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rk Knight

| 2012. 8. 1. 14:57

R.I.P. Heath Ledger.

감히 그 누가 《다크 나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히스 레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다크 나이트》가 이 정도의 흥행 실적을 올리고 ㅡ 2008년 개봉한 영화 중에 가장 많은 수익을 올렸으며, 총 1억 달러가 조금 넘는 수익으로 올 타임 랭킹 12위에 랭크되어 있다 ㅡ 이 정도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ㅡ 아카데미에서 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두 부문 수상, BAFTA에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1개 수상 ㅡ 이유에는 히스 레저의 연기가 거진 절반 이상을 먹고 들어간다.
솔직히 주인공과 가장 강력하게 맞서는 적수가 왜 "조연"이라는 자리로 밀려나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보다 "조커"라는 제목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상식적인 면을 좀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배트맨이 주인공이어야 하니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을 고수한다 하더라도 "다크 나이트"의 "다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순전히 조커의 덕이다.
영화사 상 가장 위대한 연기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 영화가 성공한 이유에 히스 레저가 있다고 해서 오로지 히스 레저 덕분에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발캐스팅의 끝이라고 볼 수 있는 히로인의 선택만 뺀다면, 전 분야에 걸쳐 빠지는 것 하나 없이 고루고루 높은 수준을 달성한, 살면서 보기 드문 영화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가 보여준 그 놀라운 잠재성에 비교해봤을 때 영화가 예상 곡선보다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애초에 거품 평가라고 판단했던 사람들의 고평가에 비교하면 그보다 한참이나 떨어지는 영화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 기대를 저버린 정도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단적인 예를 들면 《배트맨 비긴즈》를 보고 배트맨 트릴로지를 섭렵하겠다는 의지가 《다크 나이트》를 보고 나서 완전히 접혀버렸을 정도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크 나이트》를 칭찬하는 것인가?
왜 그런 사람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볼 생각은 없다고 하는 것인가?
이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부딪치는 이유는, 두 대조되는 관점의 원인이 같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란 바로 "다크 나이트"라는 단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웅과 악당의 자격론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다.
바로 이 철학적인 담론 때문에 나는 영화 《다크 나이트》를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 담론의 존재 때문에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을 굳이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다크 나이트》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뭐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를 살펴보자.

쉽고 익숙한 주제는 이것이다.
과연 영웅과 악당의 차이는 무엇인가?
악마를 보았다》에서도 등장했던, 이제는 슬슬 하나의 클리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 내러티브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아무리 그 궁극적인 목적이 다르더라도 그 목적으로 나아가려는 수단이 비슷하고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작은 결과들이 비슷하다면, 악당과 영웅의 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조커는 배트맨에게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결국 대중들이 보기에 너와 나는 차이가 없다, 너가 무엇을 하려고 했든 사람들은 너 때문에 죽고 너는 사람들의 증오를 산다, 그러니 그 위선의 탈을 벗고 당당하게 공개적인 재판을 받으라.

놀란 감독은 이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관객에게 제시한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그는 한 개인의 존재와 그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 두 가지의 가치를 놓고 봤을 때 후자보다 전자가 앞서는 것을 악당으로, 전자보다 후자를 앞세우는 것을 영웅으로 규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놀란은 일반론적인 관점에서의 답을 제시하지 우리가 정작 궁금해 하던, 그래서 질싸를 했냐 안 했냐 그래서 배트맨이 영웅이냐 아니냐라는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려주질 않는다.
하지만 바로 영화 최후의 장면에서, 제임스 고든의 입을 빌어 튀어 나온 "다크 나이트"라는 단어 하나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 것이 아닌가 한다.
배트맨은 어두운 영웅이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

이렇게 영웅과 악당의 대결 구도로 주제를 몰아가는 것은 적잖이 익숙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다크 나이트》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은, 두 개체를 꼭 같이 놓고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가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특성에 대한 이야기에까지 화제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영웅이 가져야 할 정의관은 무엇일까?
마이클 샌델이 무척이나 생각나게 하는 "정의"라는 단어에 대해, 영웅이 견지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물론 이 문제에 정답은 없다.
양극단에 서 있는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때에 따라 어느 때에는 공리주의를, 또 다른 때에는 정언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칸트의 정언 명령을 더 선호하는 나는, 배트맨이 지독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강한 공리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영웅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DC 코믹스의 히어로들은 강한 공리주의자가 아닌 이상 개인의 영웅적인 신념을 지키기가 힘드리라는 생각도 한다.
비록 《어벤져스》를 보진 않았지만 《아이언맨》 시리즈에서 느껴지던 분위기로 봤을 때, 2세대 히어로라고 불리는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은 그에 비해서는 비교적 약한 영웅관을 가진, 다시 말해 공리주의적인 의무감보다는 개인적인 의무감을 가진 영웅들이 아닐까.
더 얘기하다가는 내 지식의 바닥이 쉽게 드러날 것 같으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반대로 우리는 악당의 자격론도 생각할 수 있다.
과연 조커는 악당일까.
이에 대해서는 소시오패스 증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구나 쉽게 조커는 악당이 아닐까 하는 답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하비 덴트는 악당일까.
그는 어째서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
제임스 고든은 악당일까?
나는 배트맨 이야기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캐릭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고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고든이 영웅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과연 이 캐릭터가 악당은 아닌가에 관한 의문은 말끔하게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고든이 악당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를 악당으로 몰고가는 것인지, 만약 그가 악당이 아니고 스토리 진행에 있어 불가피한 중립적인 NPC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악당의 자격 중 어떤 것이 그에게 결핍된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자.
물론 나는, 이런 영화 감상 후의 복잡한 사고를 즐기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질문만 던져 놓고 여기서 폴드(fold)를 하겠다.

자, 이 정도면 《다크 나이트》의 담론이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를 정리하기 전에, 그렇다면 왜 이 담론 때문에 내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는지를 짧게 밝히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의 연기와 이 복잡한 듯 안 복잡한 이야기를 빼고 나면 단순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가 되고 마는데,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히스 레저가 다시 나올 리는 만무하고 베인이라는 인간의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게 생긴 녀석과 이 단물 다 빠진 진부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져갈 리 또한 만무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어벤져스》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나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을 보긴 봤으나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공짜로 보게 된 것과 비슷한 것이다.

태클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