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푸코의 진자 그 마지막 권.
좋은 리뷰란 스포일을 최대한 방지하면서도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지만 저 두 극의 중용을 지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따라서 어느 쪽으로 치우칠지 모르나 혹시나 전자에 실패하는 경우를 대비해 이렇게 미리 주의를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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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을 펼치고 조금 읽다보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비아냥거리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던 우리는 <악마 연구가들>을 상대로 장난을 계속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만일에 우주적인 음모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가장 우주적인 음모를 발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신나게 진행되어 온 작품을 마지막에 가서 사실은 '아시발꿈' 같은 식으로 끝맺어버렸다면 이 작품은 용두사미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을 것이다.
아시발꿈의 실사판, 탁구왕 김제빵
에코는 자칫 김이 샐 수도 있을법한 이 길고 긴 이야기의 결말을 확실히 마무리짓기 위해 새로운 상황을 만든다.
희생양은 이미 1권에서도 밝혀진 바 있지만 벨보다.
벨보는 우리보다는 훨씬 의식적인 수준에서 <계획>과 동일시해 가고 있었다. 나는 중독되어 가고 있었고, 디오탈레비는 전와(轉訛)해가고 있었으며 벨보는 개종(改宗)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동시에 끝까지 공개되지 않은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 때부터 서술은 약간 평행적인 두 이야기로 나뉜다.
벨보의 이야기와, <계획>에 대한 이야기로.
후자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에코는 배 속의 ㅡ 또는 배가죽 아래의 ㅡ 작품인 아이와 지하에서 벌어지는 음모 간의 메타포에서 힌트를 얻은 지자기류의 개념을 끌어온다.
그리고는 이 지자기류의 개념을 통해 <계획>과 <비밀>의 결말을 완성짓는다.
여기서 뭔가 과학과 관련이 있는 내용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덤벼드는 나의 습성이 발동해 갑자기 김이 빠져버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지자기류의 조종, 또는 지자기 역전 현상으로 세상을 장악한다는 아이디어가 갖는 허무맹랑함은 새 천년 이후 끊임없이 등장하는 각종 세계 종말론이 갖는 그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뜬금없이 나타난 '지자기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면 네이버 캐스트 참조.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음모론 등은 다음 링크 참조.)
자, 그럼 이 소설은 결국 3류 SF 쓰레기로 전락하고 마는 건가?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 있느냐에 따라 이 소설을 평가하는 것은 극과 극으로 치달을 수 있으리라.
이 소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각종 미디어의 반응과, 그에 대비되는 교황청의 신성 모독 드립은 바로 이 관점에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결국 이 <비밀>이네, <계획>이네 하는 것의 내용 그 자체는 이 소설에 있어서 곁다리 흥미거리로 던져주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으면서도 과학적으로 신빙성 있는 음모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흔히 논의되는 음모론의 이런저런 가설 중에 하나를 골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1
그러면 우리는 이 소설을 어떤 맥락에서 읽었어야 하는 것인가?
알리에의 얼굴이 문간에서 사라지자 벨보가 이를 악물고 한마디 했다. 「Ma gavte la nata.」알리에로부터 뜻밖의 초대를 받고 기분이 좋아져 있던 로렌차가 벨보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토리노 지방 사투린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개를 좀 뽑으시지>, 이런 뜻이야. 토리노 사람들은, 사람이 거만 떨기와 잘난 척하기와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대체로 똥구멍 괄약근에 마개가 너무 단단히 박혀 있어서 배 속에 허장성세의 바람이 꽉 차서 그런 거라고 믿는다네. 그러니까 이때 마개를 좀 뽑아 주면 그 바람이 빠지는데, 어떻게 빠지는고 하니,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바람이 빠지면 껍데기는 고깃점 하나 없는 귀신처럼 홀쭉해진다네.」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결국 지자기류를 조종할 수 있는 이른바 지구의 배꼽을 찾으면 모든 게임은 끝나게 되는데, 바로 이 때 '푸코의 진자'가 재등장한다.
바로 그 푸코의 진자가 지구의 배꼽을 가리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설정.
바로 그 푸코의 진자가 지구의 배꼽을 가리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설정.
3권의 중반부에 접어들면, 서술이 마치 급류를 타는 것처럼 빨라진다.
여태까지의 서술 양상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음모론의 창조라고 한다면 이 부분부터 그 양상은 완성된 음모론을 통해 역사의 전개를 설명하는 식으로 바뀐다.
갈팡질팡하면서 정신없이 급류를 타고 내려가다보면 우리는 히틀러라는, 음모론에 빠지지 않는 진부한 이름까지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지구 공동설'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역시 여기서도 나는 개거품을 물고 늘어졌다.(지구 공동설이 궁금하다면 여기를, 지구 공동설을 믿고 싶지 않다면 여기를 눌러보자.)
