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엔드

| 2011. 5. 29. 23:01

이 영화가 개봉한 것이 1999년이니 벌써 12년 전의 영화다.
당시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내가 이 영화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파격적인 노출이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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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이라는 배우가 다시 내 삶에 등장한 것은, 아마 2007년이라고 추정되는 때에 본 '너는 내 운명'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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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민의 연기도 굉장히 수준급이었지만 나는 배우 전도연이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를 절대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로 나는 전도연의 작품을 꾸준히 접했다.
전도연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이전에 본 영화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와 '내 마음의 풍금'.
그녀의 연기에 관심을 가지고 감상한 영화는 '멋진 하루', '밀양', '인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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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특색은 제껴두고서라도 이 영화들에서 전도연이 보여준 연기는 정말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서민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각주:1] 전도연은 굉장히 예쁘기까지 하다!
한 번이라도 그녀의 영화를 본다면 꾸준한 팬이 될 수밖에 없는 배우 전도연.

어쩌면 외모만 봤을 때 나의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전도연일 수도 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가 문득 나의 초등학교 5학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해피 엔드'를 봤다.

해피 엔드
감독 정지우 (1999 / 한국)
출연 최민식,전도연,주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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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훌륭한 영화였다.
만 25세의 주진모와 만 26세의 전도연이 엮어내는 베드신은 지금와서 보면 그렇게 특이할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다.
하지만 세기 말의 대한민국이 성(性)의 표출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당시에 이 베드신[각주:2]이 사회적인 이슈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주진모 역시 '무릎팍 도사'에서 말한 바 있지만, 상당히 뜨끈뜨끈하다.
심지어 이 베드신만 편집되어 포르노로 둔갑해서 인터넷에 퍼진 적도 있다고 하니, 이 사실로 그 후끈함이 대충 어떤 수준인지 유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베드신 자체가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도 '해피 엔드'하면 '베드신'이 따라다니는지라 나도 이 정도로만 언급하고 넘어간다.[각주:3]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베드신'이 아니라 플롯의 주요 소재가 되는 '불륜'이다.
한국 불륜 영화의 계보를 잇는 '해피 엔드'가 1999년 개봉 당시에 한국 사회에 불러온 그 파장은 베드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불륜이라는 소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개인적인 욕망과 공동체적인 책임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유부녀 전도연은 끝끝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전도연의 남편 최민식은 개인적인 욕구가 억제받는 상황 속에서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 공동체가 엉망이 되자 자신의 아내를 죽이는 데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냉혈한으로 돌변한다.

문이 스르르 닫히면서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착잡하다.


전도연의 내연남 주진모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울타리를 침범한줄도 모르고 자신의 욕망만을 좇다가 파멸하는 인간상이다.

이 영화는 바로 위의 장면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해피 엔드'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최민식이 전도연의 외도를 모르던 상황에서도, 그 외도를 알게 된 후에도, 집착이 심해지는 주진모를 전도연이 떨궈내려고 마음 먹은 때에도 그 상황이 유지만 되더라면 행복한 결말, 최소한 불행하지 않은 결말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한 결말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던 최민식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무너지면서 모두의 '해피 엔드'는 끝나버린다.[각주:4]
영화가 끝나자마자 섬뜩하게 등장하는 'Happy End'라는 문구(이자 제목이겠지?)와, 곧 Happy가 소리없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남게 되는 'End'에도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시킬 수 있겠다.
불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리뷰가 괜찮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나의 잡견은 여기까지로 정리.

아아, 민식쨔응 울지 말라능. 하여튼 최민식의 연기도 참 훌륭하다.


훌륭한 영화다.

그럼 진지한 척 하는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나서 나만의 트리비아를 깔아보자.

영어 학원 원장으로 나오는 전도연은 조금 그 느낌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도, '밀양'에서도 학원과 관련된 역할을 맡았다.

최민식의 복수 연기는 '올드보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과묵하면서도 냉정한 사내의 모습은 아마 이 영화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나 싶다.

영상미도 은근히 뛰어나다.
작은 디테일까지도 관객이 놓치지 않도록 센스있는 배려를 군데군데 해놨다.
특히 몰입도가 최고조에 이르는, 최민식이 잠든 아이를 안고 귀가하는 장면에서 그 배려를 노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 소름 돋는 구조의 아파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끗.
하면 조금 서운하니까 전도연 사진 몇 장.

  1. 이는 내가 카이스트에서 2007년 여름학기에 수강한 예술학 특강의 교수가 한 말이다. [본문으로]
  2. 미성년자는 클릭을 자제합시다. [본문으로]
  3. 티스토리 태그에도 '해피 엔드'를 치면 자동 완성으로 '해피 엔드 베드씬'이 따라온다. 나도 질 수 없어서 '해피 엔드 베드신'을 태그로 올려 두었다. [본문으로]
  4. '엔드가 끝난다'라는 말은 '바람의 윈드', '죽음의 데스'같은 리던던시(Redundancy)라기보다 그저 행복할 수 있었던 상황이 깨져버렸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해피 엔드'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다소 억지스러운 표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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