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man Begins

| 2012. 7. 22. 12:06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개봉해 전 세계 박스 오피스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국한되는 성격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편의상 화자 중 하나는 나라고 가정한다.

A : 야, <다크 나이트 라이즈> 봤냐? <다크 나이트>보다는 별로라던데?
나 : 아니.
B : 아, 맞다. 너 영화관 잘 안 간댔지. 그럼 <다크 나이트>는 어땠어?
나 : 안 봤는데.
C : 영화 보는 거 좋아하면서 <다크 나이트>도 안 봤어? 그럼 <인셉션>은?
나 : 그것도 안 봤어. 크리스토퍼 놀란 작품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가더라.
A, B, C : (구시렁구시렁)

<다크 나이트> 또는 <인셉션> 또는 크리스토퍼 놀란 등과 관련된 문제를 이제는 풀 때가 된 것 같았다.
단편으로 볼 수 있는 <인셉션>과 아무래도 시리즈로 감상해야 하는 <다크 나이트> 시리즈 중 무엇을 먼저 봐야 할지 고민하던 내게 친구 하나가 <배트맨 비긴즈>를 뜬금없이 권해왔다.
밤 약속까지 딱히 할 일도 없던 토요일 저녁인데다가, 안 그래도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내가 그 제안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http://project-blu.com/review.php?titleid=827

진부하기 그지 없는 표현이지만 명불허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 대해, 크리스토퍼 놀란에 대해 들어왔던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스토리 라인의 밀도에 관해서 90년대 이후에 나온 감독 중에 데이빗 핀처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정도의 치밀함이라면 이 면에서 만큼은 데이빗 핀처보다 한 수 위라는 고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쓸모 없는 장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장면 사용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간극은 최소화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편집의 극치였다.
물론 중간 중간 등장하는 클리셰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여기서 클리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것의 진부함에 있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그것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을 두고 문제를 삼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정말 진부함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는 배트맨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로 신선한 내러티브를 구사한 것에, 다르게 말하면 클리셰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 것에 오히려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두 번째로 눈여겨 볼 만한 것은 등장 인물들의 심리 묘사다.
이미 <메멘토>나 <인썸니아>에서 심리 묘사에 대한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 적이 있는 놀란은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만화라는 원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가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까지 창작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대부분의 뒷이야기들이 이미 만화에서 등장한 것이고 놀란이 새롭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전무하다고 하더라도, 영화 감독으로서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가상 인물의 심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있어 참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정의와 복수라는 애매모호한 가치의 경계 ㅡ 이 문제는 <다크 나이트>에서 훨씬 더 심층적으로 다뤘다고 알고 있다 ㅡ 에서 생기는 내부적, 외부적 갈등, 트라우마의 발생과 그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의 성장에 따른 불가피한 사고의 변화 등 인물 내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각, 심리 상태를 직접적인 독백 없이 잘도 그려놨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놀란의 이러한 재능은 어떤 면에서 비판 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놀란의 영화는 전부 다, 단 하나도 빼먹지 않고 항상 팔짱 끼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감상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나는 종종 크리스토퍼 놀란과 나의 성향이 잘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코엔 형제의 작품이나 스탠리 큐브릭,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등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그들만의 고유한 위트 같은 것이 놀란의 작품에선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다.
영화를 정말 잘 만들기는 하는데, 99점에서 100점으로 끌어 올릴 만한 드라이브 ㅡ 내가 생각하기엔 이게 해학미의 부족이라고 보는데 ㅡ 가 없다.
아직 놀란의 작품들을 전부 감상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비판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언젠가 봤던 이 클립이 자꾸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배트맨 비긴즈>를 보면서 단 한 순간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배트맨 비긴즈>에서 즐거움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역설하며 내 비판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취향 차이라는 말밖에 다른 해줄 말이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면서 만족스러웠던 것은 블록버스터 제작 경험이 전무했던 놀란이, 어떻게 당시의 다른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한 장면을 담을 수 있었냐는 것이다.
주먹다짐을 하는 장면이야 참고할 자료가 널렸다고는 해도, 도심을 종횡무진하면서 아주 세세하고 작은 것 하나까지 다 건드리고 짓밟으며 돌아다니는 배트맨의 폭력적인 일상을 참 신선하고 감각적으로 화면에 담아냈다.
앞으로 보게 될 <다크 나이트> 시리즈와 <인셉션> 등의 작품에서, 최소한 화면이나 촬영에 대한 걱정은 일찌감치 접어둬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한스 짐머가 맡은 음악, 크리스천 베일의 열연, 케이티 홈즈의 상큼함 따위는 이 영화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일반론적으로도 항상 성립하는 공식이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 모든 재미 없는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면 아마 다음 문장과 비슷할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가 이 정도면, 대체 <다크 나이트>는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 것일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잽싸게 <다크 나이트>를 보고 눈물을 흘린 뒤, 한국에 도착하면 빠른 시일 내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