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연주할 수 있는 멜로디 악기를 꼽으라면 단연 피아노와 기타가 1위와 2위를 차지할 것이다. 1
1900년대부터 이 두 악기가 지금의 팝과 락이라고 불리우는 장르에 미친 영향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하지만 두 악기의 역할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
수많은 세부 장르가 있는 팝과 락이라는 장르를 봤을 때, 기타는 그 어떤 장르라도 리드할 수 있는 악기가 되었다.
'기타를 치는 사람=락을 하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길 정도로 락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많은 팝 장르에도 기타는 주요 반주 악기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해낸다.
피아노와 기타가 동시에 반주에 등장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지만, 기타 혼자서 그 반주를 소화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피아노는 다르다.
엘튼 존이나 빌리 조엘 같은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들이 피아노라는 악기의 위상을 드높였으나 그렇게 피아노가 전면에 나서는 음악은 장르에 있어서 제약이 많았다.
특히나 우리가 흔히 '락'이라고 부르는 장르에서 피아노가 단독으로 곡을 리드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락에 피아노가 들어가는 경우는 락은 대부분 기타 위주의 배경에 조금 더 다채로운 색을 부여하기 위함이거나 또는 잔잔한 락, 우리가 흔히 '락 발라드'라고 부르는 분위기의 노래를 연주할 때 정도 뿐이었다.
락이라는 장르에 있어 피아노라는 악기란 항상 뒤로 밀리는 악기에 불과했다.
바로 여기서 벤 폴즈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어렸을 적에 정확히 바로 위에서 언급한 두 사람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던 그에겐 저 위대한 두 피아노의 거장에게는 없는 색다른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
피아노와 락, 당시까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두 가지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한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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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따지고보면 벤 폴즈가 주로 연주하던 피아노와 락의 필수 요소 기타는 분명히 닮은 점이 있다.
피아노를 보통 건반악기로 분류하는 우리는 타악기에 가까운 건반악기와 보통 현악기라고 하기엔 조금 특이한 현악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큰 생각 없이 그저 다른 악기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피아노는 어떤 악기인가?
바로 덜시머(Dulcimer)를 기반으로 하는 악기가 아닌가.
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것이나 팅겨서 소리를 내는 것은 음색의 차이를 만들어내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부류로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피아노의 건반은 단지 줄을 때리는 것을 더 쉽게 만들고자 고안된 장치일뿐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두 가지 악기의 외형은 굉장히 이질적이지만 껍질을 까면 결국 같은 원리로 작동되는 악기라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면 피아노가 꼭 락 멜로디 반주의 2인자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기타가 연주하는 것을 피아노로 연주한다면, 최소한 기타가 연주하는 것을 피아노로 그대로 따라친다면, 음색의 차이는 있겠지만, 피아노만으로도 몸과 머리를 떨리게 하는 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기타가 차지하는 영역을 피아노로 커버하면서 기타가 갖지 못하는 피아노만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낼 수 있는 음악을 한다면 어떨까?
벤 폴즈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굉장히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 사람이다.
벤 폴즈는 피아노와 락이라는 요소를 혼합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재기 넘치고 장난기 가득한 색을 입힘으로써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새로운 음악의 지평선을 연 사람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벤 폴즈의 노래를 좋아하던 내가 벤 폴즈의 내한 소식을 접했을 때 얼마나 감격에 젖었는지는 내 팬티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는 솔직히 헛소리고 어쨌든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닉 혼비와 손잡고 낸 신보의 세계 투어의 일환으로 한국에 온다는 것이다.
그 벤 폴즈가 대한민국에 납신다니!
여기서 조금 의외였던 것은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최소한 한국의 내 지인들 사이에선 벤 폴즈라는 사람의 인지도가 썩 높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나와 알기 전부터 벤 폴즈를 알고 있던 사람이나, 나를 만나 나를 통해 벤 폴즈를 알게 된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벤 폴즈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4
분명히 우리나라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분위기의 곡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티켓 예매가 시작하는 시각에 컴퓨터를 붙잡고 앉아 있을 여건이 안 되어 가장 믿음직한 지인에게 예매를 부탁했다.
지정석 6열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는 굉장히 기뻤다.
하지만 악스홀의 지정석 지도를 보고 6열이면 무대보다는 뒤 벽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은 실망했다.
다소 개인적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으나 나의 페이스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므로 그냥 올린다. 예매자 김현식 군에게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그래도 벤 폴즈를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감격에 젖어 졸래졸래 악스홀로 찾아갔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으나 광나루 역에 도착하여 2번 출구로 나가니 건물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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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흥!
공연장으로 들어갔을 때 마음 속에 가시지 않던 좌석에 대한 불안감은 싹 사라졌다.
악스홀은 내가 여지껏 가보았던 한국의 그 모든 공연장보다 좋은 인프라를 구축한 공연장이었다.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앉든지 관객이 무대와 소통할 수 있게끔 디자인이 아주 잘 되어있었다.
내가 앉은 2층 6열 18번 좌석은 2층에서도 거의 중앙부에 위치해있어 무대가 한 눈에 잘 들어왔다.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리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라이브의 퍼포먼스라면 이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만한 (똘)끼와 천재성이 풍부한 벤 폴즈가 과연 이번 공연에서는 어떤 일을 벌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챗룰렛?
관객 반응 받아치기?(몹시 추천. 웃음이 멈추지를 않는다.)
