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 2012. 9. 3. 13:51

이 풍경 전체를 드넓게 펼쳐진 물에 비유하는 것은, 거기에서 나를 꿰뚫고 들어오는 한기가 느껴지고 또 내가 자칫하면 굴러 떨어질 것처럼 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이 풍경의 이상한 분위기는 바로 루치에를 다시 만난 후 내가 스스로 상기하기를 금했던 것을 복사판처럼 보여 주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억압되었던 내 기억들이 지금 내가 주변에서 보는 모든 것들 ㅡ 저 황량한 벌판과 마당과 헛간들, 탁한 강물, 배경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며 모든 곳에 스며 있는 이 한기 ㅡ 에 배어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 기억들로부터 달아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들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기억들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니!
최근 수 년간 접한 문장 중에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으로는 밀란 쿤데라라는 위대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읽어 본 《농담》은 다소 현학적이면서 관조적 ㅡ 때로는 냉소적이기까지 한 ㅡ 인 동시에 치밀하고 사실적인 문체를 좋아하는 나와 참 잘 궁합이 잘 맞는 소설이었다.
큰 줄기에서 하나로 엮어 들어가는 거대한 이야기 흐름 속에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등장 인물들의 관점을 각각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한 소설은 처음 읽어 보는 것 같았는데 그런 입체적인 이야기 구조 자체도 상당히 맘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간 중간 등장하는 재기 넘치는 해학과 감각적인 묘사 때문에 짧지 않은 소설이었음에도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심리적, 생리적 구조란 너무도 복잡해서 삶의 어느 시기에 젊은이는 그것을 통제하는 데에만 거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래서 그런 젊은이에게 사랑의 대상 자체, 즉 사랑하는 여인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어린 바이올린 연주자가 자신이 연주하는 동안 손을 움직이는 기법 같은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기법을 숙달하기에 이르지 않는 한 작품 내용에 집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이미 교우들 사이에서도 야한 소설로 명성을 날리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자극적인 외설은 쿤데라의 첫 작품인 《농담》에서도 간간이 나타난다.
아래의 인용문을 외설적이라고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의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입맞춤의 묘사는 내가 글로 읽은 입맞춤 이야기 중 외설적인 느낌을 가장 강하게 전달했다.

입을 다문 채, 마른 입술 그대로 오래 이어지는 그 순결한 입맞춤, 서로의 입술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인 감각을 나누며 입술의 가느다란 세로선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그 입맞춤이 나는 황홀하도록 좋았다.

내가 문학 작품에 대해 최소한 대학 수준의 강의를 들었거나 또는 진지한 공부를 했더라면, 또는 "심리학"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췄더라면 소설 《농담》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1인칭 소설이라는 특징에 기대어 자신의 노골적인 심리 묘사를 할 때는 워낙 대번에 파악하기 힘든 문법 구조와 어휘들 사이에 본질을 숨기고, 타인의 심리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를 할 때는 원래의 관찰이라는 행위가 갖는 한계를 살리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서술을 하거나 모호한 표현을 씀으로써 나 같이 휙휙 책장을 넘기는 사람이 등장 인물의 심리를 정확히 소화하며 책을 읽게끔 허락하지 않는다.
긴 문장을 짧게 줄이면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생긴 것도 참 나쁘게 생겼지. http://ipnagogicosentire.wordpress.com/2012/01/18/about-the-art-of-the-novel

하지만 신기한 것은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서 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후반부의 결말에 대해 충분히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신기하다고 느꼈던 이 경험이 가능한 이유는, 나름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처음부터 여러 사람이 엮어 들어가는 하나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잘 짰고 ㅡ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ㅡ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고유한 관점에서의 이야기를 일부러 빼놓아 감칠맛을 솔찬히 늘렸으며, 결정적으로 상당히 독특하고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등장 인물들의 고유한 성격을 매우 사실적으로, 피부에 팍팍 와닿게 서술했기 때문에 쿤데라가 의도했던 모든 포인트를 캐치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들 이미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물들의 심정을 적잖이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이 역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면, 글을 어마어마하게 잘 썼다는 짧은 문장으로 줄일 수 있겠다.

장르는 무엇이라 붙일 수 있을까.
로맨스라고 하기에 "농담"이라는 제목으로 함축되는, 어떤 면에서 보기에 해학적인 부분 때문에 진지함이 떨어지고, 전후 소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이나 전쟁 전후 체코의 상황 따위는 전혀 몰라도 된다.
심지어 내가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체코를 들르지 않았더라면 평생 알지 못했을 체코의 몇몇 도시 이름조차 전혀 몰라도 책을 읽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밍숭맹숭한 단어긴 하지만 나라면 이 소설의 장르를 드라마라고 부르겠다.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와 조지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를 오묘하게 섞은 듯한 지나간 시절에 대한 이야기, 희미하게 풍기는 노스탤지어의 냄새에다가 이와 비슷한 색채를 띤 하나의 사랑 이야기와 그에 비교하면 거의 아무런 의미조차 갖지 못하는 씁쓸털털한 연애 이야기, 거기에 한 사람의 인격적 성숙과 자기 삶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이 절묘하게 섞인 그런 휴먼 드라마랄까.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온갖 감정이 튀어나와 한데 어우러지며 끝이 나는 엔딩이 참 기가 막히다.
훌륭한 소설.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은 잊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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