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로주점 하

| 2011. 12. 28. 23:23

어차피 이 책의 상권에서 이 이야기의 종착역이 대충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그 곳까지 도달하는 여정이 어떤 식일지 예상했었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나의 예상이 실제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많이 주절거릴 말은 없다.

목로주점(하)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에밀 졸라 (열린책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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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의 '목로주점'은 총 13장 중 7장까지를 상권에, 8장부터 13장까지를 하권에 실었다.
앞의 6장이 불길한 복선을 포함한 제르베즈의 그럭저럭 살 만한 일상이고, 7장이 그녀 삶의 가장 극적인 부분인 그녀의 생일 잔치를 묘사했다면, 하권에 실린 6개의 장은 주체할 수 없이 추락하는 그녀의 삶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타락의 시작은 게으름과 결부된 식탐이다.

파산의 한복판에서도 쿠포와 랑티에는 손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 장정들은 목까지 차도록 가게를 들어먹었고, 가게의 파산을 가속화시키면서 살이 피둥피둥 쪘다. 그들은 서로 더 많이 먹으라고 부추겼는데, 디저트 시간에는 소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라고 농담을 하며 배를 두드려 댔다.

그녀의 식탐과 나의 식탐이 공존하는 사진. 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852675.htm


물론 이 식탐이라는 카테고리에 지난 권부터 조짐이 보이던 술에 대한 중독도 빠지지 않는다.

아! 그것은 정말 엄청난 순례요, 동네의 모든 술집에 대한 일제 점검이요, 아침에 마신 술이 정오에 깨면 다시 저녁에 대취하는 향연이요, 축제의 초롱인 양 마지막 촛불이 마지막 술잔과 함께 꺼질 때까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계속되는 잔의 순회였다.

나는 식탐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굉장히 적은 편이다.
되도록이면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의 태도 전반에서 우러나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미각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둔감한 편이고, 설령 맛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더라도 결국 어느 먹거리를 선택하느냐는 내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식탐이 적은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식탐을 지나치게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호감을 감출 수 없다.
술을 좋아하고, 술에 잘 취하는 내가 '목로주점'에 나오는 수많은 술꾼들의 모습까지 맘 편히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나, 술욕을 제외한 식탐을 부리는 사람들에 대해선 정말 역겹고 한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잠시 빠지는 이야기를 하나만 하고 넘어가자면, '목로주점'은 내가 여태까지 읽었던 모든 소설 중에 술을 마시는 그 장면과 그 후의 느낌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내가 지금 술이 먹고 싶은 것도 다 이것 때문.

하지만 '목로주점'의 제목이 주점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소설의 모든 주제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한 것만은 절대 아니다.
'목로주점'은 폭력과 욕정과 게으름으로 얼룩지고, 그 타락이 연좌제처럼 되물림되는 파리 교외의 실정과 그 돼지 우리에서 똥과 겨를 구분하지 못하고 부대끼는 사람들의 삶 전반을 다루고 있다.
에밀 졸라는 사람이라는 안 그래도 작은 존재가 얼마나 최악의 생명체가 될 수 있는지 '목로주점'에서 생생히 보여준다.
'걸리버 여행기'의 야후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동네 전체를 가리켰고, 한 시간 동안 그 모든 사람들, 짐승처럼 뒤섞여 오물 속에서 뒹굴며 아비,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잠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의 더러운 짓거리를 풀어헤쳤다. 아무렴! 잘 알고 있지, 도처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거든, 그 때문에 온 동네 집들이 오염되고 있고! 그래그래, 가난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사는 이 파리 변두리에서 깨끗해 봐야 얼마나 깨끗하겠어. 이 동네 남자와 여자를 모두 섞어서 회반죽으로 만들어도 잘해야 생드니 벌판의 버찌 나무 거름으로 쓰이겠지 뭐.

소설은 끝을 향할 수록 냉소적인 반어법을 빈번히 사용하고, 절망과 희망의 광경을 교차하여 등장 인물들의 무기력감을 극대화한다.
최후에는 쿠포의 광기 어린 춤으로 독자의 모든 집중을 사로잡으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이 부분은 비소를 먹고 버둥거리는 보바리 부인의 최후와 매우 닮아 있다.
책 뒤의 해설을 읽으면서 플로베르의 사실주의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자연주의가 사실주의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구체적인 사조라 그런지 필연적으로 닮는 부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겠더라.
유전학적인 관점과 환경 결정론을 기반으로 사람의 삶을 그려낸다는 자연주의 소설을 몇 편 더 읽어봐야겠다.
결국 에밀 졸라가 제르베즈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출신 환경과 삶의 터전이 그녀의 삶의 방향성과 범위까지 제한하는 환경 결정론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성실한 인간성으로 그녀가 배운 것이라고는 고작, 분수에 맞게 사는 것 대신 허영, 삶의 쾌락을 향유하는 것 대신 과욕뿐이 아니었는가.

지난 평의 마지막에서 내가 "서술 시점을 교묘하게 변화하여 등장 인물의 심리를 직접 이해하게 하는 서술법"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전문 용어로 자유 간접 화법이라고 하는 모양이다.