의자 던지기?
뭐든 어떠랴, 벤 폴즈가 내 눈 앞에서 피아노를 친다는데!
화장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굉장히 낯이 익은 여자가 보였다.
누구일까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박지선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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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2층으로 올라가더라.
나도 내 자리에 앉았다.
괜히 궁금해져서 어디쯤에 앉았을까 두리번거리는데 아주 뒷통수가 제대로 박지선 씨와 닮은 사람이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박지선 씨가 아니었다. 나중에보니 원조 박지선 씨는 이 날 회색 반팔 티셔츠에 빨간 가방을 메고 왔더랬다.
Levi Johnston's Blues와 'The spider got in for free.'로 재치있게 시작한 공연은 정말로 대단했다.
기본적으로 피아노, 베이스, 드럼, 세 악기만으로 연주가 가능하게끔 모든 곡이 구상되었다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나머지 두 명이 맡고 있는 파트는 저 베이스에 개성을 부여하는 장치이다.
호른과 멜로디언과 각종 FX를 연주하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기타와 잡다한 퍼커션을 연주하던 사람의 역할은 주목할만하다.
스네어 외에 탐을 플로어 탐만 둔 극단적인 셋팅의 제 1 드러머는 단지 2개의 탐만 가지고 전반적인 박자에 효과적으로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5
거기에 제 2 드러머는 경우에 따라 드러머 1에 무게를 지원해주기도 했고, 무게감보다 박자의 다양성을 좇아야 할 때엔 서로 다른 박을 연주함으로써 벤 폴즈 노래 특유의 재기발랄함을 구현했다.
무엇보다 Effington에서의 그 귀여운 탬버린 퍼포먼스는 모든 여성 관객들의(심지어는 나도!) 환호를 불렀다.
벤 폴즈의 피아노 연주는 유튜브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2억만배쯤 더 인상 깊었다.
2009년 제이슨 므라즈의 내한 공연 후 남긴 글을 보면 내가 상당히 그의 공연에 감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벤 폴즈는 그 누가 뭐라해도 나에겐 제이슨 므라즈보다 인상 깊었다.
열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까지 살아숨쉬는 그 음악의 기(氣)란.
피아노를 치는 손에 무게감을 싣기 위해 의자를 거부하는 모습도 실제로 보니 더 굉장했다.
마치 언덕길을 오르기 위해 안장에 앉기를 뿌리치는 저 힘찬 연어, 아니 싸이클리스트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비록 체어샷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종종 나오던 엘보우샷도 느낌 충만.
한 관객으로부터 날아온 프리즈비에 적힌 글귀로 즉석으로 노래를 만들어내는 진풍경에서 그의 음악적 재능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뇌 속에 음악말고 다른 게 들어가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철철 흘러 넘치는 사람이다 정말로.
올드 넘버 Uncle Walter 솔로는 그저 소름이 돋을 뿐.
내가 참 좋아하는 Lullaby의 솔로도 그 유려한 멜로디가 마치 솜사탕처럼 아주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6
이런 벤 폴즈가 이끄는 밴드의 구성원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 역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모두가 참여하는 코러스는 원곡의 관악 세션을 커버하기에 충분했다.
밴드원 한 명 한 명이 벤 폴즈에 못지 않게 개구쟁이이고 장난기가 넘쳐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공기가 악스홀을 가득 채웠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일본에서 사온 장난감으로 연주했던 From Above와 이어지는 즉석으로 만든 랩 비슷한 그것이겠다.
큼직큼직한 어른들이 조그마한 악기를 들고 있는 그 광경 자체도 유쾌했지만, 그런 연주를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 한 명의 아이디어만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밴드라는 집합이 최대한도로 맺을 수 있는 노력의 결실, 그 자체였다.
Philosophy는 그야말로 '너희가 락을 아느냐' 수준이었다.
관객 모두를 펄펄 끓는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밀어넣어버린 벤 폴즈와 그의 밴드.
아래의 동영상은 그 흥분의 절정이었던 앵콜 부분.
약 2시간 30분에 달하는 시간동안 거의 쉬지도 않고 그토록 변함없이 충만한 에너지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집합으로서 밴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콜래보레이션에서 비롯한다.
벤 폴즈 한 명만으로도 나의 기대치를 넘어섰는데, 그를 둘러싼 이 밴드가 또 다시 나의 기대치를 넘어선 것이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나와 숨을 쉬게 된 이후로 본 그 어떤 공연보다 훌륭했다.
올해 내한 공연을 세 번씩이나 가게 되어 경제적인 부담감이 있었지만 이런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레알 최고의 뮤지션 벤 폴즈.
- 저 두 악기를 위협하는 강력한 후보로 바이올린이 떠올랐는데 그래도 피아노랑 기타가 더 많을 것만 같다. [본문으로]
- 엘튼 존과 빌리 조엘 말이다. [본문으로]
- 물론 그가 직접 그랬는지는 전혀 모르고 그냥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본문으로]
- 무슨 복음 파이터의 느낌이 들지만 나는 그들처럼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 스네어도 하나의 탐으로 간주할 때의 이야기이다. 드럼에 대해서 잘 몰라서 보통 스네어도 탐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본문으로]
- 쓰고보니 '솜사탕이 감미로웠다'는 일종의 비문이 되었지만 시적 허용이라고 치고 그냥 넘어가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