다른 한 쪽의 평행선인 벨보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개종의 단계에 이르렀던 벨보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얽매여 점점 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사실 벨보의 과거 이야기는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의 내면에 숨어있는 의미를 집어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나는 그 과정을 썩 훌륭하게 해내지 못했다.
짧게 줄이면 잘 이해가 안 됐다는 뜻이다.
사실 벨보의 과거 이야기는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의 내면에 숨어있는 의미를 집어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나는 그 과정을 썩 훌륭하게 해내지 못했다.
짧게 줄이면 잘 이해가 안 됐다는 뜻이다.
그는 삶(자기 삶과 인류의 삶 모두)을 예술로, 예술을 허위로 파악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세계는 한 권의 책(그것도 가짜)이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라고 믿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드디어 이 가짜 책을 믿고 싶어했다. 그 자신이 이 파일에서 쓰고 있다시피, 자신이 발명한 이 <계획>이라는 것이 실재하게 되는 경우 그는 더 이상 패배자, 소심한 자, 비겁자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벨보의 상황 역시 'Bin ich ein Gott?'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굉장히 급박해진다.
평행하게 내려오던 난폭한 두 급류가 합쳐지는 것은 이 지점이다.
서술 시점이 1권의 처음과 이어지는 이 지점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소설의 5가지 전개 순서에서 드디어 위기로 접어드는 순간이며, 심장 박동이 터질 것처럼 쿵쾅쿵쾅 거리기 시작하는 곳이며, 모든 사실(과연 사실일까?)들이 한데 뒤섞여 강강수월래를 추면서 허실의 구분이, 아니 허실이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필요없어져버리는 공간이다.
소설은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순식간에 절정을 맞이하고는 그 끝에 갑작스런 정적을 맞는다.
진자의 부동점은 높은 곳에 존재하고, 직접 흔들리는 진자는 낮은 곳에 있다.
세피로트 나무의 왕관을 뜻하는 케테르부터 현실을 ㅡ 결국 우리의 현실 속에서 변하는 것은 없다 ㅡ 의미하는 말후트까지.
부동으로 수렴하는 점이 상반된다는 역설을 인지한다면 결국 케테르가 말후트요, 말후트가 케테르며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다.(마치 지구 공동설을 상기시킨다.)
내가 '곁다리'라고 평가한 이 소설의 무수한 음모론을 읽고 그에 대해 나만의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복잡하므로 그에 대한 생각은 여기까지.
진짜 이 소설이 독자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부분은 책의 가장 끝 부분에서도 드러나있다.
나는 저자 움베르토 에코에게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뼈 아픈 뒤통수를 맞고는 멍한 채로 이 끝을 맞이했다.
무엇이 뒤통수냐?
왜 그것이 뒤통수가 될 수 있느냐?
아까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서 이 책을 읽는 맥락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맥락이 대체 뭐냐?
힌트와 잘 연관을 지어보면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이 질문들에 '정'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쓰든 안 쓰든 다를 것이 없다. 침묵하고 있어도 침묵의 배후에서 의미를 찾으려 할 테니까. 워낙 그런 사람들이다. 계시에 눈이 먼 사람들. 말후트는 말후트일 뿐이다. 그것뿐이다.그러나 저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믿음이 없는 저들에게.그러니 여기에서 기다리면서, 산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지.산이 참 아름답다.
소설 끝.
소설의 끝엔 역자 이윤기 씨의 짧지만 다정다감한 글이 실려있다.
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은 나의 생각과 대체로 일치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접하는 사람들이 갖는 가장 큰 공감점은 바로 책을 읽자마자부터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겠다.
이에 대한 그의 말.
……내 책 머리에 길고 난삽한 글이 실려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원고를 읽어 본 내 친구들과 편집자들은, 너무 어려워서 읽으려니까 진땀이 나더라면서 처음의 백 페이지를 줄일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낯선 수도원에 들어가 이레를 묵을 작정을 한다면(실제로 『장미의 이름』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수도원 자체가 지닌 리듬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런 수고를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내 책을 읽어 낼 수 없다. 따라서 난삽한 첫 부분은 나의 호흡을 따라잡기 위해 독자가 마땅히 치러야 하는 입문 의례와 같은 것이다. 이 부분이 싫은 독자에게는 나머지도 싫을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산으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산기슭에 남아 있는 것이 좋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산의 호흡법을 배우고, 산의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산기슭에 남아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 다음으로 큰 공감은 작품에 관한 도움말을 원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받아친다.
작품이라는 것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나는 내 작품과 독자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독자들을 가로막고 섬으로써, 혹은 작품을 가로막고 섬으로써 그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가 자아서 훼손할 생각은 없다.
핫 차.
멋있는 사람.
가장 마지막의 두 인용문이 마음에 든다면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가장 마지막의 두 인용문이 마음에 든다면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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