기였다.

예전에 정려원의 연기력 논란에 대해 실컷 그녀를 옹호했을 때와 비슷한 논리지만, 사실 전지현이 정말로 연기력의 문제를 가진 배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작품성도 대중성도 획득하지 못할 만한 플롯에서, 그런 플롯보다 더 나을 것도 없을 캐릭터들을 맡으면서 연기력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어떤 사람의 학문적 성취도를 따지기 위해 초등학교 문제집을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미 실패한 영화의 실패한 캐릭터를 놓고 한 배우의 연기력을 평가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만행이다.
최소한 연기력을 보여 줄 만한 배역을 맡겨 봐야 그 사람이 연기를 하는 건지, 주접을 떠는 건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결국 과거의 실패한 배역들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전지현은 자연스레 그저 그런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된다.
그렇다면 그저 그런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 얼마나 맞는 배역을 맡느냐가 되는데, 예니콜의 캐릭터와 전지현이라는 배우는 찰떡궁합의 조합을 이뤄낸 좋은 예 중의 하나다.
그 찰떡궁합이 좋은 연기를 빚었고, 관객은 그 좋은 연기를 "전지현 라이즈"라는 비꼼 섞인 말로 칭찬하는 것이다.

《도둑들》의 예니콜이 뿜어내는 포스는, 홍대에 새로 짓고 있던 까페 드롭탑의 공사 현장을 괜히 한 번 떠오르게 할 정도로 놀라운 매력이었다.
이런 치명적인 누나가 유부녀라니, 흐흥, 딱히 질투심이 난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야.

개드립에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 하면, 이 영화 하나로 그녀를 10여년간 따라다녔던 《엽기적인 그녀》의 이름을 지우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이 영화 덕에 그녀는 그녀의 이름을 따라다닐 고유 명사 하나를 더 얻게 될 것이고, 그것 하나 만으로 《도둑들》은 배우 전지현의 필모그래피에 강한 인상을 남긴 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전지현을 CF모델에서 다시 영화배우로 만들어줬다"는 평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대부분의 관객들도 이에 동조할 것이라는 것에 내 왼손 모가지와 전지현 빠심을 건다.

http://artofdie.tistory.com/1292

전지현 이야기만 하다가 끝내기 전에 영화 전반을 간략하게 둘러 보자.
영화에 대한 주된 비판은 하이스트 영화의 전형을 답습했다는 것인데,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답습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특히나 세계 영화의 관점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한국 영화에서라면, 진부함을 기반으로 하는 비판이 설 자리가 더더욱 좁아진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인 특유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소재가 아닌, 만국 공통의 흥행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 퀄리티의 영화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진부함 논쟁은 영화에 대한 찬사로 받아 들여질 수도 있다.

이런 "블록버스터"형의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를 맛본 적이 언제였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도둑들》에 대한 칭찬을 한 보따리쯤 더 풀 수도 있을 느낌이다.
임달화와 김해숙의 노련한 연기로 ㅡ 그냥 넘어갈까 고민하다가 살짝 덧붙이는 건데,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발군의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이정재라고 생각한다 ㅡ 피니쉬한 해학적 미학이 가득 담긴 자동차 추격 장면이나,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의 빌딩 액션 장면에 대한 오마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후반부의 와이어 액션, 아낌없는 로케이션 촬영으로 극대화된 현실감,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담백하게 잘 빠진 플롯, 뭐 이런 깨알 같은 요소들이 고루 갖춰진 한국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대체 언제란 말인가.

영화의 제작진에게 바라는 점은 딱 하나 뿐이다.
제발 속편 욕심을 내지 말아달라는 것.
《도둑들》은 이미 한 편의 영화로서 완성형에 이른, 더 이상의 터치는 모조리 사족으로 이어질 정도로 가득 찬 영화다.

PS :

원래 김수현에 대한 이야기를 뭔가 끄적여 보려고 했는데 막상 글을 쓰다 보니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감히 누나의 입술을 훔치다니 이 건방진 녀석 같은 뉘앙스는 아니었고, 뭔가 그의 짧은 출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한 줄로 언급하고 넘어가도 될 수준의 생각이었나보다.

하지만 감히 누나의 입술을 훔치다니 이 건방진 녀석! http://pann.news.nate.com/info/253707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